신학에 대한 논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값이 싸거나, 수월하게 추구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신학은 모든 경우 또는 모든 청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학의 모든 측면을 조사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은 특정한 경우, 특정한 청중을 위해 유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특정한 제한들이 준수되어야 합니다.
신학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시험을 거친 사람들, 그리고 연구의 측면에서 굳건한 기초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몸과 영혼이 정화되었거나, 최소한 정화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순결하지 못한 사람이 정결한 것에 손을 대는 것은 눈이 약한 사람이 태양 빛을 쳐다보는 것처럼 위험한 일입니다. p.30.
신학의 어떤 측면을 어떤 한계 내에서 조사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드는 측면과 우리 청중의 경험과 능력의 한계 내에서 조사해야 합니다. 과도한 소리나 음식이 청력이나 건강에 해를 끼치고, 너무 무거운 짐이 그것을 운반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며, 과도한 비가 토양에 해를 끼치는 것처럼, 우리의 거친 담론이 청중을 억압하고 과도하게 압박하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청중이 이전에 보유했던 능력을 실제로 손상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리려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신학에 대해 논의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학에 대한 논의가 도를 지나치는 경우를 제외하면, 마치 신학이 경건을 위반하는 것처럼 신학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시기에 어긋나게 신학을 실천하거나, 그런 신학 안에 포함된 교훈을 반대합니다.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는 꿀도 지나치게 먹으면 구토를 일으킵니다(잠 25:16). 솔로몬과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는 기한이(전 3:1)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것도 때가 맞지 않으면 좋은 것이 되지 못합니다.” 꽃은 겨울이 제철이 아닙니다. 남자의 옷도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술자리에서 눈물이 보기에 흉한 것처럼, 애도하는 중에 과도하게 웃는 것도 꼴불견입니다. p.31~33.
진리의 친구들과 진리의 입문자들, 그리고 나와 같은 진리의 연인들이여! 나는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구름을 뚫고 들어가 그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나는 물질과 물질적인 것들에서 벗어나 될 수 있는 한, 나 자신에게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시선을 집중했을 때, 나는 하나님의 뒷모습을 간신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반석(출 33:21-23), 즉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하나님(고전 10:41, 요 1:14) 안에 피하고 있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내가 엿본 것은 근본적이고, 신성하며, 스스로(“스스로”는 삼위일체를 의미합니다) 파악되는 본성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것은 첫째 장막 안에 거하고, 그룹들(출 26:31-33, 36:35-36)에 의해 감춰져 있는 본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 도달하는 장엄한 존재, 또는 신성한 다윗이 영광(시 8:3)이라고 부르는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피조물들 안에 내재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배후에 남기셔서 자신을 암시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뒷모습(출 33:21-23)”입니다. p.50~51.
하나님이 그분의 본성과 본질에 있어서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그런 발견에 대해서는, 그것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조사하고 추측하게 합시다. 그런 발견은 미래에 일어날 것입니다. 나의 추론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 같고(God-like), 신적인 것(divine thing), 즉 우리의 정신과 이성이 그와 유사한 것과 결합될 때, 즉 복사품이 그것이 갈망하는 본(本, pattern)으로 돌아갈 때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는 위대한 금언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71.
성부가 말씀 없이 존재하셨던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분이 성부가 아니셨던 적도 결코 없었습니다. 그분이 진리가 없으시고, 지혜가 없으시고, 능력이 없으시고, 생명이 없으시고, 광채가 없으시고, 선이 없으신 적도 결코 없었습니다. … 성자는 우리에게 참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동등한 분이십니다. … 여러분은 더욱 고귀한 표현들, 즉 육체적인 경험을 초월하는 본성을 신성에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 겸손한 표현들은 여러분을 위하여 자신을 비우시고(빌 2:7) 성육신하여 “인간이 되신(빌 2:7, 니케아 신경)” 분의 복합적인 상태에 모두 돌려야 합니다. 그다음으로 그분은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지상에 묶여 있는 육신적인 의견을 버리고, 더 고귀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시적인 것들 안에 머물지 않고, 신성과 더불어 영적인 실체를 향해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구원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p.133~136.
성자는 인간으로 세례를 받으셨지만(마 3:16, 눅 3:21), 하나님으로 죄를 사하셨습니다(요 1:29, 마 9:2).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는 정화 의식을 거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으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으로 승리하셨습니다(마 4:1-11, 눅 4:1-13). 그분은 우리에게 담대하라고 명하십니다. 자신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요 16:33). 그분은 주리셨지만(마 4:2, 눅 4:2), 수천 명을 먹이셨습니다(마 14:20-21, 15:37-38, 막 6:42-44, 8:9). 진실로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십니다(요 6:41). 그분은 목마르셨지만(요 19: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7:37-38). 그분은 지치셨지만(요 4:6),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십니다(마 11:28). 그분은 무척이나 졸리셨지만(마 8:24, 막 4:38 참고), 바다 위를 가볍게 걸으시고(마 8:24, 막 4:38, 요 6:19), 바람을 꾸짖으시며 물속으로 빠지는 베드로를 건져 주십니다(마 8:26, 막 4:39). 그분은 세금을 바치시지만, 물고기를 사용하셔서 그렇게 하십니다(마 17:24-27). 그렇습니다. 그분은 그분에게 세금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왕이십니다(요 18:37 참고). 그분은 “사마리아 사람, 또는 귀신들린 자”라고 일컬어지십니다(요 8:38). 하지만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눅 10:30). 그렇습니다. 그분은 귀신들이 자기를 알아보자(눅 4:33-34, 막 1:23-24), 그 귀신들을 몰아내십니다(마 8:16 참고). 그분은 악령들의 군대를 바다에 가라앉히시고(막 5:1-20, 마 8:28-34, 눅 26-33장), 귀신들의 왕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보십니다(눅 10:18). 사람들이 그분에게 돌을 던지지만, 그분은 돌에 맞지 않으십니다(요 10:31, 39). 그분은 기도하시지만, 기도를 들으십니다(막 1:35, 마 8:13). 그분은 우시지만(요 11:35), 눈물을 그치게 하십니다(눅 7:13, 8:52, 23:28 참고). 그분은 나사로가 어디에 묻혔는지 물으십니다(요 11:34). 그분이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나사로를 일으키십니다(요 11:43-44). 그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불과 은 삼십(마 26:15)에 값싸게 팔리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보혈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세상을 구원하십니다(고전 6:20, 벧전 1:19). 그분은 어린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시지만(행 8:32, 사 52:7)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며(시 80:1), 지금은 온 세상의 목자이기도 하십니다(사 53:7). 그분은 양처럼 잠잠하시지만(사 53:7), 말씀이십니다(요 1:1). 그분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를 통하여 선포되십니다(막 1:3, 사 40:3 참고). 그분은 찔리고 상하셨지만(사 53:5 참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십니다(마 9:35). 그분은 나무 위에 들리십니다(벧전 2:24). 그분은 거기에서 못박히시지만(요 19:17-18 참고), 생명나무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창 2:9, 3:2, 계 2:7). 그분은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를 구원하십니다(눅 23:43). 그분은 보이는 세상을 흑암으로 감싸셨습니다(마 27:45, 막 15:33, 눅 23:44). p.138~140.
성자는 죄로 말미암아 갇힌 바 되었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실제로 육신과 출생과 정욕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구원하신 모든 사람에게 복종하셨습니다. 비천한 인간이 이러한 혼합(intermingling)의 결과로 하나님이 되고,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여” 출생하실 거룩하신 분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눅 1:78)”이라 일컬어지며, 그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이 부여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누구겠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비우사 하나님의 형체와 종의 형체를 입으신 분(빌 2:6, 7)”에게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신 것(빌 2:10)”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온 집이 하나님이 그분을 주와 그리스도(행 2:36)로 삼으셨음을 알게 하신 것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손(성자)의 행위와 그의 부모(성부)의 은혜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p.150~151.
고귀한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처럼 걸으십시오. 육신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는 동류의식을 가지고 걸으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루시듯이 다루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아래로부터 하나님이 될 것(become God)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위로부터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진리를 붙들고, 그것을 더 고귀하고 더 미천한 모든 이름에 적용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과 영혼에 있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아멘. p.183.
성부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셨습니다(요 1:9). 성자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요 14:6) 역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셨습니다. 세 주체와 세 동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존재하셨고, 존재하셨으며, 존재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실체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세 술어부(predicates)가 있습니다. 빛과 빛과 빛입니다. 하지만 빛은 하나이며,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선지자로서 이상을 보고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고 말했을 때 의미한 바였습니다. 우리는 성자의 빛을 성부의 빛(요 1:5 참고)으로부터, 성령의 빛 안에서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 목격하고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분명하고도 간단한 설명입니다. p.189~190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존재와 본질의 동질성 때문에 그 자체가 그런 것처럼 동반자로서 완전한 일체를 이루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해력을 총동원하여 일체를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신빙성이 있다면, 우리에게 이러한 통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p.209.
나는 성령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제자들의 능력에 비례하여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 그들 안에 거하신 것이 이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은 복음의 초반에 기적을 행하시고(마 10:1, 막 6:7, 눅 9:1), 수난 후에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지시며(요 20:22), 승천 후에 불의 혀로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행 2:3). 그리고 성경을 더 주의 깊게 읽을 때, 성령은 예수님을 통해 점진적으로 계시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성령이 하나님의 경쟁자처럼 보이시거나, 또 다른 권세에 속한 대변인이신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들도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 그분은 나중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보혜사)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내가 구하겠으니”라는 말은 제외하시지만, “보내실”이라는 표현은 그대로 유지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와서(요 16:8)”라는 말씀은 성령의 권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p.225.
성령은 창조하셨으며(시 104:30), 세례(요 3:5, 고전 12:13)와 부활(겔 37:5-14)을 통해 새롭게 창조하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아시고(고전 2:10),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 14:26), 자신의 뜻하시는 곳에서 강력하게 불으시고(blows, 요 3:8), 인도하시고(시 143:10), 말씀하시고, 보내시고, 구별하시고(행 13:2-4), 진노하시며(욥 4:9 참고), 시험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행 5:9). 그분은 계시하시고(고전 2:10, 요 16:13 참고), 조명하시며(요 14:26 참고), 생명을 주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은 절대적으로 빛과 생명이십니다(요 6:63, 롬 8:10).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성전으로 만드시고(고전 3:16, 6:11 참고), 우리를 신화(神化, deifies)하시고,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십니다(요 16:12-13 참고). 그리고 그분은 그런 방식으로 세례에 선행하는 분(행 10:47)이신 동시에 그 이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분이십니다(행 8:14-17). 그분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고전 12:4, 11). 불의 혀처럼 나뉘신 그분(행 2:3)은 은사들을 나눠 주시고(엡 4:11), 사도와 선지자(지혜서 7:27),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들을 세우십니다(엡 4:4, 11). 그분은 지적이시고, 다양하시고, 명확하시고, 구별되시고, 거부될 수 없으시고, 오염이 될 수 없으십니다(지혜서 7:21). 다시 말해서 그분은 완전히 지혜로우시며, 그분의 활동은 다양하십니다(고전 12:11). 그분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구별하십니다. 그분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그분은 변화에서 자유로우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살피시고, 지적이고 순수하면 가장 미묘한 모든 영을 꿰뚫어 보십니다(지혜서 7:23). 내 생각에 그 영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뿐 아니라 천사적인 권세들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그들이 다양한 지역에 흩어져 있음에도 그들을 동시에 꿰뚫어 보십니다(지혜서 8:1). 이것은 그분이 공간적인 제한에 묶일 수 없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p.23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