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 전시실로 이동하면 사자 사냥 장면이 담긴 부조 벽화를 볼 수 있다. 기원전 645년에 제작된 ‘니네베 궁전의 벽화’에서는 아슈르바니팔 왕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자를 사냥하고 있다. 사자들은 으르렁거리며 왕에게 달려들다가 왕이 던진 창과 화살에 맞아 피가 솟구치고 살이 찢긴 채 여기저기 쓰러져 있다.
성난 눈빛과 화려한 갈기 그리고 불끈 솟아 있는 다리의 근육 등 동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이 벽화를 자세히 보면 강조하려는 대상의 윤곽선을 깊게 파내어 살아 튀어나올 것 같은 생생함을 간직하고 있다.
_ 45쪽
죽은 자를 위한 안내서인 사자의 서에는 현실이 힘들더라도 양심에 따라 선한 삶을 산다면 평화로운 내세로 갈 수 있다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믿음과 희망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집트 사람들이 죽어서 가게 될 평화로운 내세는 어떤 곳이었을까?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뒤에 가는 내세를 갈대의 들이라는 뜻을 가진 ‘세케트 이아르’라고 불렀다. 이는 오시리스가 지배하는 물과 곡식이 풍부한 낙원을 의미하며, 그들이 꿈꾸는 내세가 천국이 아니라 현세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임을 보여준다.
_ 67쪽
이상적인 즐거움을 보여주는 네바문의 벽화는 고대 이집트 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집트 회화에서는 인물을 묘사할 때 얼굴은 측면, 눈과 가슴은 정면, 발은 측면으로 조합하여 그렸다. 그들은 얼굴은 측면에서 보았을 때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고, 눈은 정면 그리고 발은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인물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형태로 그림을 그린 이유는 죽은 뒤 부활했을 때 자신의 몸을 잘 찾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육체는 썩어도 영혼의 본질과 특징은 그대로 남는다고 생각했다.
_ 70쪽
처음 이집트 문화를 접하게 된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찬란한 이집트 문화에 비해 자신들의 문화가 초라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이집트 문화를 아프리카 문명이라며 폄하하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의 이름인 스핑크스를 피라미드 앞의 수호신에게 갖다 붙였다.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의 몸과 지혜를 상징하는 왕의 얼굴을 가지고 피라미드를 지키는 수호신의 원래 이름은 ‘지평선의 호루스’다. 호루스는 이집트 신화에서 지상의 왕으로 파라오를 상징하는 신의 이름이다. 이 웅장한 이름을 가진 유물에 그리스의 괴물이었던 스핑크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순전히 그리스인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_ 82쪽
람세스 석상의 진정한 가치는 인류 역사를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관점을 바꾸었다는 데 있다. 람세스 석상이 발견되기 전까지유럽인들은 위대한 서양의 예술과 문명이 그리스에서 시작됐다고 믿었다. 하지만 람세스 석상은 유럽인들의 오랜 믿음과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 문명이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_ 98~100쪽
항아리의 그림은 펜테실레이아가 그리스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와의 대결에서 그가 던진 창에 찔려 죽기 직전의 모습이다. 아킬레우스의 얼굴은 투구로 가려진 반면 펜테실레이아의 투구는 벗겨져 밖으로 내던져진 상태다. 여왕의 창은 아킬레우스의 가슴을 비켜나가고 아킬레우스의 창은 그녀의 목을 관통하여 목에서 피가 솟구친다.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말았고, 아킬레우스는 아마존 여왕의 아름다움에 반해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 잔인하기 짝이 없지만 운명적인 사랑을 표현한 이 작품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문명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 속에 보이는 애절함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신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적은 죽여야 할 대상일 뿐, 적을 사랑하는 장면을 묘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_ 123~124쪽
오랜 내전 끝에 평화와 풍요로움을 맛본 로마 시민들은 그를 신처럼 숭배했으며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을 가진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하지만 그는 신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많은 친구와 병사들의 죽음을 목도한 그는 자신의 생존은 물론 로마제국의 건재를 위해 모든 것들을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또한 삼촌 카이사르의 죽음을 기억하는 그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할 때도 토가 아래 갑옷을 입었으며 10명의 호위병들로 하여금 자신을 지키게 했다.
연회에서 만난 부하 장수의 부인 리비아를 이혼시킨 후 아내로 맞이하여 마지막 여생을 보낸 옥타비아누스가 임종 직전에 남긴 말에서 그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내 연기가 볼 만했습니까?
내 인생의 연극이 마음에 들었다면
박수를 쳐주시오.
_ 165쪽
‘가시 성물함’은 1544년 빈의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는데 그들은 가시보다 가시를 둘러싼 성물함의 금과 보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때부터 성물함의 세속화가 이루어졌다. 1860년 왕가는 복원을 위해 어느 골동품 상인에게 성물함을 맡겼다. 그런데 그는 성물함을 복원하지 않고 대신 모조품을 만들어 자신이 진품을 갖고 가짜를 합스부르크 왕가로 돌려보냈다. 이후 진품은 1898년 로스차일드 은행의 빈 지사장이 구입해 대영박물관에 기증했다.
_ 201~203쪽
영단어 ‘CAST’는 쇠를 녹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굳혀서 만드는 물건을 말하는 것으로 진본이 아니라 복사본을 뜻한다. 17세기 산업혁명으로 부유해진 영국에서는 귀족 자제들을 중심으로 그랜드 투어가 유행처럼 번졌다. 견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멀리 그리스까지 방문하는 일종의 유학이었다. 하지만 문화적 변방에 위치했던 영국에서 이런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물리적, 경제적 이유로 다른 나라에서 공부할 수 없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유럽의 주요 유적지와 유물을 본뜬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복제품을 모아놓은 V&A 전시실이 바로 카스트 코트다. 이곳에서 인기 있는 작품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승전비와 빅토리아 여왕이 이탈리아로부터 선물 받은 석고 주조물을 똑같은 크기로 복제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다.
_ 216~217쪽
1792년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 패배한 술탄 티푸는 두 아들을 영국에 인질로 빼앗긴 것에 분노하여 이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를 자신의 궁전 음악실에 두고 손님이 방문하면 보여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작품에서 호랑이는 티푸 술탄을 상징한다. 왕은 평소에도 자신을 용맹한 호랑이로 비유하며 자신의 거처는 물론 마차와 옷 그리고 무기에도 호랑이 장식을 할 정도로 호랑이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티푸의 호랑이가 영국군의 손에 들어온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영국 국민에게 공개되자 수많은 영국인이 V&A으로 몰려들었다. 이것은 인도에서 영국으로 반출된 최초의 인도 유물이었다. 영국인들은 영국에 저항하던 술탄 티푸가 전쟁의 전리품으로 전락하여 대영제국의 심장인 런던에서 야만적인 호랑이의 모습으로 전시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대영제국의 자부심을 즐겼다고 한다.
_ 224~225쪽
〈그날의 꿈〉의 주인공인 제인 모리스는 이 작품을 그린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를 위해 종종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로제티의 친구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인데, 이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 로제티와 제인은 불륜관계였다.
나뭇잎으로 그늘진 그녀의 머리와 주위의 푸른 나무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녹색 옷은 그녀를 금방 숲속에서 뛰어나온 요정처럼 보이도록 한다. 백일몽에 빠진 듯한 그녀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응시한 채 그 속에 침잠해 있다. 돌무화과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그녀는 인동덩굴 가지를 들고 있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인동덩굴 가지는 빅토리아 시대에 은밀한 사랑을 상징했다.
_ 255~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