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되어 있던 동남아시아 연구를
하나의 흐름으로 꿰뚫다
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 수상
클리퍼드 기어츠, 제임스 스콧, 데이비드 챈들러 추천
‘대항해시대’를 논할 때 ‘동남아시아’에 주목하는 이는 드물다. 주목하더라도 특정한 사관에 매여 왜곡하는 일이 잦다. 식민주의 역사가 동남아시아를 서양사의 배경쯤으로 치부하고, 민족주의 역사는 희생의 땅으로 묘사했듯이. 그러나 이 시기 동남아시아는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유럽이 방문한 곳 중 하나’ 정도로 축소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 대신 ‘교역의 시대Age of Commerce’라는 단어를 제안하며 동남아시아의 ‘전체사’ 쓰기를 시도한다.
저자가 작업에 착수하기 전 이 지역의 역사는 낱낱이 파편화되어 있었다. 사료가 부족한 건 물론,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 묶어 연구하려는 시도 자체가 드물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런 한계 속에서 저자는 ‘“닥치는 대로” 사료를 읽고 연결점을 찾아내’며 ‘전체로서의 지역 생활 방식이라는 일관된 그림’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론보다는 유럽인들의 여행 기록과 식민지 문서를 활용했다. 목록만 70여쪽에 이르는 참고문헌들을 요약·정리·분석했으며 거기에 역사학자로서의 통찰을 덧붙여 연구를 완성했다.
그리하여 20년 넘도록 동남아시아를 연구해온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UCLA 동남아시아센터, 싱가포르국립대학, 호주 국립대학 등에서 후학을 양성한 세계적 석학이다. 이 책을 통해서는 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의 영예, 그리고 발간된 지 40년이 돼가는 지금까지도 동남아시아 연구의 으뜸으로 회자되는 명성을 얻었다. 그의 문장은 동남아시아의 낡은 이미지를 흐리게 한다. 새로운 인식을 위한 공간을 만들며, 마침내 그 자리에 생생하고 매혹적인 세계를 다시 세운다. 이제 그 세계 속으로 직접 들어가볼 때다.
동남아시아를 한데 묶어 연구할 이유
당시 사회를 이끌었던 여성들
언뜻 동남아시아는 하나로 묶는 게 불가능한 지역 같다. 언어와 문화, 종교가 너무 다양해 같은 지역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왕조와 거대 종교에서 눈을 돌려 평범한 동남아시아인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더 많이 보인다.
먼저 동남아시아는 지리적으로 명확히 경계 지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필리핀이, 서쪽으로는 인도네시아가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포물선을 그린다. 남쪽으로는 태평양판과 인도양판이 동시에 확장하며 만들어진 포물선이 자리하고 북쪽으로는 히말라야산맥이 우뚝 서 있다. 육로 접근은 어려웠으나 물길은 어디나 뚫려 있었다. 바람은 잔잔한 데다 계절풍이 선박을 밀어주었고, 폭풍의 위협이 드물었으며 수온도 일정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숲이다. 기온이 높고 강우량이 많아 사방이 울창한데, 이는 산업화 시기를 지난 지금까지도 길들여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인문적 측면에서도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언어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절반 이상은 오스트로네시아족이라는 같은 선조에서 나온 언어를 쓴다. 둘째, 물리적 환경이다. 숲과 물이 많았기에 이들은 쌀·생선과 각종 야자를 주로 먹었고, 나무 기둥으로 바닥을 높이 세운 주상 가옥에 살았다. 셋째, 지역 내 교역이다. 이런 교역은 외부의 영향을 가져오기보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더 단단하게 연결해줬다. 특히 저자가 ‘교역의 시대’라 부르는 15~17세기엔 끈끈함이 절정에 달해, 동남아시아권의 각기 다른 언어가 다른 나라에서 통용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를 한 지역으로 묶어 연구할 정당성을 확보한 후 저자는 온갖 세밀한 주제로 나아간다. 이를테면 ‘신체적 건강’에선 인구부터 식생활, 식재료 공급 방식, 고기·물·술을 섭취한 맥락과 동남아시아의 진정제 ‘빈랑’, 기대 수명 및 전염병까지 다룬다. 이 외에도 ‘물질문화’란 주제 아래선 주거·복식·공예 등을, ‘사회조직’에선 전쟁·노예제·재판 등을 살펴보며 ‘축제와 오락’에선 시합·연극·문해력 등을 들여다본다. 분석이 이어질수록 이질적이던 국가들 간의 연결고리는 명확해지고, 낯설었던 조각들은 하나의 퍼즐로 꿰맞춰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 시기 여성들의 삶이다. 서구의 개입 이전 동남아시아 여성들은 사회의 주역이었다. 장사 수완이 더 좋은 것도, 국가 화친의 문제를 더 잘 처리하는 것도, 연예와 오락에서 더 두드러지는 것도 여성이었다. 교역이 중요한 나라에는 여성 통치자도 제법 있었다. 여성은 남녀관계에서도 더 많은 자율성을 누렸다. 결혼과 이혼이 자유로웠고 시댁살이보다 처가살이가 더 흔했다. 심지어 여성의 성감을 높여주기 위해 남성의 성기에 방울과 핀 등을 집어넣기도 했다. 당시 유럽인의 기록에 따르면, ‘남자들 말이 여자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며 안 그러면 관계를 거부한다고 했다’.
서구의 배들이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를 싣고 오며 이런 분위기는 차차 사라졌다. 남성으로 구성된 성직자들이 남성으로 정체화한 신을 섬기는 경전 종교. 동남아시아 신앙에선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여성이라도 경전 종교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이윽고 여성들은 천천히 글로부터 멀어졌고, 가끔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가려서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동남아시아는 예로부터 여성 인권이 낮았으며 서구의 개입 덕에 그나마 발전된 것이란 인식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이는 실제 역사를 거꾸로 본 것이다. 동남아시아 여성들은 주도적으로 살았고, 이들을 축소한 것은 서구 종교다.
서구가 동남아시아에 갖고 온 것들
‘바람 아래의 땅’의 번영과 몰락
동남아시아의 해안에 커다란 배들이 들어선 시기는 14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전후로 말루쿠산 향료가 유럽에 수입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선단이 동남아시아에 보내졌으며 세계 각국에서 후추를 사들였다. 이렇게 시작된 교역은 점점 번성해 16세기 말~17세기 초 정점에 이르렀다. 1620년대 유럽의 한 해 향료 구입량이 정향 300톤, 육두구 200톤, 메이스 80톤에 육박했을 정도다. 단계마다 100퍼센트 이상의 이윤이 붙었다. 새로운 방식의 돈벌이로 동남아시아는 많은 부를 거머쥐었고, 차츰 이 방식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윽고 바다 위에 정교하고도 역동적인 체계가 생겨났다. 거대한 ‘정크선’들이 주요 무역로를 호령했다. 쇠못을 쓰지 않는 동남아시아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목재만으로도 어찌나 거대하고 견고한지 유럽인들은 늘 감탄했다. 배 위에서는 나코다(선주)가 지상의 왕만 한 권력을 누렸다. 부유한 상인 일부는 이들에게 물건을 맡긴 뒤 육지에 남는 위탁 판매 계약을 맺기도 했다. 한편 바다 건너 들여온 물품들은 육로를 통해 내륙 깊숙이까지 운송해야 했는데, 여기에는 해상 교역보다 훨씬 더 큰 비용과 위험이 수반됐다. 정글을 지날 때면 호랑이를 걱정해야 했으며 수레라도 사용하려면 멀리 돌아가야 했다. 사람 혼자서는 보름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라도 수레와 함께하면 다섯 달의 고통스러운 여정이 됐다.
교역의 영향은 항구에만 머물지 않고 섬나라들 전체로 퍼져나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도시의 발전이다. 당시 버마를 방문한 유럽인의 기록에 따르면 한 도시는 ‘본 것 중 가장 크고 넓’은 도로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사람 열에서 열둘이 나란히 서도 될 만큼 널찍’했다. 도시가 번성하는 만큼 거래도 활발히 일어났다. 금화와 은화는 물론 엽전처럼 가운데 구멍이 뚫린 ‘피치스’ 등의 화폐가 사용됐다. 신용·이자·채무 등의 개념 역시 확실히 잡혀 있었고, 불량 화폐의 유통을 막아주거나 외국인의 무역을 조정해주는 중개인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돈을 아주 많이 벌어 상업 지배층인 ‘오랑카야’가 된 이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위기감을 느낀 토착 귀족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애쓰다가 결국 ‘지구상 어느 곳보다도 오만하다’는 악명을 얻었다.
화려했던 교역의 시대는 17세기에 막을 내린다. 1620년대까지 무섭도록 치솟던 무역 지표가 이후 곤두박질쳤고, 1680년 단말마를 내지른 뒤 완전히 숨이 끊겼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물건을 사가던 나라들이 경제적 위기를 겪었으며, 주요 품목이었던 육두구와 메이스, 정향을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독점했다. 심지어 기후 문제도 영향을 미쳤는데, 기온이 전 지구적으로 떨어지는 소빙하기가 닥치며 작물 재배에 곤란을 겪은 것이다. 이후 무역활동이 활발했던 국가들의 운명은 둘 중 하나였다. 멸절하거나, 죽도록 빈곤해지거나.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남은 작물까지 독차지하겠다고 전쟁을 일으키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쌀값을 다섯 배나 올렸는데, 이 국가들이 쌀은 수입해 먹었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이렇게 ‘동양 최고의 무역 중심지’였던 동남아시아는 ‘저주받은 자들만의 고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들은 ‘훔치는 것 말고는 먹고살 방도가 없을 정도로’ 가난해졌다. 한 기록에 따르면 반튼의 주민들은 ‘전에는 옷차림이 그토록 화려하고 씀씀이도 컸는데, 이제는 너무 가난하고 처량’하게 변했다. 여전히 동남아시아는 저발전의 대명사쯤으로 통용되고 있다. 게을러서, 노력을 안 해서, 재물 축적에 관심이 없어서…… 각자 다른 이유를 들어 함부로 그 빈곤을 설명한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에도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한 시기가 있었으며, 이를 중단시키고 거대한 빈곤을 떠안긴 건 서구 열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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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권의 수많은 언어와 생소한 지명들은 저·역자 모두에게 큰 부담이었다. 저자는 영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통해 모든 사료를 살폈다. 이 가운데는 국립국어원 표기 원칙조차 마련되지 않은 것도 있어서, 역자는 지역 연구자를 수소문해 의견을 구해야 했다. 고된 작업이지만 계속 이어간 이유는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교역의 시대 동남아시아인들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창조적으로 대응했다. 결말이 어땠건 이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과거를 실패로 여기는 대신 역사적 자원으로 삼아 나아가기를, 저·역자는 한마음으로 당부한다. 이 책이 훌륭한 학술서인 동시에 거대한 목소리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