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비유와 동화적 상상력으로
일상의 단면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동시들!
동심이 가득한 세계로 어린이들을 초대해 온 청개구리 출판사의 동시집 시리즈 〈시 읽는 어린이〉 162번째 도서 『멧돼지를 부린 날』이 출간되었다. 2005년 『아동문학평론』에 동시가, 『월간문학』에 동화가 각각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손인선 시인의 네 번째 동시집이다. 어느덧 등단한 지 이십 년 되는 중견 아동문학인으로서 이번 동시집을 통해 어떤 작품세계를 펼쳐 보일지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멧돼지를 부린 날』에 실린 작품들을 읽으면 자연과 시골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생활 주변의 소소한 사물들을 참신한 비유로 새롭게 정의하는 시인의 남다른 상상력이 눈에 띈다. 해설을 쓴 박승우 시인은 『멧돼지를 부린 날』에 수록된 시들의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로는 참신한 비유나 관찰력이 돋보이는 시, 두 번째로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쓴 시, 마지막으로 농촌 풍경이나 시골 정서가 담긴 시가 그것이다.
유선 청소기 안에는
동물 두 마리 산다
청소 좀 시키려고
코드를 살살 당겨 낼 때는
질질 끌려 나오는
나무늘보
끝내고 들어갈 때는
번개처럼 빠른
치타
―「수상한 동물」전문
「수상한 동물」은 유선 청소기를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절묘한 비유를 보여준다. 청소하려고 코드를 당겨서 뺄 때와, 청소가 끝나고 다시 코드를 정리할 때의 모습을 느린 나무늘보와 빠른 치타로 비유한 것이다. 또 다른 작품 「청소기 속에는 뱀이 산다」 역시 유선 청소기를 소재로 하였다. 코드가 청소기 속에 돌돌 말려 있을 때는 뱀이 “똬리 틀고 있”는 것으로, 청소하느라 집안에 코드가 늘어져 있을 때는 뱀이 “꿈틀꿈틀 꿈틀꿈틀” 기어다니는 것으로, 마지막으로 청소가 끝나 다시 밀어 넣으려 할 때는 “대가리를 바짝 치켜들었다가/뒤도 안 돌아보고 쌩!/들어”가는 독 오른 독사로 묘사하였다.
이 외에도 왜가리를 비행기로, 나무 꼭대기를 비행장으로 비유한 「왜가리 비행기」는 왜가리의 비행 장면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목격하는 느낌이 들며, “붓에 달린/길고 풍성한 말갈기가/풀밭을 달릴 때를 기억”하여 “먹물을 쿡, 찍어 글씨를 쓸 때/커다란 종이 위를 한 번에 내달”(「붓」)리는 장면을 읽을 때는 숨을 멈추고 읽게 된다. 목련꽃 봉우리를 고니의 주둥이로 비유한 「목련꽃」, 벚꽃과 조팝꽃을 “한겨울 폭설”로 묘사한 「폭설」, 무지개를 하느님이 몰래 먹는 쫀드기라는 「무지개」도 재미있다. 압력밥솥이 자존심 강한 코뿔소가 되어 푸우푸우 내달리다가 김빠지자, 코뿔소 뿔이 부러진 것처럼 맥을 못 추는 모습으로 그려낸 「압력밥솥」, 맨드라미에 있는 씨앗을 결혼식에 아기 많이 낳으라고 새색시 치마폭에 알밤을 수북이 던져 주는 것에 비유한 「맨드라미」, 두루마리 화장지를 도롱뇽에 비유한 「두루마리 화장지」 등 생명이 없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역동성을 불러일으키는 마법과 같은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고사리밭 한가운데
멧돼지가 내려와 파헤치고 뒹군
커다란 흔적
겁먹은 고사리
파랗게 질려 고개를 푹 숙였겠지
울타리 대나무도 파랗게 질려
사그락사그락 도움을 구했을 테지
그중 용감한
고사리 씨앗 몇과 진드기 몇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고
산으로 갔겠지
커다란 멧돼지가
바람처럼 달릴 때
햇볕 잘 드는 양지쪽에
폴짝 뛰어내렸을 테지
죽다 살아났다고
바싹 올라붙은 가슴을
쓸어내렸을 테지
친구들에겐
야생 멧돼지를 부리며 왔다고
허풍 조금 보태서
자랑삼아 말할 테지
―「멧돼지를 부린 날」전문
고사리밭에 멧돼지가 출몰하였다. 고사리는 겁을 먹고 울타리 역할을 하던 대나무조차 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용감한 고사리 씨앗 몇과 진드기 몇이 있었으니, 그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 어느 햇볕 잘 드는 양지에 폴짝 뛰어내렸다. 새로운 곳에서 만난 낯선 친구들에게는 “야생 멧돼지를 부리며 왔다고/허풍 조금 보태서/자랑삼아 말”하며 우쭐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멧돼지를 부린 날」은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 중 하나이며, 표제작이기도 하다. 손인선 시인은 같은 해에 동시와 동화로 나란히 등단한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손 시인은 이 같은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 현실과 환상이 결합한 동화시 형태의 작품을 다수 창작하였고, 이번 동시집의 뚜렷한 특징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농작물을 망쳐 농부들에게 걱정거리를 안기는 멧돼지, 고라니, 두더지가 오히려 올해는 자기가 좋아하는 농작물을 심었을 거라며 김칫국을 마시는 「김칫국」, 도깨비가 나오는 「여주 이야기」「도깨비 씨름」「우리 집에 사는 도깨비」, 글 모르는 개미 부부가 약 묻은 파스는 두고 밀착포를 붙이고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이야기하는 에피소드를 민담처럼 능청스럽게 표현한 「플라세보 효과」, 이외에도 「벼룩학교」「무논과 개구리」「고드름 1」「혼족」「고드름 2」「이게 아닌데」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농촌 풍경이나 시골 정서가 담긴 작품도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준다. 텃밭을 가꾸며 직접 농사를 짓는 손인선 시인에게 농촌과 시골 이야기는 뗄 수 없는 이야깃거리일 것이다. 손 시인은 거기에 덧붙여 도시의 자녀, 손주들과 떨어져 시골에서 살아가는 조부모들의 이야기도 놓치지 않았다. 「경고」「자리싸움」「할머니 무덤가」「춘삼이」「CCTV」「마지막 찬스」「동글동글 수박」「대나무」「빈집이 늘었다」「외톨이 고인돌」「참새들도 아는가 보다」「할머니 탐구생활」「아빠가 운 날」「가장 위대한 일」「더운 건 못 참아」「호두 두 알」「노래값」「새들만 신났다」「감자」「마을버스」「개구리는 붕어 편」 등의 작품이 이에 속한다.
늦가을 산골 마을
찾아온 까치
고민에 빠졌어요
어느 집부터 가야 할지
어느 밥상부터 받아야 할지
감나무째
까치 밥상으로 내놓은 집이
한 집 더 늘었거든요
―「빈집이 늘었다」전문
산골 마을에 찾아온 까치는 고민에 빠졌다. 도시의 야생동물은 먹이를 찾느라 걱정이지만 시골의 까치는 “어느 집부터 가야 할지/어느 밥상부터 받아야 할지” 고민이다. 행복한 고민을 하는구나 생각하겠지만 제목을 보면 심상치 않다. “감나무째/까치 밥상으로 내놓은” 빈집이 하나 더 늘었다는 데서 심각한 지방 소멸 문제를 체감하게 된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요즘 어린 독자들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방 소멸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가는 이 시대에 이러한 작품은 꼭 필요하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이야기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멧돼지를 부린 날』은 시인이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시적 감수성으로 익숙한 사물을 새로운 시선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다. 동화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는 독자들이 동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흥미를 잃지 않게 한다. 어린이들에게 시적 재미를 느끼게 하고 따뜻한 인성을 키워주기에 손색이 없는 동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