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도 물이주게. 물이 흐르멍 길이 나주게.”
수향은 그제야 울음이 가라앉았다.
제주도는 마른 하천이 많았다. 평소에는 하천인지 맨땅인지 구별이 안 갔다. 하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그 하천에 물이 거침없이 흘러 물길을 이루었다. 굉음을 울리며 거세게 흘러가는 물길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눈물이 길을 낸다는 말에 수향은 위로를 받았다. 아무리 슬퍼도 그 슬픔을 견디면 반드시 길이 생긴다. _ p.35
36년간의 일제강점기는 조선 사람들에게 삶과 영혼이 찢겨나간 시간이었다.
1945년, 조선 사회는 일본군과 헌병 경찰이 총검과 채찍을 들고 사람들을 탄압하는 거대한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언어와 문화 말살, 잔혹한 폭압, 토지 수탈, 강제징용, 정신대 동원, 창씨개명. 조선의 어린아이들은 “순사 온다”는 한마디에 울음을 뚝 그쳤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해방에 감격했다. 온 골목과 대로마다 환희의 만세 물결이 끝없이 이어졌다. 일제는 한일합병 전부터 애국가가 한민족의 단결과 독립 정신을 고취한다며 애국가를 부르거나 연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수향은 국민학교에서 기미가요를 불렀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해방일이 왔건만 그 누구도 오랜 시간 금지된 애국가 가사를 정확하게 외우지 못했다. 사람들은 기억을 더듬으며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맞춰 서툴게 애국가를 불렀다. 3·1 만세 운동 이후로 태극기를 소지하는 것도 금지된 탓에 사람들은 일장기 위에 검은 먹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흔들었다.
하지만 해방된 지 2개월이 지난 지금도 수향은 해방을 실감하지 못했다.
수향은 여전히 해방되지 않았으니까.
양손에 든, 생선과 채소가 미어터질 것 같은 바구니가 그 증거다. 경성 아버지 집에서 지낸 몇 년은 감옥같이 답답하기만 했다. 언젠가는 해방될 수 있을까?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바람처럼.
제주의 바람처럼. _ p.48~50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금방 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대기가 습했다.
제일 먼저 장미 문양의 거대한 철제 대문이 눈앞에 들어왔다. 철제 대문 뒤로 높이 자란 소나무들과 넓은 잔디 정원 너머 두 채의 집이 보였다. 서양풍 대저택과 일본식 목조주택이었다.
푸르스름한 박공지붕은 3층 대저택에 음울한 어둠을 드리웠다. 붉은 벽돌로 치장된 외벽은 지붕의 그림자에 잠겨 있었고 오래되어 얼룩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뾰족한 아치 형태의 높은 창들은 일렬로 줄지어 있었다. 어두운 창들이 빛을 차단해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벽돌 틈새마다 이끼와 덩굴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장엄하면서도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집은 마치 오래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 수향을 조용히 압도했다.
목조주택의 넓은 처마 끝은 세월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검붉은 나무 기둥과 벽면에 깊은 그림자를 떨어뜨렸다. 겹겹이 엇갈린 기와지붕에 남아 있는 빗물 자국은 마치 더러운 얼룩 같았다. 일본식 종이가 덧대어진 미닫이문이 집을 둘러싼 복도를 따라 연달아 늘어서 있었다. 다다미방이 최소한 다섯 개는 넘어 보이는 큰 집이었다. 집 뒤로 커다란 흑죽림이 음산하게 우거졌다. 가을바람에 검은 대나무들이 좌우로 춤을 췄다. _ p.54~55
그날 밤 도진과 난실은 한바탕 부부 싸움을 했다. 며칠 후, 난실이 생각을 바꿔 수향을 학교에 보냈다. 부모님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수향이 중학교 1학년으로 들어가게 됐다. 또래보다 늦게 입학했지만 수향은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등교 전날에 흰 교복 셔츠, 남색 상의, 교복 주름치마를 몇 번이나 다림질했다.
“네가 시집간 뒤에 사돈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래도 중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난실이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였다. 도진과 난실은 딸이 나중에 결혼해서 사돈댁에게 일자무식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인 모양이었다. 수향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체면 때문이었지만 이유가 뭐든 낮 시간만큼은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수향은 숨 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심부름과 집안일이 줄어들었다.
등교 첫날, 수업을 들으며 수향은 속으로 다짐했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는 거야. 그러면 교원이 될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이 되면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어. 그 뒤엔 이 집을 나가서 혼자 사는 거야.’
부모의 기대와 달리 수향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래보다 뒤처진 공부를 따라잡느라 밤늦게까지 책을 붙들었다. _ p.85~86
‘계속 울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야.’
분노를 삭이고 뭔가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이 터무니없는 결혼을 되돌릴 방법을. 책상 서랍에서 외할머니의 요령을 꺼냈다. 딸랑. 딸랑. 요령을 살짝 흔들어 그리운 소리를 들었다.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눈물도 물이주게. 물이 흐르멍 길이 나주게.”
참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어. 추는굿을 한 뒤로는 이상한 것이 보이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지.’
이 집에 들어온 뒤로 교코가 계속 수향에게 말을 걸었고 몇 가지 환상을 보여주었다. 비밀 일기장이 있는 위치도 알려줬다. 교코는 왜 나에게 계속 경고하고 도움을 주는 걸까. 어쩌면 교코가 해결책을 찾아줄지도 모른다.
‘한 번만 더 도와줘.’ _ p.140~141
수향은 두만과 부모가 죽기를 원했다. 아버지에게 평생 시달려온 세쌍둥이는 수향의 설득에 넘어갔다.
“죽이는 수밖에 없어. 꼭두각시 노릇을 그만두려면.”
며칠에 걸쳐 수향은 세쌍둥이에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네 사람은 의논 끝에 똑같이 생긴 양념통 네 개를 구했다. 하나에는 청산가리액을 넣고 나머지 세 개에는 물을 넣었다. 야바위 게임처럼 섞고 섞고 또 섞어서 누가 청산가리액 양념통을 가졌는지 아무도 모르게 하기로 했다. 완성된 육개장 냄비 앞에 서서 네 개의 양념통을 동시에 열고 액체를 들이부었다. 수향이 국자로 펄펄 끓는 냄비 안을 크게 휘저었다. 둥글게 둥글게 젓고 또 저었다. 우리를 지배하고 괴롭혔던 압제자들을 죽이되, 누구의 손으로 죽였는지는 우리조차 모르게 하자. 넷이 내린 결론이었다.
계획은 성공했다.
이제 해방은 우리의 것이다. _ P.184~185
‘오늘 나는 사람을…… 부모님을 죽였어.’
막상 복수를 실행에 옮기니 허탈했다. 왜 내 팔자는 이토록 기구하지. 억울하고, 슬프고, 무서웠다. 어머니도 외할머니도 여동생도 모두 죽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내가 죽였다. 내가 살인자가 되다니. 저절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수향이 흐느껴 울기 시작하자 세쌍둥이가 놀랐다. 잠시 후 영우가 서럽다는 듯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곧 전염병처럼 번졌다. 영진과 영일도 울었다. 울음이 대나무 숲을 덮쳤다. 영우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수향의 얼굴에 눈물에 젖은 제 얼굴을 부비더니 키스를 했다. 그러자 영일과 영진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수향에게 다가와 키스를 졸랐다. 수향은 마치, 공평하게 어린 세 아들에게 사탕을 나누어주는 어미처럼 세 사람에게 차례대로 키스를 나누어주었다. 이번엔 영진, 다음엔 영일, 마지막으로 영우.
이윽고 수향은 세쌍둥이를 탐하기 시작했다. 모험이 시작되었다.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탐험가처럼 수향은 한 번도 발을 내딛지 않았던 낯선 곳을 향해 발을 디뎠다. 수향은 세쌍둥이를 동시에 점령했다. 새끼 개 세 마리를 한꺼번에 품는 어미 개처럼. 볕에 그을린 갈색의 세 육체 위로 백옥 같은 나신이 포개졌다. 세쌍둥이를 완전히 지배하면서 수향은 온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격렬한 쾌감이 온몸에 엄습했다. 동시에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두만의 압제 아래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들. 내가 살인자로 만들어버린 이 세 사람을 이 거친 세상에서, 전쟁에서 지켜내야 한다. 우린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수향이 원했던 결혼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녀에겐 세쌍둥이뿐이었다. 평생 외로웠는데 이 세쌍둥이가 고독을 달랠 온기를 주었다.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수향은 문득 행복했다. 세쌍둥이는 남편들이자 연인들이요, 그리고 자식들이었다. 수향과 세쌍둥이는 살인의 공범이 되고 나서야 진정한 가족으로 재탄생했다. _ P.264~265
“난 결코 널 떠나지 않아. 아버지의 나라 따윈 버린 지 오래야. 이름도 버렸고.”
마사키가 수향을 안으며 힘주어 말했다. 마사키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수향에게 입맞춤을 했다. 그의 입술은 불에 탄 재 맛이 났다. 마사키가 검댕이 묻은 입술로 속삭였다.
“이제는……”
그가 말을 이었다.
“네가 나의 나라야.”_ P.469~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