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떤 일자리가 주로 대체되는가, 구체적으로 어떤 직업(Job)이 AI에 의해 대체되기 쉬운가’를 밝히
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주요 문헌을 분석해서 측정 지표를 정하고, 한국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을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일단 인공지능의 영향은 과거 산업용 로봇, 소프트웨어를 도입할 때와 다릅니다. 과거 기술은 저학력·중숙련 노동자를 많이 대체했는데, 인공지능은 고학력·고임금 노동자가 해온 업무와 상당히 중복되고, 그만큼 이 업무를 대체할 가능성이 큽니다. _ 17쪽
한국 회사에 속한 디자이너들얘기를 들어보면 생성형 인공지능 사용을 강제당하거나, 기존에 여럿이 하던 일을 혼자서 하는 경우가 전보다 더 빠르게 전개되는데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이에요. 그에 비해 할리우드의 이 창작자들은 조합 단위로 의견을 모으고 함께 소송도 내면서 단체로 대응하고 있어 우리 현실에 비해 나아 보였습니다. _ 49쪽
이 단체협약에 대해 놀라운 점이 많았어요. 가장 놀라운 부분은 “배우를 고용하지 않을 목적으로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이 조항은 엑스트라 배우도 해당합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엑스트라 비용을 줄이려고, 적은 인원으로 찍은 장면을 복사해서 붙여 넣는 일이 흔했거든요. 이런 작업이 엑스트라 배우들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할리우드의 단체협약은 이런 일을 금지한 거예요_ 53쪽
플랫폼 기업의 알고리즘은 산재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2024년 초 민생 토론회 때 이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플랫폼의 인공지능이 판단했을 때 배달 라이더가 10분 정도에 배달을 끝내야 하는데 시간이 초과하면 메시지를 보냅니다. “현재 배달을 진행하고 계신가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드릴까요?” 이렇게요. 그런데 보통 오토바이로 배달하는 라이더들이 이 메시지에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호등과 차량 흐름을 봐야 하는데 자꾸 이 메시지에 신경 쓰면 위험하죠. 그런데 이 메시지에 답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생깁니다. 이 점에 대해 라이더 노조들이 지속적으로 항의한 끝에 일부 시정됐다고 하는데, 메시지가 네 번에서 한 번으로 줄어든 게 전부라고 합니다. _ 61~62쪽
사람들이 하던 일의 주도권이 인공지능으로 완전히 넘어가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잘하던 일을 인공지능이 더 잘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적 역할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재미’를 느끼는 데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이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_ 100~101쪽
또 다른 우려는 인공지능이 도입되면 될수록 어떤 기사를 써야 할지 기자들의 판단 능력이 중요해지는데,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자들은 그동안 수작업으로 기사를 써왔기 때문에위에서 시키는 대로, 쓰라는 기사 잘 써서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단순 업무를 기계가 대신할수록 기자들은 더 의미 있고 중요한 기사를 써야 하는데 그걸 어려워하는 거죠. 갈수록 세상이 복잡해지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 어려운 상황들이 펼쳐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팩트 체크도 어렵고 복잡한 사안을 풀어내기도 힘들다 보니 기자들이 인공지능팀에 와서 “무엇이 진실인지 인공지능이 판별하게 할 수 없느냐”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_ 135쪽
인공지능 도입 과정에서 노조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상담사들의 상담 기록이 인공지능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학습 데이터로 사용되는 문제입니다. 예전과 달라진 점 중 하나로 저희가 상담하는 모든 말이 컴퓨터상에 텍스트화되고 기록되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기록이 저희 상담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회사에서 이 텍스트를 저장하라고 계속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런 용도가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이런 데이터를 상담사의 동의 없이 인공지능 학습용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노동조합이 없는 상황에서 개별 상담원이 감당하기는 어렵죠. _ 149쪽
타격과 불평등이 가시적인 영역에서는 관련 입법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사례입니다. 배우 및 기타 공연자와의 계약에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해 목소리나 외모를 복제할지를 명시하고, 사망한 배우의 디지털 복제물 사용에 제한을 가하는 법안에 최근 주지사가 서명했습니다. 긱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규정하고 알고리즘 투명성을 명시한 스페인 등의 입법 예도 노동자의 경제적 보호라는 점에서 유사한 맥락입니다. 이런 법제화는 노동자의 강력한 문제 제기와 이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추동력이 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_ 237쪽
결국 인공지능에 대한 법적 규제보다 앞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공지능의 기술적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르고 그 기술적 특성상 기술 구현 ‘과정’ 자체를 법적으로 규제하기는 힘들다. 둘째, 따라서 인공지능의 사용으로 차별이 일어났는지, 누가 이익을 봤는지 ‘결과’적으로 판단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데요, 그런 방식의 규제는 앞서 논의한 〈EU 인공지능법〉의 자율 규제 방향과도 맞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_ 265쪽
지금은 인공지능에 대한 제도 자체의 혁신이 필요하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속도, 그 방향과 파급력의 불확실성 및 가변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성급한 규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의 가능성과 위험에 대한, 사실에 기반한 사회적 공론장의 활성화와 실질적으로 문제를 다루어나갈 기술-사회 거버넌스 정립이다. 인공지능 기술이 불평등과 배제를 강화하는 기폭제가 되는 대신, 사회 구성원의 고른 참여, 더욱 평등하고 활기찬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촉매제가 되게 하는 것은 결국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의 실력, 그리고 기술 과정과 환류되는 사회적 과정이다. _ 2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