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은 현대 세계와 같은 황량한 땅 위에서라면 결코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지형은 대단히 안전하고 안락하지만, 또한 단조롭고 상투적이고 평온무사한 까닭에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박탈하고 우리에게 해로움을 끼친다. 단조로운 지형은 유연한 생물학적 재능이 발현될 기회를 차단한다. 공간을 누비는 사람이 발밑의 까다로운 지면에 민활하게 반응하는, 작지만 기적과도 같은 민첩성을 둔화하는 것이다. -13p
나의 제안은 자발적 행위의 관점에서 건축을 재고하자는 것이다. 이 작업은 다섯 갈래로 나뉜다. 지면의 형태에 따른 기민한 움직임, 움직이는 건축요소의 처리 ,복합적 차원의 해석, 미지의 공간의 발견, 행동의 장이 갖는 포괄적 자유다. 이 주제들이 이 책의 다섯 장을 구성한다. 겉으로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개인과 세계 내에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 각 장은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다섯 종류의 인간 행위를 탐구한다. -18p
축조된 환경의 지면은 움직이는 몸을 창의력의 주체로 일깨우는 일차적 원천이다. 그 위에서 우리는 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균형 감각과 민첩성을 발휘한다. 오늘날에는 평평한 바닥과 반복되는 계단처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균일한 지면이 모든 곳을 점령하고 있다. 필요성을 넘어 과도해질 때 그런 지면은 우리의 몸에서 힘을 떼어내 우리를 단조롭고 기계적인 운동에 복속시킨다. -21p
건물의 동적 요소란 우리가 손과 손가락으로, 때론 온몸으로 직접 제어하고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는 것들인 창과 문, 덧문, 출입문 등을 말한다. 이 요소들은 주변의 공간을 의미 있고 바람직하게 즉시 바꿀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나 변화의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과정에 참여하는 우리의 행위다. -67p
브리온 가족묘지에 숨어 있는 비밀스러운 조작행위는 명상을 위해 마련된 공간인 연못으로 가는 복도에서 정점에 달한다(109쪽 위).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닥에서 신기한 메아리가 울리고, 그 끝 즈음에서 그늘진 곳에 두꺼운 유리문이 발길을 막아 방문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 문은 여닫이가 아니고 위로 열리지도 않는다. 잠시 서투르게 실험을 한 뒤에야 방문객은 상단을 잡고 체중을 전부 실어 아래로 내리면 바닥에 있는 홈 속으로 문이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 -108p
이탈리아의 상징적인 광장들에 가면 바닥과 주변부의 느슨함에서 광장의 가장 큰 특징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인상적으로 둘러싸인 광장의 정밀한 기하학이 아니라 뒤틀리고 주름지고 구부러진 면들이다. 주위의 벽들은 들쑥날쑥하며 느긋함을 보이기도 하고, 변두리를 따라 구석진 자리들을 만들어내며 다양한 선택의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잠시 몸을 감추거나, 군중으로부터 물러나거나, 기둥에 기대 쉴 수 있는 주랑 현관과 아케이드도 활동의 장소가 되어준다. -135p
세계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은 인간의 타고난 특성이다. 호기심은 매혹적이고 희망적이면서도 신비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탐구하려는 충동에서 발현된다. 건물이 사람의 발견을 기다리는 흥미로운 측면,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없는 공간, 수수께끼 같은 디테일, 칸막이나 가림막이 안개처럼 감싸는 공간, 유혹적인 시선 끌기, 전망을 향해 가는 매력적인 길 등을 갖고 있을 때, 그 건물은 환경을 세밀히 살피고 탐험하는 소중한 힘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15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