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12.3 계엄령 선포에서 받은 충격에 대한 반응으로 썼지만 이 책은 놀랄 정도로 논리적이고 이론적 설득력을 갖고 있다.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 날 새벽 2시에 국회의사당까지 달려갔고, 청주에서 탄핵 찬성 집회 주도자의 한 사람으로 나섰을 만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열정은 뜨거웠지만, 그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쓰인 이 책에서는 사회과학자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내부에 있으면서도 거리를 두는”detached within 자세를 끝까지 잘 견지하고 있다. 제자지만 존경스럽다. 손봉호 교수님 추천사 중에서_ 7쪽
나의 관심은 세상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이 결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라면, 책이라는 도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와 교육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_ 19쪽
흔히들 12.3 비상계엄과 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명시적인 민주시민교육은 언제부터 가능할까? 참고로 초등학교 사회 교과는 4학년에서 주민자치를 다루고, 6학년에 가서야 헌법과 국가 기구, 기본권 등을 소개한다. 사실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라는 헌법 제1조 1항조차 아이들이 정확히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민주국가의 아이들이 이 땅에 태어나 가장 먼저 받아야 할 교육은 무엇일까?_ 10쪽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민주시민교육을 포괄하는 더 넓은 생애 교육의 단계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세 단계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즉, 인간 존재가 최초로 받아야 할 교육으로서 '자존감 교육', 사회인으로서 타자와 공존하는 데 필요한 '공감 교육', 마지막으로 국가나 지구촌과 같은 더 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화주의와 민주시민교육'이다. 내가 보기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 세 단계의 교육에서 모두 실패한 사례처럼 느껴졌다._ 10쪽
덴마크 사회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지표를 살펴보면, 덴마크는 세계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에서 매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으며, 높은 사회적 신뢰와 낮은 빈부 격차를 특징으로 한다. 또한 복지제도와 교육의 질이 뛰어나며, 삶의 만족도는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지표들은 덴마크의 자존감 교육이 단순히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의 양육 방식은 이 두 나라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_ 29쪽
셋째, 자존감은 낮지만, 자신감은 높은 사람이다. 이 유형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특정 능력이나 성과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보인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분야에 자신은 있지만, 그게 내 존재 자체의 가치를 증명해 주지는 않아”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은 타인과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경향이 있어 내적인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따라서 성과 중심의 자아상을 극복하고, 내면의 행복과 만족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_ 48쪽
내가 생각하기에 그 대표적인 최근 사례가 윤석열 대통령이다.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행동 전반에는 낮은 자존감이 깊게 배어 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사과할 줄 모른다. 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타인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견뎌내지 못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응수한다. 이는 낮은 자존감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다._ 56쪽
자존감 교육의 첫 번째 원칙은, 자녀를 자신과 분리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자녀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는 말과도 일맥 상통한다. 부모는 자녀를 자신의 창작물이 아니라, 부모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난 하나의 독립적 타자로 존중해야 한다. 자녀를 독립된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는, 자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도록 돕는 출발점이 된다._ 63쪽
교사는 학생의 자존감 형성, 나아가 자신감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교사의 한마디 말, 태도, 평가 방식은 학생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크게 좌우할 수 있다. 학생들을 존중하는 언어로 대하고, 장점과 노력을 강조하는 피드백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학생 개개인에게 맞춤형 피드백을 제공하는 데 있어 한국의 학교는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_ 69쪽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사회적 관계망이 엄청나게 복잡해진 현대 사회는 인간의 본능적 공감 방식과 지속적인 불일치를 빚고 있다. 이러한 공감의 편향성은 차별과 갈등을 초래하며, 극단적인 경우 역사적으로 타자에 대한 폭력과 집단 학살로도 이어졌다. 인간 사회는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며, 타자에게 잔혹한 폭력을 행사해왔다._ 106쪽
공화주의의 출발점은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는 자유주의의 인간관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유주의는 개인이 공동체 이전에 존재하며, 자유롭고 이기적인 성향을 가진 자율적 존재라고 가정한다. 반면 공화주의는 인간이 본래부터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유와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208쪽
오늘날처럼 자유의 이름으로 공동체가 분열되고, 시민의 참여가 갈등과 적대의 증폭으로 귀결되는 현실 속에서, 공화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결점을 보완하고 갱신하는 중요한 이념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동시에, 공화민주주의가 시민의 자유와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할 경우, 전체주의적 공동체주의로 흐를 위험도 경계해야 한다. 213쪽
넓은 의미의 민주시민교육은 사회·정치적 질서의 구성원인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 사회 집단·조직·제도 및 매체를 통해 정치적으로 영향을 주는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집합 개념이다. 이 광의의 민주시민교육은 거의 정치사회화 개념과 유사하게 간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좁은 민주시민교육 개념과 비교해 볼 때, 지향성이나 의도성, 혹은 계획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기능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8쪽
둘째, 사례나 체험 중심 수업의 실행이 쉽지 않다. 앞서 열거했듯이, 이러한 수업은 현장 견학과 체험, 야외 답사 등 교실 밖 활동을 수반한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을 실행할 때 안전 문제가 발생하면, 교사가 과도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교사가 충분히 대비하고 안전 교육을 실시했음에도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지게 하는 '안전 지상주의' 교육은 학생들의 성장 자체에 악영향을 줄 수 있음을 우리 사회가 인지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221쪽
이에 반해 공화주의적 법치주의 교육은 법을 단순히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만드는 공공의 약속으로 이해하며, 학생들이 법의 형성과정에 참여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공화주의적 접근은 법을 외재적 강제가 아닌, 공동체의 자율적 합의로 인식하게 하여, 기존의 법치주의 교육을 보다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방향으로 보완해 줄 수 있다. 225쪽
오늘날 덴마크가 민주적 시민교육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러한 나라는 아니었다. 1814년에 제정된 최초의 국가 교육법은 오히려 위계와 특권을 정당화하고 전제 군주제를 뒷받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당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 계층은 오직 상급자에게 복종하는 법과,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만 교육받았다.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33쪽
덴마크의 아이들은 아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이해하기도 전에, 유치원 시기부터 다양한 일상 경험과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 문화를 구성하는 가치들을 배우기 시작한다. 덴마크 아동청소년교육부Ministry of Children and Education는 모든 유아교육기관과 유치원에서 길러야 할 여섯 가지 핵심 역량을 다음과 같이 제
시하고 있다. 238쪽
덴마크의 초등교육법(Folkeskole법)은 “학생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에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고, 이에 참여하며, 책임질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명확한 법적 근거와 문화적 헌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덴마크 학교들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가치들을 '강의' 방식으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적 실천을 학교의 일상 속에 녹여내어 학생들이 이를 직접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 철학의 핵심이다. 즉, “말로 가르치지 말고 보여주라”는 것이다. 240쪽
이 책이 나의 전작들과 구별되는 점은, 염두에 둔 독자층이 더 넓다는 것이다. 앞서 '수업 비평', '교육 생태계', '교사와 교사 되기'를 주제로 한 책들이 교사를 주된 독자로 삼았다면, 이번 책은 인성과 시민성 교육을 뒷전으로 미룬 채 경쟁 교육에만 매몰된 한국 교육의 현실에 문제의식을 지닌 학부모와 시민들도 함께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이 책이 생애 전체를 아우르는 교육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소동이 초래한 혼란 속에서 온 나라가 고통을 겪던 시기에 집필된 책이기도 하다. 2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