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8 그날 루체른 공연이 끝났을 때, 청중과 음악가들은 한동안 정지해 있었다. 화면이 정지해 버린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비올라와 바이올린의 통렬한 마지막 울림의 여운이 남아 있는 동안 아바도의 지휘봉은 그의 목 근처에서 멈추고, 왼손이 그린 작은 원이 사라진다. 그 순간 동작을 멈춘 아바도는 1시간 반의 사투에 지친 듯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그가 서서히 지휘봉을 내리고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있는 동안에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여전히 악기를 내리지 않고 한참을 정지해 있었다. 단원 모두가 악기를 내린 후에도 한동안 침묵과 정지는 계속되고, 이윽고 아바도의 온몸을 감싸던 긴장감이 풀리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침묵은 마지막 음이 끝나고 약 3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순간은 마치 관객과 연주자가 함께 죽음의 세계로 떠났다가 다시 소생한 듯했다. 소생한 관객들은 전원 기립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는 사람도 있었다. 아바도는 시종일관 무대를 드나들며 빗발치는 커튼 콜에 화답을 했고,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며 감동을 나누었다. 연주자들이 모두 퇴장하고 텅 빈 무대를 향해 계속 박수 세례를 퍼붓는 관객들에게 아바도 혼자 무대에 나와 손을 흔드는 장면까지 보면서 이 음악홀에서 만큼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P66 그가 무너진 도시의 폐허 속에서 음악으로 독일군에 저항한 것이다. 당시 레닌그라드의 음악가들은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하여 오케스트라를 꾸리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단원들이 사망해 처음 모인 사람은 15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휘자를 비롯한 단원들은 거의 아사 직전의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연습을 이어갔다. 죽은 아내를 묻고 곧바로 연습장소에 나타난 단원도 있었고, 연습 중에 굶어 죽은 단원도 있었다.
이윽고 연주회 당일, 필하모니아 홀은 시민과 병사들로 가득 찼다. 절망 속에서도 음악을 갈망한 시민들은 식량 배급표를 모아서 입장권을 구입했다. 공연은 라디오 확성기를 통해 도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공연이 끝난 뒤, 한 소녀가 지휘자에게 꽃다발을 전했다. 폭격과 봉쇄로 폐허가 된 도시 어딘가에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레닌그라드 남부에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파블롭스크 연구소(Pavlovsk Research Station)이다. 이곳은 세계적인 식물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1887-1943)가 설립한 세계 최초의 식물 종자은행이다. 바빌로프는 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이용해서 작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육종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유용한 품종들의 원산지에서 종자를 수집하고, 유전 변이별로 분류하여 보존했다. 1929년에는 한국도 방문하여 호박씨 등을 수집해갔다고 한다. 그의 집념 덕분에 파블롭스크 연구소는 농업을 시작한 인류가 물려받은 유산을 보존하는,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유전자 자원 저장소가 되었다.
전쟁 중 이 연구소는 소련 당국의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바빌로프의 동료들이 연구소와 종자들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폭격과 혼란으로 엉망이 된 씨앗과 견과류, 곡물들을 다시 완벽히 분류하며 괴로운 재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 연구소의 가치를 알고, 점령 축하 파티를 열 호텔과 이 연구소만은 절대 파괴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봉쇄가 이어지는 동안, 바빌로프의 보물을 지키던 동료들은 굶주림 속에 한 사람씩 목숨을 잃어갔다. 그들은 차디 찬 연구소의 책상 앞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눈앞에 있던 땅콩, 귀리, 완두콩, 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들의 곁에는 식량으로 쓸 표본이 가득했지만, 단 하나도 사라진 것이 없었다.
P136 그 연주회에서도 그는 두 시간이 넘게 다른 성악가들의 반주를 맡았다. 예정된 공연이 끝난 후, 40년간 반주만 해 온 68세의 피아니스트는 기립한 청중 앞에서 난생처음 독주를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곡은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곡도, 마음껏 음악을 펼칠 수 있는 긴 곡도 아니었다. “부디 앉아주세요.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밤 제가 반주자로서 겸손하지 못했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저는 때때로 ‘내 반주가 너무 크지 않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오늘 이 멋진 밤을 마련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의 작별을 고하며,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는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 마지막 앵콜 곡을 연주했다. 바로 슈베르트의 〈음악에(An die Musik)〉, 평생 피셔 디스카우의 목소리를 반주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너 축복받은 예술아, 얼마나 자주 참으로 음울한 시간에,
인생의 잔인한 현실이 나를 조일 때,
너는 나의 마음에 온화한 사랑을 불 붙였고,
나를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인도하였던가!
종종 한숨이 너의 하프에서 흘러나왔고,
달콤하고 신성한 너의 화음은
보다 나은 시절의 천국을 나에게 열어주었지,
너 축복받은 예술아, 나는 너에게 감사한다!
P195 또한, 그가 음악을 통해서 터득한 소수자에 대한 시각은 놀라울 정도로 심오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하나 바꾸고 싶은 게 있어요. ‘쉼표’라는 말인데, 보통 제일 익숙한 게 4분의 4박자 네 마디의 악보인데, 대부분 그 넷째 마디 끝에 4분 쉼표가 하나 있죠. 근데 이건 ‘쉼’이 아니라 ‘숨’이에요. 나는 수영을 좋아하는데, 수영할 때 잠깐 올라와 숨 쉬는 시간이 바로 그거예요. 마지막 16분의 1은 그 이전의 16분의 15를 내뱉기 위해 들이마시는 숨이죠. 쉬는 게 아니고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예요! 16분의 1은 16분의 15와 등가예요. 마이너리티는 그런 의미지요. 소수자에 대한 복지는 그냥 퍼주는 게 아니라, 전체를 살리는 생명의 호흡인 거에요.” 그렇다!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지만, 침묵이 없으면 소리도 존재할 수 없다. 침묵 역시 음악을 지배한다. 16분의 15를 차지하는 소리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16분의 1을 차지하는 침묵의 도움이 필요하다.
김민기의 위대함은 음악과 삶, 사회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평생 일관되게 실천해온 데 있다. 〈아침이슬〉과 같이 시대를 상징하는 명곡을 작곡한 천재 음악가였지만, 그는 명예나 부를 좇지 않고, 젊은 예술가 양성과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 그는 새 시대의 리더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전형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떠났다. 결코 남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 서서 모두를 받쳐주는 ‘뒷것’의 모습이 그것이다. 우리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뒷것’을 자처하는 그런 성숙한 사회가 오길 바란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그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속에 나오는 ‘울고 서 있는 처마 밑의 아이, 벌판의 달려가는 아이, 눈 오는 날 산 위에 우뚝 선 아이’를 위한 ‘뒷것’이 되기를 바란다.
P253 1984년생으로 당시 32세였던 하델리히는 놀랍게도 얼굴이 화상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토스카나 지방에서 성장했는데, 15세 때 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얼굴과 상반신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수차례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담당의사는 그가 다시 연주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로 1년 만에 다시 바이올린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심한 화상 자국에 놀란 내 마음은, 그의 활이 현에 닿자마자 완전히 새로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아내는 내 귀에 속삭였다. “이렇게 우아한 바이올린 소리는 처음이야.” 나 역시 내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소리가 아름답지? 연주 홀의 음향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음악에 너무 굶주려 있었나?’ 생각은 곧 이렇게 진화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운드는, 얼굴의 상처에서 잉태된 것이구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온 곡이다. 나 역시 수많은 연주를 들어 보았지만, 그날 저녁 하델리히의 연주는 이 곡을 완전히 새롭게 탄생시키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하델리히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인사에 인사를 거듭했지만, 나에게는 그의 표정이 감격에 겨워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P283 그 동력의 근원에 마르쿠제가 말한 ‘해방적 상상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의학이라는 고된 여정을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늘 그 너머를 상상했다. 치열한 학업 속에서도 악기를 들고 무대에 오른 것은, 바로 그 상상 속에서 느끼는 해방감을 현실로 옮겨오고자 했기 때문이다. 서툴고 어설픈 연주였지만, 그 속에는 억눌림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의학의 궁극적 목표 역시 ‘해방’이다. 질병과 고통, 불완전의 불편과 불안을 껴안은 환자들을 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일, 그것이 의사의 본질적 책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학생 시절 바쁜 일과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어 연습실로 모였던 일도, 음악을 통해 잠시나마 자기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본능적인 실천이 아니었을까.
그 생각이 미치자, 지난 37년 전 도라지 동산에서 흔들리는 촛불을 감싸며 악보를 넘기던 선후배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거센 바람에도 꺼지지 않았던 그 불빛처럼, 우리 안의 음악과 해방에 대한 열망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