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공간을 벗어나보기로 했습니다. 공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삶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8쪽, 들어서며
일주문 맞은편에 연인이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 밑동을 사진으로 찍어봅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저는 이런 것을 찾아내는 게 즐겁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나오는 범종루에서 치즈색 고양이를 찾아보길 바랍니다. - 37쪽, 〈조계산 선암사〉
저는 산사에 와서도 SNS를 보는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인가봅니다. 분명 좋았는데 제 여행은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여행에 비해 반짝이지 않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 머무르며 발견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기에 충분합니다. - 60쪽, 〈조계산 선암사〉
석축은 자연의 돌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석축 사이 틈을 메운 작은 돌이, 작지만 그 자체로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 90쪽, 〈봉황산 부석사〉
조사당에서 내려와 (책 제목처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봅니다. 안양루를 넘어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그림처럼 보입니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힘들었던 모든 과정이 결말을 위한 아름다운 서사처럼 느껴집니다. - 98쪽, 〈봉황산 부석사〉
산사를 관광지로만 찾기보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접근하고 싶습니다. 발 디딘 공간의 건축을 이해하는 것이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123쪽, 〈쉬어 가기 하나, 산사에 대하여〉
청한당 오른쪽에 재미있는 담벼락이 있습니다. 이 담벼락은 누구든 들어올 수 있도록 뚫려 있습니다. 자연이 흘러 들어와 정원이 된다는 말이 실감 납니다. 담이 뚫려 있으니 뒤편의 산이 절의 정원이 됩니다. - 156쪽, 〈만수산 무량사〉
절을 다니며 여러 깨달음을 얻지만, 깨달은 대로 살면 저는 부처가 되었겠죠. 저는 부처가 아니니 그저 이 깨달음이 제 것이 되길 기다리며, 부처님 사리를 모신 금산사를 찾아가봅니다. - 175쪽, 〈모악산 금산사〉
금산사는 불교의 규칙이나 건축양식을 떠나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 많습니다. 불교 신자의 잣대로 보면 제멋대로인 것처럼 느껴질 테죠. 그러나 외부인의 시선으로는 이런 금산사만의 독자적인 모습이 유연하고 균형 있는 대화처럼 느껴졌습니다. - 208쪽, 〈모악산 금산사〉
재즈를 연주자들의 대화라고 하는데 한국 고건축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한 규칙 없이 상황과 인물, 자연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 응용합니다. 서양 건축이 악보가 있는 교향곡이라면, 한국 건축은 악보 없이 즉흥으로 이루어지는 재즈와 사물놀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 231쪽, 〈쉬어가기 둘, 관계의 건축〉
수종사는 높은 산 깊은 곳에 있어 많은 사람이 찾기는 어렵지만,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특별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시야죠. 이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어이 이곳을 찾습니다. 남들 눈에 촌스러워 보이는 게 두려워 내 시야를 스스로 한정했습니다. ‘잘 보이고, 더 많이 사랑받고 싶은 게 뭐가 나빠’라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을 버렸을 때 할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 259쪽, 〈윤길산 수종사〉
고된 삶의 해방을 폭력이 아닌 희망으로 얻으려 했던 어느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을 만지며 작고 포근하게 행복해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떤 석조물이 가장 마음에 들까, 이 불상을 보고 누구를 떠올릴까 궁금해집니다. - 288쪽, 〈천불산 운주사〉
좋은 장소에 자리하며 멋진 풍경을 품은 산사도 좋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건 아닌 듯합니다.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위치라면, 모든 사람이 쉽고 재미있게 불교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봉은사는 충분했습니다. (…) 보이는 것보다는 그것을 보는 내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것만 채우면 됩니다. - 334쪽, 〈수도산 봉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