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물의 본질을 도출하는 맑은 시
사물의 외형과 내면을 구분하여 심층적 의미를 구명(究明)할 때 현상과 본질이란 용어를 쓴다. 현상은 사물이나 어떤 작용이 드러나는 바깥 모양새를 말하고, 본질은 사물을 그 자체이도록 하는 고유한 성질을 뜻한다. 디카시가 사진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영상기호가 내장(內藏)하고 있는 근원적 핵심에 육박하는 것이라면, 디카시야말로 현상과 본질의 조화로운 만남이라 할 것이다. 오정순의 디카시는 이 엄엄(掩掩)한 관계성의 방정식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범상한 눈에 잘 안 보이는 경물의 본질을 도출하고 이를 시화(詩化)하는 데 능숙하다. 1부의 시 가운데 「디카시 한 편」의 공간 해명이나, 「자연 책」의 호활한 의미 부여가 그 실례에 해당한다
맑거나 뜨거운 시의 시간
짧게 머물던 시, 나비 떼로 날다
어느 가슴에 안착할까
- 「낙화, 詩」 전문
승용차의 앞 유리창과 보닛에 꽃이 떨어져 무슨 점묘화의 그림이 된 듯하다. 짐작건대 벚꽃의 낙화가 아닐까 싶다. 유리창은 연청색이나 차체는 암갈색이다. 그러니 자연히 보색(補色)의 조화를 이루었는데, 이 광경을 렌즈로 잡은 관찰자의 눈이 절묘하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고 보면 꽃잎의 낙하와 안착이, 짧게 머무는 시가 되고 떼지어 나는 나비가 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시인은 이를 ‘맑거나 뜨거운 시의 시간’이라고 명명(命名)했다. 낙화에서 시를 얻은 시인은 허다하다. 조지훈이 「낙화」에서 보여준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나, 이형기가 「낙화」에서 보여준 ‘가야 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는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절창 한 구절이다. 오정순은 이 낙화를 두고 ‘어느 가슴에 안착할까’를 물었다.
예리한 관찰력과 정문일침의 시
지구상에 살고 있는 하고많은 곤충들의 관찰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 『파브르의 곤충기』다. 곤충의 이름과 생태를 아는 것은, 그 생장(生長) 과정에 대한 끈기 있고 주의 깊은 관찰에서 비롯된다. 시 또는 디카시에 있어서도, 한 편의 수발(秀拔)한 작품을 얻는 곳에 이 관찰의 시간이 없이는 무망(無望)한 노릇이다. 기껍고 흔연하게도 오정순은 이 대목에 탁월한 장점을 가진 시인이다. 사물의 내포적 층위를 검색하는 그의 눈은 맑고 도전적이며 웅숭깊다. 말하자면 타고난 디카시인의 소질이 흥왕하다는 뜻이다. 2부의 시 가운데 「트라우마」에서 견인한 ‘날개 없이 산 어떤 생’이나, 「펭귄의 봄」에서 소화기 둘로 형용한 펭귄의 ‘봄 마중’ 대화가 특히 그렇다
겨울에 보던 사장님이
봄에 날 보더니
발모제 광고 찍자고 한다
- 「봄이란 묘약」 전문
봄은 언제 어디서나 기사회생의 묘약이다. 저 멀리 뒤편으로 보이는 마른 숲에서도 연초록 새 움의 기지개가 보이고 있으나, 눈앞 화강암 바위를 덮고 있는 푸른 잎새들은 새봄의 힘찬 약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봄을 일러 청양(淸陽) 또는 목왕(木旺)이란 별호로 부르는 것이 매우 합당함을 이 한 장의 사진이 증거 한다. 그런데 여기에 이 시인만이 언표(言表)할 수 있는 유머와 위트 한 자락이 있다. 그 푸른 잎새를 머리, 그것도 대머리를 덮어가는 머리카락으로 치부하는 시적 언술이다. 그러고 보면 그 표현이 자못 합당하여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한 걸음 더 나간 시인은 ‘겨울에 보던 사장님’이 ‘발모제 광고’를 찍자고 한다는 것이 아닌가. 민머리를 덮는 모발로서 봄의 묘약이 참 그럴 듯하다.
원시와 문명의 종횡무진한 행보
현재 우리의 목전에 있는 모든 것은 당연히 과거로부터 왔다. 그 과거의 끝 저편에 원시시대가 있다. 미래학자 버크민스터 풀러는 “인류 지식의 총량이 두 배가 되는데 현재로서는 13개월이 걸리지만, 2030년대에는 3일로 단축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 주장에 의거해서 보면, 오늘도 어느 순간에 급격히 어제의 원시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원시는 오정순의 디카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시적인 풍광과 경물에 상관되어 있고, 그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문명적 시각에 연동되어 있다. 그렇게 말해도 무방할 만큼, 이 시인은 초목의 형상과 생태에 대해 잘 아는 형편이다. 일찍이 공자도 『논어』 〈양화편〉에서 시인이야말로 조수초목(鳥獸草木)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3부의 시에서 「나도 꽃이 되다」의 홍매와 단청, 「종이 경작지」에서 묵은 서책과 영농 기술 등이 양자 간 시적 대비의 구도를 잘 나타낸다.
밤낮 가리지 않는다
마침표 찍으면 무대에 올린다
삼라만상이 관객이고
하늘만 열려있으면 내 몫을 한다
- 「홀로 무대」 전문
원시림 그림 한 폭 같은 숲 안자락에 의연히 자리 잡은 공연 무대가 있다. 나뭇잎의 빛깔을 보면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 원시 무대, 언필칭 ‘홀로 무대’의 어깨 너머로 첨단 도시의 고층 건물이 줄지어 있는 구도다. 양자 대비의 심층적 의미망을 구성하고자 한 사진이라면 썩 잘 된 포커스다. 이 수준의 사진이라면 애쓴 발품이기보다 아예 은혜로운 선물의 결과다. 시인은 밤낮 가리지 않고 마침표 찍으면 무대에 올린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삼라만상이 관객이고 하늘만 열려있으면 내 몫을 한다고 하니, 이 무대의 공연은 오랜 좌충우돌의 행보 끝에 깨달은 인생사의 비의(秘義)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시인 자신에게도 하나로 귀결된 정답이 있기 어려운 문제다.
시와 삶을 반사하는 잘 닦인 거울
불세출의 문예비평가 M.H.에이브럼스는, 지금은 고전이 된 비평집 『거울과 램프』에서 사물을 반사하는 거울과 스스로 빛을 내는 램프의 중층적 의미를 문학의 해명에 활용했다. 이때의 거울은 개인이나 공동체적 경험의 성과를 반사하고 또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우리의 디카시인 오정순 또한 시의 거울에 반사된 사물 또는 그 경험의 존재 값을 충일하게 이해하고 수납한다. 당연히 그 역순의 반영 또한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시인에게 시의 거울이 있다는 다행을 쉽사리 간과할 수 없다. 시인은 4부의 시에서 「하늘 사거리」를 통해 ‘정보 통신로’를 매설하고, ‘천둥경이로움’과 ‘번개깨달음’을 얻는다. 「객관화」에서는 넓은 판 배경에 올라선 꽃송이를 두고, 삶을 꽃피워 무대에 올려 조명한다고 강변(剛辯)한다.
누가 흘린지 모르는 말을 본다
반응 보면 묻지 않아도
분위기 알 수 있지
- 「남이란 거울」 전문
실내 바닥 탁자와 의자 아래에 비친 불빛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유흥을 동반하는 업소인 것 같다. 사람의 그림자 없이 적요한 형국이니, 영업을 모두 마쳤거나 기다리는 중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시인은 이 사진의 때와 곳을 대하여 일언반구 내비치지 않는다. 다만 시의 첫 행에서 ‘누가 흘린지 모르는 말을 본다’라고 한다. 거기에다 이 시의 제목이 ‘남이란 거울’이다. 그러므로 반사되어 비친 이 자리의 풍정(風情)을 보고 알아서 유추하라는 것이다. 나머지 두 행의 시 역시 ‘반응을 보면 묻지 않아도 분위기 알 수 있지’라고 눙치고 간다. 거울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자체발광(自體發光)의 램프가 아닌, 반사광에 의해 자신을 비추어 보게 하는 타자(他者)이자 남이다. 그런데 그 남은 나보다 유익할 때가 많아서, 예로부터 모범이나 본보기를 거울이라 불렀다.
이처럼 오정순의 디카시집 『실루엣 감별법』은 사물의 껍질을 벗기고 본질의 윤곽을 드러내는 맑은 감식안과, 삶의 무늬를 포착하는 예리한 직관이 어우러진 시집이다. 시인은 사진의 표면에 갇히지 않고, 그 배면에 깃든 감정과 의미를 길어 올리며, 언어의 군더더기를 걷어낸 간명한 시어로 독자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의 디카시는 경물의 본질을 시화하는 동시에, 그 본질이 우리 삶 어디에나 스며 있는 풍경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역설한다. 존재와 일상, 자연과 문명이 교차하는 찰나의 장면들을 거울처럼 반사하고 사색하게 만드는 이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스스로를 비춰보는 언어의 반사광이 되어줄 것이다. 부디 이 디카시집을 통해 많은 이들이 자신 안의 침묵을 들여다보고, ‘어느 가슴에 안착할 시의 시간’을 마주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