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했었다. 재건축과는 아무 상관없는 단체였다. 그러나 내가 재건축을 모른다고 흠은 되지 않았다. 다른 후보들은 조합 이사나 대의원을 역임했으나 어차피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고 조합원은 더 몰랐으니 흠잡을 사람이 없었다. 나에게 조합장에 출마하라고 한 사람 중에도 재건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추천한 그들도 몰랐고 추천받은 나도 몰랐고,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재건축 판에 뛰어든 것이다. -29쪽
○ 일요일에 조합 홈페이지와 카페에 업무 보고를 했다. 마감재 협상, 공사비 검증, 정관 개정, 소송 등 일주일 동안의 업무 10개와 예정된 업무 9개, 질의에 대한 답변 3개까지 22개를 메모 형식으로 짧게 올렸다. 반응은 뜻밖이었다. “가슴이 울컥했다”, “이런 소통이 익숙하지 않아서 오히려 어색하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와 같은 댓글이 백 수십 개 달렸다. 장문의 글도 아니고 현안에 큰 진전이 있는 게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_32쪽
○ 조합 일에 대한 조합원의 회피와 조합원의 참여에 대한 조합의 터부시라는 환상의 짝꿍이 모여 깜깜이가 된다. 깜깜이는 음모론의 온상이 되고 비대위가 기생하는 텃밭이 된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조합원이 조합장을 탓할 일도 아니고 조합장이 비대위를 탓할 일도 아니다._49쪽
○ 대의원회는 전임 조합장과 가까웠으니 그들한테 나는 굴러온 돌 정도가 아닌 임전무퇴 정신으로 무찔러야 할 적이었다. 안건 토론이 시작되자 웅성웅성 소란이 일었고 걷잡을 수 없는 고성과 삿대질로 회의는 곧장 난장판이 되었다. … 어떤 대의원은 나를 향해 “죽여버리겠다”는 막말을 퍼부었고 주먹이 오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몸싸움 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행동이 속출했다. 어떤 대의원은 단상까지 나와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기세로 눈을 부라렸다. … 내 편이거나 중립인 대의원도 있었지만 저들의 기세에 밀려 숨소리도 못 내고 있었다. _54쪽
○ 그러다가 싸움이 나기도 하는데, 일단 싸움이 나면 수습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이 시정잡배도 아니다. 교수, 대기업 임원, 고위 공직자, 법인의 대표처럼 사회에서 한가락씩 하던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_65쪽
○ 막말로 조합장과 상근자가 아무 일 안 해도 조합은 굴러간다. 용역업체들에 다 맡기고 도장만 찍어주면 된다. 어느 조합장은 자신과 사무장 단 두 명으로 업무를 해서 인건비를 줄였으니 인센티브를 달라고 했다. 단둘이 했다니 놀랄 일이다. 대단한 능력자이거나 아니면 시공사와 용역업체에 떠넘기고 놀았을 것이다. 인센티브는 부결되고 조합장은 망신만 당했다. _71쪽
○ 업체 관리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공문, 회의록 등의 문서 관리다. 시공사와의 문서 관리가 가장 중요하고 설계사와 감리, 기타 다른 업체와의 문서도 잘 관리해야 한다. 구두 합의는 필요 없다. 문서로 남겨놔야 한다. 지금은 웃으며 사이좋게 지내도 언제 어디서 소송이 들어올지 모른다_77쪽
○ 재건축·재개발은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 새집에 살고 싶은 소박한 바람을 가진 평범한 시민의 얼굴, 투기꾼들이 판치는 쩐의 전쟁이라는 얼굴, 비리로 물든 복마전의 얼굴이 있다. 그리고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의 얼굴도 있다. _89쪽
○ 각자의 생각과 형편도 다 다르다. 속도가 중요한 사람이 있고, 고급화가 중요한 사람이 있으며, 돈이 중요한 사람도 있다. 속도가 중요한 사람은 시공사 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집행부에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집행부를 바꾸면 시간만 늘어진다며 반대한다. 고급화가 중요한 사람은 돈을 더 내더라도 특화를 많이 하길 원하고 그래야 집값도 오른다고 주장한다. 1,000만 원을 투자하면 1억 원이 오른다고 믿는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은 돈 들여 특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아파트에 투자하기보다 현금으로 돌려받기 원한다. 백인백색이다. 그러다 보니 조합이 일사불란한 대오를 갖추기 힘들다. _106
○ 모든 협상이 그렇듯 재건축·재개발에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모두 있어야 한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안 되고, 힘이 어 느 한쪽으로 과하게 쏠려 있어도 안 된다. 그러나 조합에서 온건파의 입지는 좁다. 시공사에 대한 피해의식과 자기 힘의 한계를 모르는 자신감이 상승작용을 일으키기에 강공책을 선호 하는 조합원이 많다. 온건파는 시공사한테 돈 먹은 놈, 회색분자로 매도되기 쉽다. 그러나 강경파가 득세하면 판이 깨질 수 있다. 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강경파지만 일을 망치는 것도 강경파이기 때문이다. 온건파와 강경파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 둘의 호흡도 중요하다. 서로 간에 긴장도 있고 불만도 있겠지만 역할 분담으로 이해하면서 가야 한다. _113쪽
○ 몇 개 조합의 계약서를 비교 검토해 보니 계약서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공사비의 5%는 좌우되는 것 같았다. 공사비가 1조 원이면 500억 원을 아낄 수도 있고 날릴 수도 있다. 시공사는 똑같은데도 두 조합의 계약서가 마치 다른 시공사와 계약한 것처럼 차이가 큰 경우도 있었다. _114쪽
○ 재건축·재개발이 잘못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조합이 업체에 맡기고 방치할 때와 아마추어 조합과 조합원들이 원칙 없이 마구잡이로 간섭할 때다. 몰라서 그렇지 후자의 해악도 상당하다. 마구잡이로 개입하는 그 사람이 조합원한테 영향력이 있거나 임원 혹은 대의원이라면 그것을 차단하는 게 만만치 않다. _132쪽
○ 재건축·재개발은 세 개의 공을 갖고 하는 저글링이다. 세 개의 공은 절차, 형평성, 사업성이다. 절차라는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사업성이라는 공을 떨어뜨리면 욕을 먹는다. 형평성은 둘 다이다. 법적 책임을 지거나 욕을 먹게 된다. _214쪽
○ 유불리를 우선하느냐, 현실을 우선하느냐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조합에 유리해도 안 되는 것은 포기하고 조합에 불리해도 수용해야 할 사안들이 있다. 현실을 먼저 따지고 다음에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순서가 바뀌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비대위인가, 건전한 대안 세력인가를 판단할 수 있다. 조합원은 냉정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_249쪽
○ 우리나라에서 아파트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1990년대 초부터다. 1기 신도시가 불을 당겼다. 연차가 30년을 넘긴 아파트가 수두룩하다. 주차장과 녹물도 문제, 누수와 단열도 문제, 내진 설계가 적용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조경도 부실하고 커뮤니티도 없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앞으로도 재건축·재개발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 것보다 많은 재건축·재개발이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조합원이, 누군가는 조합장이 되어야 한다. _3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