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 나라가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적 기개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일본이 추진한 내선일체화 정책은 이러한 기개를 말살하려는 시도였지만 3.1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가 일제에 맞서 싸울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비록 이 운동이 곧바로 독립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과 지평을 넓히는 전환점이 되었다. (…) 3.1운동은 해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자와할랄 네루는 감옥에서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1919년 조선의 3.1운동에서 조선 민중, 특히 청년 남녀는 압도적인 적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에서는 막 학교를 졸업한 젊은 여성들조차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너도 이 이야기에 마음이 크게 움직일 것이라 믿는다.”
- p26
정의부가 길림 화전에서 운영하던 2년제 군사학교 화성의숙에는 15세 김성주부터 20세 최창걸까지 독립운동가의 자녀들과 독립군 출신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심에는 조선국민회 지도자 김형직의 맏아들 김성주가 있었다. 그는 1926년 아버지 친구들의 추천으로 화성의숙에 입학했다.
학생들은 독립군이 되어 조국 독립에 이바지하고자 했지만 화성의숙의 고루한 민족주의 교육에 실망을 느꼈다. 무장투쟁 교범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조선 왕조 중심의 역사 교육은 흥미를 끌지 못했다. 무엇보다 공산주의 서적을 읽는 것만으로 퇴학당할 만큼 화성의숙은 사상적으로 폐쇄적이었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외교 중심 노선이나 제한적인 무장투쟁만으로는 독립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몰래 공산주의 서적을 읽으며 러시아의 소비에트 혁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 p57~58
타도제국주의동맹 조직원들의 활약은 길림을 넘어 서울과 상하이까지 알려졌고 사람들은 “길림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길림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바람은 ‘길림 바람’으로 불리며 널리 퍼져나갔다. 이 소문을 듣고 김성주를 찾아온 청년들 중 차광수와 김혁은 이후 그의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되었다. 이 무렵 김성주는 ‘김일성(金一星)’ 또는 ‘한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1928년 10월, 김성주는 길회선 철도 부설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고 성토문을 발표했다. 시위는 곧 만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김성주는 이를 일본 상품 배척운동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일본 상점에서 일본 제품을 꺼내 송화강에 던지거나 불태우며 저항에 나섰다.
1928년 10월부터 11월까지 40여일 동안 계속된 길회선 철도 부설 반대 투쟁과 일본 상품 배척운동은 김성주가 이끈 첫 반일 대중 투쟁이었다.
- p62~63
1931년 12월 16일, 연길현 명월구에서 김일성, 차광수, 이광 등 청년 투사 40여 명이 모여 반일인민유격대 창립 준비에 착수했다. 반일인민유격대는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들로 구성된 혁명군대로 조국의 해방과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우는 군대였다. 이들은 일제의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갖추었고 유격전을 통해 해방 지구를 세운 뒤 그 안에 혁명 정부와 학교, 병원, 무기 수리소, 출판소 등을 설치하기로 계획했다. 유격구 주변에는 혁명적인 농촌을 배치해 반(半)유격구를 형성하기로 했다.
동만 각 현에서는 1~20명 규모의 소규모 유격대가 조직되었고, 1932년 3월 초순 안도 소사하에서는 김일성이 직접 지휘하는 18명의 청년 유격대가 결성되었다. 이후 각지에서 유격대 조직이 이어졌다. 눈앞에서 일본군에게 가족을 잃고도 그저 가슴만 치며 울어야 했던 조선의 청년들에게 진짜 총을 들고 왜놈들과 맞서 싸우는 일은 간절한 염원이자 희망이었다.
- p77~78
1931년 만주 사변 직후 중국인과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관내로 피신하던 와중에도 김일성은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일인민유격대 창설에 나섰다. 1934년 일제가 유격 근거지를 포위하며 압박을 가하자 그는 소극적인 방어가 아닌 기습적인 배후 공격으로 맞섰다. 위공 작전이라는 전례 없는 악랄한 탄압에 관해서도 그는 유격구를 더욱 넓히는 전술로 대응했고 결국 유격구를 자진 해산함으로써 방어 중심의 전투에서 벗어나 북만 원정을 단행했다. 그 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깃발은 더욱 힘차게 휘날릴 수 있었다.
이 같은 공세적 전략의 자신감은 김일성 사상의 출발점인 민중 주체 자주 노선에서 비롯되었다. 1930년대 중반, 독립운동을 지지하던 많은 우국지사가 침묵하거나 변절하는 가운데도 김일성은 민중 속에서 희망을 찾았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모든 것을 빼앗긴 민중은 오히려 더 치열하게 항일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노선은 민중을 믿고 민중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 p115~116
하지만 그는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총과 곤봉을 들고 분연히 일어선 민중들의 모습에 감동을 하였다. 특히 여성들이 항일 투쟁에 나서는 장면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김일성은 그런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만들고자 했다. (…) 마침내 연극의 막이 올랐다. 마을 전체를 피바다로 만든 일제의 만행,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가족의 통곡, 투사로 거듭난 어머니와 아이들의 모습이 무대에 펼쳐졌다. 관객들은 눈물을 흘렸고 한 노인은 무대 위로 뛰어올라 토벌대장 역할을 맡은 배우의 이마를 장죽으로 내리치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우리도 일제 놈들과 싸움에 나섭시다!”
청년들은 입대를 청원했고 마을 사람들은 자정이 지나도록 등잔불 아래에서 연극의 감상을 나누었다. 〈피바다〉 공연은 까막눈이던 산골 주민들을 항일 투쟁의 후원자이자 직접 참여자로 바꿔놓았다.
20여 년 뒤 혁명 전적지 답사단이 만강을 찾았을 때 주민들은 등장인물의 이름, 줄거리, 대사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피바다〉 공연이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남긴 충격과 감명은 깊었다.
- p141~142
보천보 전투는 비행기나 탱크 없이 이루어진 평범한 습격 전투였지만 전개 방식은 유격전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목표 설정, 시점 선택, 기습 타격, 방화를 통한 심리적 충격, 정치 선전까지 모든 요소가 치밀하게 결합된 입체적인 전투였다. (…) 1937년은 중일전쟁 발발 전후로 식민 통치가 더욱 강화되고 국내 민족운동이 탄압 속에 침체하던 시기였다. 이때 터진 보천보 전투는 민족 해방의 불씨를 다시 지펴주었다.
“조선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일제에 맞서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
보천보의 불길은 전국 곳곳에 이런 확신을 퍼뜨렸다.
전투를 마친 유격대는 곤장덕으로 빠져나왔다. 대원들은 조국의 흙을 한 줌씩 배낭에 담았다. 한 줌 조국의 흙, 그것은 유격대원들에게 심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 p174~175
조국 진출 대오는 베개봉을 떠나 계속 행군하던 중 마침내 삼지연 못가에 도착했다. 맑고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그곳에서 대원들은 앞다투어 물을 마시며 한껏 목을 축였다. 못가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잔잔한 수면에는 그 진달래가 고스란히 비쳐있었다. 물 위와 물 아래, 현실과 반영이 뒤섞인 그 풍경은 그야말로 눈을 뗄 수 없는 절경이었다. 대원들은 초막을 짓고 그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국의 품에서 느끼는 평온과 감격에 젖었다.
백두고원 특유의 고산 정취와 들녘의 평화로운 조화는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조국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곧 식민지 현실의 비통함으로 다가왔다. 대원들은 장엄한 산천을 마주하며 우리 민족이 얼마나 귀중한 국토를 일제에 빼앗겼는가를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 p208~209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는 1944년 7월과 1945년 6월 무산군 연사면 상단산의 비밀 임시 근거지에서 조국광복회 조직 책임자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민족적 단결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조국광복회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자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당시 국내외의 여러 독립운동 세력도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에 주목하고 있었다. 중경 임시정부의 김구는 직접 연락원을 파견해 연계를 시도했으며 미국 내 교포들에게는 조선인민혁명군 지원을 위한 모금을 호소하기도 했다. 여운형 역시 1944년부터 연계 방안을 모색했으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도 협력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처럼 조선인민혁명군은 단순한 무장 부대를 넘어 조선 민중의 희망이 모이고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이 협력하는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 p246~247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며 전쟁에 돌입하자 김일성도 조국 해방을 위한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과 함께 일본군을 소탕하는 조국 해방의 대성전에 들어갔다. 민족의 해방과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 모습에 소련군은 감탄했다.
조국 해방 작전의 최대 과제는 두만강 연안의 국경 요새를 돌파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경흥, 나진, 웅기 요새와 만주의 훈춘, 동흥진 요새를 ‘난공불락의 방어선’이라 자랑했다. 조소 연합군이 이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다면 총공격 작전의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 두만강 하구에 있는 웅기의 토리는 경흥과 나진 사이에 위치한 핵심 군사 요충지로 이곳이 무너지면 양 요새 모두 위협을 받게 된다. 오백룡 소부대는 폭우 속에 두만강을 기습 도하해 일본군 주재소를 급습했고 토리 일대를 해방시켰다. 증원 병력이 접근도 못 한 채 불타는 주재소를 바라보다가 철수했다. 같은 시각 만주의 훈춘 남별리와 동흥진에서도 기습이 성공하며 일본군 방어망에 혼란을 주었고 방어선의 약점이 드러났다.
이처럼 난공불락이라던 국경 요새들이 단숨에 점령되면서 조국 해방을 위한 돌파구가 열렸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대일 전쟁의 결정적 전투에서 주도적으로 돌파구를 열며 해방의 선두에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 p255~256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조선인민혁명군은 군사 작전을 지속했다. (…) 이와 함께 조국광복회, 전민항쟁 조직, 민중들이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군의 진격을 도왔다. 적위대, 보안대, 자치대, 자위대 등 다양한 명칭의 민중 무장 조직 중심에는 늘 혁명 조직 성원들이 있었다. (…) 통계에 따르면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군이 이미 해방시킨 함경남북도를 제외하고도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전국 1,000여 곳에서 무장봉기와 시위가 발생하여 일본의 통치 체계는 사실상 마비되었다.
민중은 해방 지역마다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갔다. 예컨대 함경남도에서는 8월 말까지 3개 시, 16개 군, 129개 면 전역에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처럼 우리 민중은 자주적인 독립 국가 건설을 향한 실천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해방은 조소 연합군이 일본 관동군을 격멸하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민중 자체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펼쳐진 최후 공격 작전과 민중의 적극적인 전민항쟁, 배후 타격 작전은 일제의 식민 통치 체계를 붕괴시키고 해방을 성취한 원동력이었다.
- p268~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