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에 주목한 심리학적 관점의 자살 교양서나 실존주의 관점의 자살연구가 여럿 출간된 바 있지만, 한국 사회 자살의 시공간적 맥락에 착근하여 그 사회심리적 구조와 힘을 탐색하는 사회학적 사회심리학 관점의 자살연구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역사 속의 자살이나 자살의 사회적 의미에 주목한 괄목할 만한 연구들이 제출되고 있지만, 이들 분석은 다양한 자살사례를 가로지르는 사회적 힘(들)에 대한 사회이론적 통찰과 충분히 결합되지는 못하고 있다. 현저한 양적 증가를 과시하고 있는 국내 사회과학 분야의 자살연구에서도 뒤르케임이 씨름했던 ‘문제들’과 충실히 대화한 연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 이러한 현상 자체가 진지한 성찰을 요하는 논제인 셈인데, 『자살론』이 자살학의 성립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그 현재성과 유용성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프롤로그, 9쪽)
뒤르케임은 개개인의 자살이 심리적 요인이나 유전적 요인, 또는 정신 질환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힘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자살에 책임 있는 원인을 개인과 사회가 관계 맺는 방식, 즉 사회적 유대에서 찾으며, 이 사회적 유대를 다시금 사회 통합과 사회 규제로 나눈다. 사회 통합은 개인이 자신을 사회에 결속하고 사회와 유대감을 갖는 것을 말하며, 사회 규제는 사회가 개인의 존재, 사고, 행위 등을 규율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 항이 개인과 사회를 관계 짓는 방식과 조건에 따라, 네 번째 자살 형태로 명시된 ‘숙명론적 자살’의 개념까지 포함하면 총 네 가지 자살유형―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숙명론적 자살―이 도출된다. (제1부 제2장 자살의 사회학, 101쪽)
앞서 말했듯, 국민국가 내에서 국가가 기능을 하지 않는 상황, 다시 말해 정치로서의 국가는 마비되고 통치로서의 국가만 기능하는 사회 안전망의 부재 상황을 ‘국가-없음’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전후 ‘국가-없음’의 상태에서 만연했던 ‘가족동반자살’은 단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없음’의 상태에서 동일하게 재현되는 구조적 현상이며, 우리 사회의 도덕적 체질과 발생론적 제약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임을 시사한다. 최근 관찰되는 자살현상은 전쟁정치의 규정력과 가족주의적 유대를 한국 사회의 고유한 집합적 경향으로 위치 짓고, 자살현상을 총체적으로 재이론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제1부 제3장 숙명론적 자살의 수수께끼, 168~169쪽)
5·18 과거청산 국면에서 발생한 자살 피해는 켜켜이 누적된 국가폭력의 트라우마와 경제적 강제의 압력, 그리고 사회적 지지의 축소로 인한 사회관계의 위기가 중첩되어 발생한 숙명론적 자살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에 멈추지 않고 5·18 자살자들이 삶의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이 그 2세대와 유가족의 피해로까지 확대 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이는바, 5·18 자살의 발생 과정은 한국 사회에서 국가폭력 피해자의 ‘재희생자화’(revictimization)가 진행되는 메커니즘과 루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 준다. (제2부 제4장 자살과 국가, 214쪽)
5·18 자살자 유가족이 가족의 죽음을 말할 수 없었던 배경에는 여러 층위의 사회적 힘들이 개입했다. 신군부의 집권과 지체된 과거청산 과정은 가족의 피해를 재생산하고 5·18로 인한 가족의 죽음에 관한 진실조차 침묵하게 하는 구조적 요인이었고, 과거청산 이후에도 자살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과 후유증을 피해 사실로 인정해 주지 않는 제도적 제약이 자리했으며, 자살에 대한 정신병리학적 편견과 사회적 낙인은 유가족의 말하기를 억제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인이 되었다. 또한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수반한 가족 내 성 역할 규범은 고인의 자살을 둘러싼 책임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자책과 우울의 감정에 짓눌리게 하는 사회문화적 강제로 작용했다. 5·18 유가족에게 겹겹이 덧씌워진 ‘자살자 유가족’, ‘특권집단’이라는 모순적인 사회적 시선은 유가족의 침묵을 지속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제2부 제5장 자살과 가족, 259~260쪽)
(이태원 참사) 159번째 희생자의 자살은 참사의 발생 국면만이 아니라, 참사 이후 피해자의 존엄과 애도할 권리를 중층적으로 박탈하는 연쇄적인 인권침해 과정에서 발현된 ‘복합 피해’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159번째 희생자의 자살은 트라우마로 인한 자살의 성격을 띠며, 탈진실정치의 아노미적 조건에서 발현된 숙명론적 자살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인권침해가 개입한 범죄형 사회 재난의 경우, 진실에 대한 부정은 인권침해 피해자의 존엄과 명예, 그리고 살아갈 권리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제3부 제7장, 자살과 재난, 378~379쪽)
‘공교육 멈춤의 날’을 정점으로 거리에 나온 교사들이 주장하는 연대의 해법, 공동체적 해법은 뒤르케임이 사회구조적 병리로서 자살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한 직업집단론과 놀라운 교차점을 보인다. 뒤르케임에 따르면 직업집단은 동업 직종 내 구성원의 지속적인 접촉과 상호 소통을 통한 사회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바로 이 과정에서 “경제활동에 있어서 개인적 생각이나 이익과는 다른 것, 즉 다른 차원의 공동체적 가치가 도입”되면서 새로운 규범과 직업윤리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대사회가 직업집단에 기대하는 역할은 “개인의 이기주의를 제어하고 노동자의 가슴에 공동의 연대감을 부양하며 강자의 법칙이 산업과 상업 영역에서 무자비하게 적용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3부 제8장 자살과 직업집단, 449쪽)
뒤르케임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공감이 집단에 대한 애착에 함축되어 있으며, 개인 간의 동정심에 의한 행위들은 우리의 근원적인 도덕적 기질의 일부라고 말한다. (…) 뒤르케임이 『자살론』의 말미에서 긴급한 분배정의의 필요성을 강변하면서도, 직업집단의 재조직이라는 연대의 해법을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했던 맥락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한 『직업윤리와 시민도덕』에서 “정의에 의해 지배되는 의무”와 “박애에 의해 지배되는 의무”를 동시에 강조한 맥락 또한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뒤르케임은 그것이 분배정의든 교환정의든, 동일한 도덕감정―인간이 인간에 대해 갖는 공감―과 의무의 연속선상에 자리함을 강조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뒤르케임은 “참된 의미에서 박애의 의무”가 “마지막 불평등의 흔적에 대해서까지 인간의 공감을 분명히 보여 주는 … 정의의 극치”이며 “새로운 제도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제3부 제9장 자살 레짐을 넘어서, 526~5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