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에 작고한 동방(東方)김세환(金世煥, 1889-1945)은 해방을 얼마나 그리워 했을까. 기쁨도 잠시, 해방된 지 1달여만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참으로 통곡할 일이요, 가슴 아픈 일이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던 김세환의 아버지 김동우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김세환은 3·1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한국 민족운동사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한제국시대 관립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수원상업강습소, 삼일여학교에서 근무하였으며, 1941년에는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는 등 수원지역 근대 교육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지역민족운동가로, 사회운동, 신간회운동, 수원체육회 활동 등에도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세환은 어려서부터 수원 종로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열린 기독교 민족주의자로서 더욱 주목된다. 김세환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중국어과을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경제학과를 다닌 유학파로서 최고의 지성 중 한 분이었다. 그런 그였으므로 전국의 기독교지도자들과 더불어 수원의 삼일여학교 학감으로서 3·1운동 준비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다. 서울 YMCA 간사였던 박희도와 연계하여 경기도의 수원, 이천, 남양, 충남 해미, 공주 등지를 종횡무진하며, 경기도와 충청도지역의 연락책으로서 일익을 다하였다. 수원 종로교회의 임응순, 그리고 서울의 박희도, 경기도 남양의 동석기, 이창회, 충남 홍성의 김병제, 공주의 현석칠 목사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독교 목사 또는 교인들이었다는 점이다. 김세환은 수원지역의 만세운동 뿐만 아니라, 3·1운동의 지도부의 한사람으로서 3·1운동을 전국적으로 기획 조직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의 중심인물들 가운데 일부는 식민지 치하에서 변절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세환은 끝까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였다. 김세환은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운동 등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진보세력과 적절한 타협을 통하여 신간회에 참여하였고. 일정 기간 수원지회장으로도 일하였다.
한편 김세환은 1939년 수원 삼일학교가 새롭게 구성되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수원 갑부인 최상희를 움직여 일만원을 희사하게 하여 폐교 직전의 학교를 구하였다. 아울러 1941년에는 홍사훈을 설득하여 수원상업학교(현 수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해방되기까지 교육에 힘쓰다가 해방된 직후인 1945년 9월 26일에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김세환은 수원지역뿐만 아니라 3·1운동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아울러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진정한 교육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세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료의 부족에 따른 연구의 미진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한다. 이에 광복80주년을 계기로 김세환의 순국 8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 매진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김세환의 제적부, 토지대장, 선교본부의 기록, 대한제국관보, 조선총독부관보, 후손들과의 대화 등을 통하여 김세환의 민족운동을 좀더 심도있게 밝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김세환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과 연구들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이 책의 간행에는 기존 연구들이 큰 도움을 주었다. 황민호교수, 김권정 박사 등의 개척적 연구업적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자료 발굴에 도움을 주신 김승태목사, 한규무교수, 제자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의 김정현, 국가기록원 박종연, 국가보훈부의 정명희님과 수원박물관과 독립기념관, 국가기록원에도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한동민, 이동근, 김경표 등 연구자들과 윤창혁 등 김세환지사의 유족들, 조형기, 박영양, 윤의영, 조성진 등 여러분들의 격려 또한 잊을 수 없다. 끝으로 이재준 수원시장, 김봉식 수원문화원 원장, 김현광 전 수원문화재단 이사장 그리고 항상 응원과 지원을 해주시는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대장 한지성의 후손인 한춘희여사, 최재형기념사업회의 안병학 사장께도 이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2025년 8월 문화당에서
청헌 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