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3반은 대부분 혜정이 위주로 돌아갔다. 혜정이 호감을 보이면 그 아이는 반 아이들에게도 화제로 떠올랐고, 혜정이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아이는 스스로 기가 확 죽었다. 3반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무리가 혜정과 함께하는 아이들이었고, 혜정은 언제나 그 중심에서 반의 공기를 만들어 갔다. _9~10쪽, 「서아현」 중에서
정말로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궁금한 것도 아닌,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한 정도의 의미를 가진 질문. 사귐의 목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질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뭘 그렇게 알려고 해.”
하도의 가시 돋친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_12~13쪽, 「서아현」 중에서
“고양이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우리 집으로 와.”
“어?”
놀란 아현이 하도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하도는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불편하면 안 와도 되고…….”
“…….”
“학교에서는 모른 척할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하도의 말이 가슴에 찌르르 박혔다. 허나 날씨가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심상한 어조였다. 조금의 원망도 독기도 없이 그저 담백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현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갈게.” _34~35쪽, 「서아현」 중에서
민지에게 하도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도 못 했던 이유. 그건 민지도 하도를 고립시키는 6학년 3반 중 한 명이니까. 아니,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제일 나쁜 비겁자니까.
어제 하도네 집에 놀러 가서 하도가 끙끙거리며 보고서 쓰는 것을 보았다. 하도의 농담에 웃고 제제에게 함께 밥을 주었다. 하도가 끓여 준 라면을 먹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철저하게 모른 척, 아니 험담에 동조까지 하고 있다. 그런 자신이 가장 나쁘다고, 아현은 문득 생각했다. _47쪽, 「서아현」 중에서
들어 본 적 없는 학교였다. 하긴 아는 학교여도 상관없었다. 누구에게 말할 것도 아니고, 그저 하도에 관해 한 가지 더 알게 되었을 뿐이다. 혼자만 알고 있는 하도의 비밀, 차곡차곡 쌓여 가는 하도와의 일상. 아현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때는 그랬다. 정말로 누구에게 말할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_56쪽, 「서아현」 중에서
그에 비하면 학교는 정말 쉬웠다.
학교는 가족 사이에서 혜정이 갈고닦은 눈치와 계산이 제대로 먹히는 곳이었다. 이야기를 주도할 타이밍, 분위기를 바꾸는 요령, 숨겨진 의도의 파악. 터울도, 존재감도 큰 남매 사이에서 묻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 온 혜정은 또래 아이들을 쉽게 휘어잡았다. 그런 기술은 학년마다 혜정을 그 반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학교에서만큼은 아무도 혜정을 무시하지 못했다. _69쪽, 「강혜정」 중에서
혜정은 울렁거림을 느낌과 동시에 하도와 가까워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저 아이의 우위에 서고 싶었다. 친해질 자신은 있었다. 이 학교의 모든 게 낯설 전학생이 상대라면 그건 더욱더 간단했다.
그러나 다정하게 포장해서 건넨 혜정의 호의를 하도는 차갑게 내쳤다.
“뭘 그렇게 알려고 해.”
…… 하도가 건드린 어떤 스위치가 이해할 수 없는 분노로 혜정을 가득 채웠다. 차라리 다른 거절의 말이면 괜찮았을 터였다. _71~72쪽, 「강혜정」 중에서
서아현 같은 애들은 다루기 쉽다.
“하도가 다니던 학교 이름을 알아. 한경, 한경 초등학교야. 내가 직접 봤어.”
조금만 발밑을 흔들어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떨리는 아현의 눈동자를 보며 혜정은 미소를 지었다. 하도도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 애는 아무리 흔들어도 그토록 꼿꼿했던 걸까. 부러뜨려 버리고 싶게. _93쪽, 「강혜정」 중에서
모든 것에는 ‘선’이 존재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 지켜야 하는 선, 사회적으로 정해진 선. 무의식중에 혹은 학습을 통해 모두 적정한 선을 지키며 살아가고 그로 인해 질서가 유지되며 일상이 평온해진다는 것을 유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았다. _102쪽, 「오유신」 중에서
전혀 방어하지 않는 하도에게 아이들은 함부로 선을 넘었다. 정의로 포장해 하도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유신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편을 들 생각도 없었다. 그런 것 역시 유신에게는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그저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할 따름이었다. 유신에게 학교는 그런 곳일 뿐이었다. _119쪽, 「오유신」 중에서
“선생님, 저 물어볼 게 있어요.”
유신을 돌아보는 선생님들의 표정이 난처해졌다가 곧 단단해졌다. 호기심처럼 묻는다면 어떤 것도 대답해 주지 않을 얼굴이었다. 유신은 책을 읽듯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하도가 학폭 가해자로 강전 왔다고 저희 학교에 소문이 쫙 퍼졌는데, 사실인가요?”
선생님들 얼굴에 입혀진 단단함이 와르르 무너졌다. 경악의 눈빛을 보며 유신은 생각했다.
‘아니구나.’ _130쪽, 「오유신」 중에서
나보다 일 년 먼저 태어난 언니는 정말로 모든 것이 다 느렸어. 나와 같은 시기에 첫걸음마를 했고, 말은 나보다도 더 늦게 터졌어. 혀 짧은 소리로 종알대는 내 옆에서 언니는 방긋방긋 웃기만 했지. 키도 내가 금방 따라잡았어. 숫자도 한글도 내가 먼저 깨우쳤지. 또박또박 언니 이름을 써 주는 내 옆에서 언니는 방긋방긋 웃으며 기쁘게 박수를 쳐 주었어. 어느 순간부터 언니는 꼭 내 동생 같았어. _149쪽, 「이하도」 중에서
“언니야, 내가 언니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배시시 웃으며 언니에게 속삭이면 언니도 방긋 웃으며 나를 안아 주었어. 나보다 작은 품이지만 늘 나보다 따뜻한 체온이었지. 이런 나날이 좋았어. 내 마음대로 되는 즐거운 학교, 내 마음대로 되는 사랑하는 언니. 언제나 이런 날들이 계속될 것이라고 그때의 나는 굳게 믿었던 것 같아. _157쪽, 「이하도」 중에서
그때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지. 언니가 지내는 학교와 내가 지내는 학교는 혹시 완전히 다른 곳인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놀이터나 다름없는 우리 학교가 언니에게는 다른 얼굴인 것이 아닐까. 문득 예전에 놀이터에서 뛰노는 나를 우두커니 서서 보고 있던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지. 그렇게 금이 가기 시작했어. 조금씩 조금씩. 깨닫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_162쪽, 「이하도」 중에서
모두 거짓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실도 아닌 어딘가. 굳이 그걸 꺼내서 얘기하기 싫은 마음.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모든 걸 인정하는 한마디였나 봐. 아이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어. 나름대로 평온했던 학교의 풍경 역시 변했지. 사방이 입이 되어 나를 비난하고 삼키려 들기 시작했어. _190~192쪽, 「이하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