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바짝 차려! 아까처럼 실수하면 안 돼!”
옆에서 걷던 코크가 다짐을 주듯 말했다. 불과 30분 전의 실수가 내 탓이라는 의미가 잔뜩 들어 있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아까는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 노인의 가방을 빼앗으려 했지만, 눈앞에서 포기했다. 역사 맞은편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경쟁하는 트위치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다가간 순간 노인에게 팔이 하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바람에 죽은 아빠가 떠올랐고, 나는 도리어 가방을 빼앗으려는 코크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노인 역시 아빠처럼, 알파 시티의 블랙 존에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앞선 여자의 걸음이 빠르지 않았고, 주변을 살펴야 했다. 우리처럼 날치기를 하려는 또 다른 트위치가 있는지 경계해야 했고, 알파 시티 로봇 순찰대나 경찰의 눈길도 피해야 했다. 혹시 몰라서 고개를 들어 경계 드론이 있는지도 힐끗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그 어떤 방해 요소도 보이지 않았다.
-10쪽 「가족의 기원」
인간이 다루는 과학의 한계는 끝이 없었다. 안드로이드의 자기 학습화가 그랬고, 인공 지능의 자기 확장이 그러했다. 인간은 과학을 숭배하면서도 과학을 두려워했다. 원스가 인간에게 꼭 필요한 도구이지만, 원스의 단계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은 그들의 진화를 경계해서다. 최고 5단계 원스는 꽤 높은 지능을 가졌다고 한다. 5단계 원스를 구입하려면 자폐나 조현병 같은 문제가 있을 경우인데,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모양이다. 종종 사회 문제가 되어 포털 뉴스에 등장하곤 하는데 이들을 ‘위험한 구름’이라 부른다. 납치, 테러 등 강력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구름같이 스며들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베이비 셀의 연간 보고서에 의하면, 2~3년 사이 5단계 원스 출시율이 23퍼센트나 급락했다. 하지만 공급이 줄면 수요는 늘어나는 법이다. 희소성에 의한 인간의 욕망은 점점 커졌다. 5단계 원스의 가격은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다.
“……원스가 아니고 라온이에요.”
“원스한테 이름을 주는 것은 불법인데 이름을 주었구나.”
“라온이는 상품이 아니에요. 저와 쌍둥이라니까요!”
“신고 같은 건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런데 라온이가 무슨 뜻인 줄 알고 그 이름을 준 거니?”
“기쁨이요. 책에서 읽었어요.”
“책을 읽었다니 놀랍구나. 요즘은 누구도 책을 읽지 않지. 인간은 신보다 과학을 더 숭배하니까.”
-52~53쪽 「노랑 구름은 뜨고 있다」
“저한테 이걸 왜 보여 주는 거죠?”
무방비 상태로 디는 본인이 태어나던 순간을 마주했다. 아니, 그 순간의 엄마와 아빠를 보고 말았다. 디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감마를 노려보았다. 감마가 고개를 홰홰 저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이곳에 오면 누구에게나 보여 주는 영상입니다. 본인이 탄생하던 순간은 기억해야 하니까요.”
“그걸 왜 꼭 기억해야 하나요?”
디는 매섭게 물었다. 감마는 또 빙시레 웃었다.
“본인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를 다시 한 번 인지시켜 주는 거예요. 아주 큰 사랑을 받으며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요.”
그래도 디는 잔뜩 굳은 얼굴을 풀 수 없었다. 디가 태어나는 순간, 서로를 얼싸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엄마와 아빠는 낯설었다. 태반고에서 깨어나 힘차게 울어 대는 디를 보며 엄마와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이제 디의 차례예요.”
감마가 부드럽게 말을 붙였다.
“디는 왜 지금의 가족을 벗어나려는 건가요?”
열다섯 살 생일 즈음에 가족조직연구원을 방문한다는 건 새로운 가족을 만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디는 새로운 가족을 원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 이유를 차근차근 밝혀야 했다.
-88~89쪽 「가족 계약」
하지만 어서 움직이라는 인간형 로봇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시신을 뒤로한 채 케이지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양손에 거대한 집게가 달린 로봇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을 한 명씩 집게로 집었다. 조이 역시 집게에 집혀서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남아 있던 이올라가 외쳤다.
“꼭 살아서 가족들을 만나라, 조이야.”
“아주머니도 따님 꼭 만나세요.”
있는 힘껏 외치며 작별 인사를 한 조이는 아무것도 없는 통로를 한참 가다가 문 앞에 도달했다. 문이 스르륵 열리자 안에는 유리로 된 방이 보였고, 주변에 무장하지 않은 로봇들이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집게가 달린 로봇은 조이를 데리고 그대로 유리로 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 중앙에 내려놓고는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집게형 로봇이 나가고 문이 닫히면서 조이는 유리로 된 방 안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낯설고 차가운 기계음이 들렸다.
234번 휴먼, 의자에 앉아라!
놀란 조이가 소리가 난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너를 관리할 인공 지능 자르딘이다. 천장 위쪽의 스피커를 통해 너에게 음성을 들려주고 있는 중이다. 의자에 앉아라.
-135쪽 「새로운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