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의 문턱에 다다른 사회 초년생의 'ENFP식 글쓰기'
20대 후반에 생애 첫 책 『젊은 생각, 오래된 지혜를 만나다』로 독자와 만난 후 『연애 결핍 시대의 증언』으로 2022년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나호선이 세 번째 책 『부패하지 않는 사랑의 힘』으로 돌아왔다. 이 책은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디딘 초년생이 '축소'와 '단종'의 압박이 거세진 시대의 긴 터널을 뚜벅뚜벅 헤쳐나오며 겪은 일들을 때론 경쾌하게, 때론 가슴 뭉클하게 풀어놓은 에세이다. 빠른 속도감, 재기발랄한 말솜씨, 더할 나위 없는 솔직함, 진지한 성찰이 어우러진 이 시대 '2030'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낙관주의자는 비행기를 만들고, 비관주의자는 낙하산을 만든다'라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말을 가장 좋아한다”는 작가는 '수포자'였던 중학생 때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수학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깨달은 성인으로 성장했고, 급기야 “내 인생의 불꽃 같던 시기에 대해 쓸 수 있다면 미적분과 삼각함수가 내게 다시 찾아와도 좋다”고 너스레를 떨며 읽고 쓰는 삶을 생의 한 축으로 삼게 되었다.
나아가 정치학을 사랑했고,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던 작가가 “이제는 취직해 매일같이 글밥을 먹는다. 목적 없는 독서는 목적이 뚜렷한 직업적 책 읽기로 변했다.” 작가는 이를 “대가가 후불인 행운”이라고 고백한다. “언젠가 꼭 공적인 일을 하며 자유를 선물하는 데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은 대로 성장한 작가는 최근 “부패하지 않는 사랑”을 다짐하며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극심한 빈곤의 늪에서 온 가족이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거쳐 꿋꿋하게 대학원까지 마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한 후 어엿한 직장을 얻고 결혼까지 했으니 비로소 '어른'의 대열에 합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나이가 차고, 괜찮은 직장을 갖고, 결혼 후 자식이 있어야 반드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어른답지 못한 성인이 얼마나 많은가!
어릴 때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이제는 평범한 삶을 추구하게 된 작가가 들려주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자랑이 아닌 자기반성과 성찰, 비난이 아닌 공감, 분열로 치닫는 사회현상에 대한 정치학 전공자다운 통찰,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낸 청춘의 내공이 묻어나는 참신한 삶의 감각 등으로 읽는 맛을 더해주고, 우리 사회와 청년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혀준다. 빈곤, 가정폭력, 학내 부조리, 군대에서 만난 '형이 필요한 남자들'의 이야기, 사랑과 소통에 서툰 뭇 청년들의 현실, 우정을 빙자한 '가짜 친구들'의 흔한 사례, 직장 구하기든 '내 집(방)' 마련이든 청년들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헤쳐나가기 어려워진 사회에서 어떻게든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절박함, '좋아요'를 누르고 싶게 만드는 진지한 통찰이 어우러진 이 책은 같은 세대는 물론 청소년층과 부모 세대에게까지 잔잔한 감동과 이해, 희망을 선사한다.
◆ 사랑에는 급행열차가 없고, 사랑에 빠지면 철학자가 된다
평소 MBTI를 백안시하던 작가는 짝사랑을 하게 되면서 MBTI의 효용성을 깨닫고 마침내 MBTI 검사를 해보았다고 한다. “몇 번을 반복해도 확신의 ENFP. 재기발랄한 활동가다. 두서없이 산만한 통찰과 가득 뿜어져 나오는 자기애. 이게 바로 ENFP식 글쓰기다. 오늘의 결론. 사랑은 남자를 철학자로 만든다.”
MBTI의 쓸모와 그것이 유행하게 된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MBTI는 이 시대 청춘들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식 중 하나다. 색은 직접 만나면서 칠하더라도 밑그림은 들고 낯선 타인을 대하고 싶은 마음은 보편적이다. 미리 품행을 조절해 불필요한 무례를 줄이고, 좋은 쪽으로 첫인상을 남겨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힌트를 쓰고 싶을 테니까. (35쪽, 「MBTI 사랑학 개론」)
특히 내향인에게는 MBTI가 구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예전에는 소심해서 낯을 가리거나 말을 잘 붙이지 못하면 불친절하다거나 무뚝뚝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요새는 “당신 I군요!”라고 먼저 말해준다. 상대의 고민에 논리적 해법만을 제시하며 냉혈한으로 비난받던 이들에게는 한동안 요즘 세상이 '공감 강점기'처럼 느껴졌을 텐데, 요새는 “당신 T죠?”라고 알아서 이해해주니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해가 부족한 사회는 항상 긴말을 요구하면서, 정작 말이 긴 것은 또 참아주지 않는다. 짧은 설명으로도 충분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물론 MBTI가 자신의 무례를 원래 그렇게 태어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쉽게 정당화하는 부작용도 있다. 그러나 조잡한 유사과학이라 치부하더라도 다양한 인간 군상을 이해하고 표현해줄 새로운 렌즈를 갖게 된 것은 아무튼 좋은 일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시대 청춘이 앓고 있는 강박적인 '겁의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랑이 매번 동시에 양방향으로만 발동한다면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을까. 보통 한쪽이 마음을 들켜야 시작되는 것이 사랑인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욕망은 거절의 두려움과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내 안의 겁 앞에서 멈춰 선다. (35~36쪽, 「MBTI 사랑학 개론」)
짝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에는 급행열차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고 결혼에 성공한 작가는 '깔끔한 이별'을 위해 미리 '럽스타그램' 계정을 따로 만드는 세태에 대해 이렇게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더라도 마감이 깔끔한 이별은 너무나도 잔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사랑은 편집되어 전시되고, 그 전시회는 사랑이 끝나자마자 신속한 철거가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 아닌 사랑의 흔적이 손쉽게 휘발되는 것이겠지만, 그게 그거다. 이별에 상처받지 않는 이는 없다. (76쪽, 「기록말소적 사랑」)
그래서 나는 이별만큼은 더는 효율성이 침투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오래도록 추억을 더듬다가 결국 놓고야 마는 모든 지질한 과정을 느끼는 것은 사랑했던 이들의 의무라고 말하면서, 이 시대 사랑의 휘발성이 더 강해지지 않도록, 간절히 빌었다. 이별마저 더치페이하며 마음 용량을 알뜰히 사용하는 기록말소적인 사랑을 있는 힘껏 미워하면서. 찰나일지라도 충동 그대로의 강렬한 사랑이 이 시대에 남아 있기를. (78쪽, 「기록말소적 사랑」)
한편, 어느새 모태 솔로 소재의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흔해진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는 이런 진단을 내린다. 특히 “나는 이 사회에 사랑 대신 혐오가 판치는 이유를 실제로 사랑하는 이들의 숫자가 줄었기 때문으로 꼽는다”라는 부분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는 신선한 통찰이다.
구애 상대를 대하는 법을 아예 까먹어버린 채 서른 중반을 맞아 처음 사랑을 해보려니, 옷을 갖춰입고 데이트 코스를 정하는 아주 사소하고 기초적인 것부터 막힌다. 대화 소재는 빈곤하고 행동에는 겁이 많아 어설프기 짝이 없다. 20대의 첫 단계와 시행착오를 속성으로 과속해서 따라가다 많은 추돌사고를 낸다. 때를 놓친 미숙함이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되는 상황이 주책처럼 느껴지고, 자존감을 더 빠른 속도로 갉아먹는다. 연애 예능 프로그램의 모태 솔로 특집은 일회성 예능 소재가 아니다. 현실 속 많은 당사자의 현주소다. 나는 이 사회에 사랑 대신 혐오가 판치는 이유를 실제로 사랑하는 이들의 숫자가 줄었기 때문으로 꼽는다. (240쪽, 「두 번째 사춘기 II」)
◆ 어른이 된다는 것, 성숙해진다는 것
대다수가 그렇듯 나호선 작가도 어렸을 때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평온한 저녁을 가질 수 있다면 낮에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돋보이고 싶은 욕구보다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안도감에 감사하다”라고 말하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런 자신을 두고 “언제 잃어버려도 좋을 편의점 검정 우산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작가는 “주인을 잃고 어느 가게에서 섞여 다른 사람의 착각이나 도벽에 손을 타고 타다 결국 모두의 공유재가 되어버린 무채색 우산의 운명. 그 우산을 싸구려 절도의 피해라 말하지 말지어다. 어떻게 보면 그 우산을 거친 모두에게 쓸모 있는 존재였으니까. 어찌 됐건 내가 쓸모 있었다면 그만이다”라고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남김없이 자신을 실망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는 실망할 거리가 남아 있지 않아 '네가 그럼 그렇지' 한마디로도 모든 실책을 스스로 용서할 수 있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내게 준 시름을 배달음식에 맥주 한 캔으로 손쉽게 달랠 수 있는 저렴해진 고통의 가격. 쉽게 상처받지 않고 쉽게 위로받을 수 있도록 기대를 줄이고 맷집을 기르는 과정이 바로 성숙이다. (153쪽, 「나는 매운 잠을 좋아한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애송이'의 실수를 통해 더 발전해나가려는 듬직한 의지를 전해주기도 한다. 냉철한 자기반성과 낙관적인 자세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이뤄온 작가의 오늘을 응원하고, 더욱 단단해질 내일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나는 성인이 된 10년 정도를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놓고도 사람을 대하는 내 접근법은 진보적이지 못했다. 선언이 사실을 규정하지는 못한다. 선언은 선언일 뿐, 진보적으로 살아와야 진보적인 것이다. 책으로만, 기사로만, 칼럼으로만 세상을 읽는 사람은 쉽사리 언제나 자신은 평가하고 평론할 위치에 있을 것이라는 어떤 오만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188쪽, 「형이 필요한 남자들 I」)
무엇보다 실수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지금 당장을 기준으로 예단하지 않고, 실수를 부끄러움의 흉터로 삼도록 허용해줘야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루 단판으로 끝나는 시험이 아닌, 기간을 길게 잡고 가는 논문이 갖는 장점은 수정할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실수를 빌미로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닌, 실수를 고쳐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학술이 가진 매력이다. 내 논문이 하늘을 날아본 덕에 '애송이의 윤리'를 알게 되었다. 사람은 틀리지 않으면 결코 발전할 수 없다. (206쪽, 「내 논문이 하늘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