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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고려 왕조사

제왕의 나라 고려 역사 읽기


  • ISBN-13
    979-11-6684-391-4 (93910)
  • 출판사 / 임프린트
    세창출판사 / 세창출판사
  • 정가
    44,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5-06-13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한정수
  • 번역
    -
  • 메인주제어
    역사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역사
  • 도서유형
    종이책, 양장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53 * 225 mm, 956 Page

책소개

고려 건국부터 왕조 멸망과 조선에서의 고려 역사 세우기에 이르기까지를 정리한 이 책은 각 군주의 즉위 과정과 왕실 구성 및 공신, 정치와 업적, 죽음과 시대 과제라는 틀로 고려 왕조사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고려는 천명과 제불, 천지산천의 신기, 풍수지리와 도참 등에 가탁하여 왕실 신성화와 왕업의 중흥 및 연장을 도모했다. 그리고 왕실을 용손 혈통의 황가로 신성화했으며 팔관회를 열어 왕실이 천령과 제불신기의 가호를 받고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했다. 그러면서도 유교 정치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신성한 성인 군주인 제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인식은 이를 토대로 점차 강화되었다. 그 결과 고려는 건국과 삼한 일통을 이룬 태조를 기점으로 문종 대에 고려 중심의 해동천하 인식과 문명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고려는 쇠퇴했지만 삼한 일통과 해동천하 등은 고려를 상징하는 문명 및 자존의식의 토대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고려 왕조는 무신정변, 여몽 전쟁, 원 간섭기 부마제후국 단계를 거치면서도 475년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선왕 정치 모델로의 지나친 개혁과 회귀 시도는 독이 되기도 했다. 궁예가 암군으로 쫓겨나고 태조가 추대로 즉위했듯이, 공양왕 역시 혼암한 군주라는 명분으로 축출되었다. 이성계 등은 이미 수명을 다한 고려 왕실의 혈통을 발본색원 단절함으로써 강제로 그 명분을 세웠다. 제왕의 나라 고려는 이로써 마무리되었다.

목차

_차례

 

머리말

 

제1장 천수(天授) 혁명 왕건과 고려

 

1. 분열 속 새로운 시대로의 여명

1) 후삼국의 정립과 관계

2) 새로운 후삼국 정립과 시대 과제

3) 신성한 왕건 가문 만들기

4) 풍수도참과 왕건, 그리고 불교

 

2. 삼한 일통 전쟁과 「훈요십조」

1) 천명 수수와 삼한 일통 전쟁

2) 전쟁 후 사회통합 노력과 질서 재편

3) 왕조 안정책의 시행

4) 삼한 일통의 의미와 시대 과제로서의 「훈요십조」

 

제2장 5백 년 왕조의 토대 만들기

 

1. 혜종, 정종과 왕자의 난

1) 혜종의 즉위와 고명대신

2) 흔들리는 왕권과 왕규

3) 정종과 왕식렴

4) 시대 과제

 

2. 광종의 못 이룬 꿈과 대성(大成)

1) 광종의 즉위와 꿈

2) 왕권 강화의 앞면: 1기

3) 개혁과 의문: 2기

4) 개혁의 뒷면과 시대 과제: 3기

 

3. 경종의 내선(內禪)과 성종의 지치(至治)

1) 경종의 즉위와 개령군 왕치

2) 성종의 즉위와 최승로

3) 중흥군주의 정치와 거란과의 전쟁

4) 성종의 죽음과 시대 과제

 

4. 목종과 흔들리는 왕실

1) 목종의 혈통과 즉위

2) 목종의 정치와 대거란 문제

3) 천추태후와 대량원군

4) 목종의 죽음과 시대 과제

 

제3장 위기 극복과 해동천하

 

1. 수난의 용손 현종 즉위와 새로운 고려 왕실

1) 현종의 용비와 왕실

2) 신성한 왕실 새로 세우기

3) 위기의 연속과 태평 시대

4) 현종의 죽음과 시대 과제

 

2. 형제 계승이 만든 해동천하와 문종의 정치

1) 덕종의 즉위와 아쉬운 응천(應天)

2) 정종의 즉위와 '선계선술(善繼善述)'의 정치

3) 촉유(燭幽) 문종의 즉위와 정치 방향

4) 성수만세(聖壽萬歲)로 이룬 소중화(小中華)

5) 문종의 죽음과 시대 과제

 

3. 순종, 선종, 헌종, 숙종의 왕위계승과 정치

1) 36년간의 후계자 교육 대 4개월의 재위 기간, 순종

2) 왕실의 위기와 계천(繼天), 선종

3) 강성한 종실과 유약한 군주, 헌종

4) 숙종의 즉위와 10년간의 천하 운영

5) 23년의 세월이 남긴 시대 과제

 

제4장 12세기 대전환 속 고려의 선택

 

1. 덕치와 모화(慕華)로 이룬 예종의 문물

1) 예종의 즉위와 왕실

2) 예종의 정치와 여진 정벌

3) 예종의 죽음과 시대 과제

 

2. 국제질서의 대전환과 인종

1) 인종의 즉위와 왕실

2) 금과의 통교와 남송과의 외교

3) 왕실을 흔든 조선국공 지군국사 이자겸

4) 인종의 개혁 정치와 묘청의 서경 천도, 칭제건원

5) 인종의 죽음과 시대 과제

 

제5장 제왕과 무신정권

 

1. 의종과 총행 세력의 태평호문

1) 의종의 즉위와 왕실

2) 의심왕 의종

3) 지나친 사불사신(事佛事神)

4) 간유폐첩(姦諛嬖妾)

5) 의종의 정치와 죽음, 그리고 시대 과제

 

2. 명종의 왕권과 무신 시대 개막

1) 명종의 즉위와 왕실

2) 유응규와 명종 책봉

3) 무신정권이라는 괴물의 탄생

4) 명종의 정치와 시대 과제

 

3. 고려 왕실과 최씨 무신정권: 신종, 희종, 강종, 고종

1) 네 군주의 즉위와 왕실 구성

2) 최씨 무신정권

3) 여몽 전쟁과 강도(江都) 시대

4) 네 명의 군주와 시대 과제

 

4. 무신정권의 종식과 왕권 회복: 원종

1) 원종의 즉위와 왕실

2) 무신정권과 출륙환도

3) 삼별초의 항전과 의미

4) 원종의 죽음과 시대 과제

 

제6장 고려와 원 그리고 부마고려국왕

 

1. 원과의 관계 정립과 충렬왕의 정치

1) 충렬왕의 즉위와 왕실

2) 원과의 관계 설정: 황제를 이용하라

3) 풍속과 제도의 변화

4) 충렬왕의 죽음과 정국 운영이 남긴 시대 과제

 

2. 두 얼굴의 개혁 군주 충선왕

1) 충선왕의 두 번 즉위와 왕실

2) 개혁인가 권력 지키기인가, 변질된 개혁

3) 충선왕의 죽음과 과제

 

3. 부자상이(父子相夷) 탕욕(湯浴) 군주 충숙왕

1) 충숙왕의 즉위와 왕실

2) 음울한 충숙왕의 정치

3) 심왕 옹립 운동

4) 입성책동론과 그 저지 운동

5) 충숙왕의 죽음과 과제

 

4.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 악양망고지난(岳陽亡故之難) 충혜왕

1) 충혜왕의 즉위와 왕실

2) 탐음무도 충혜왕의 폐행정치

3) 충혜왕의 죽음과 시대 과제

 

5. 유충(幼沖) 군주와 왕실의 위기: 충목왕과 충정왕

1) 충목왕의 혈통과 즉위

2) 4년간의 치세와 12살의 죽음

3) 충정왕의 즉위와 3년 재위 그리고 강화로의 축출

4) 충정왕의 죽음과 강릉대군의 숙제

 

제7장 왕조의 가을과 역성혁명

 

1. 원명교체기 속 공민왕 대 개혁 정치의 명암

1) 공민왕의 즉위와 왕실

2) 여전한 폐행과 환관의 세상

3) 개혁 추진과 분기점들

4) 1기 개혁과 한계

5) 2기 개혁과 한계

6) 3기 개혁과 한계

7) 명에 대한 사대와 불편한 관계

8) 공민왕의 죽음과 과제

 

2. 우왕, 창왕의 실정과 혁명의 단초

1) 우왕의 즉위와 왕실

2) 명덕태후와 경복흥, 이인임

3) 명 사신 채빈 살해 사건과 그 후폭풍

4) 철령위 설치와 요동 정벌

5) 위화도 회군과 창왕 즉위

6) 우왕, 창왕의 죽음과 시대 과제

 

3. 공양왕의 즉위와 역성혁명

1) 탐주로 즉위한 공양왕과 왕실

2) 새로운 권력의 탄생과 집권 세력 간 갈등

3) 공양왕과 정몽주의 군신연대

4) 정몽주 제거와 더 결속된 이성계 세력

5) 공양왕의 마지막 한 수, 군신동맹

6) 혁신의 시대 속 공양왕

7) 이성계의 사직론과 명분 쌓기

8) 공양왕의 시대착오와 폐위 명분

9) 공양왕의 폐위와 천인감응적 역성혁명의 논리

10) 명에서의 이성계 세력 방조와 '자주자요(自做自要)', '성교자유(聲敎自由)'

11) 공양왕의 죽음과 고려 왕실 세력 발본색원

12) 건국의 합리화와 고려 왕씨 자손 보존론

 

부록 1: 고려 제왕 일람표

부록 2: 고려 제왕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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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찾아보기

본문인용

왕건의 탄생을 보자. 그는 그간 선대로부터 풍수지리와 도참으로 예지된 삼건의 성자 즉 성스러운 아이였다. 그가 태어나게 된 송악산 남쪽 자락의 터전은 용녀가 데리고 온 신성한 돼지가 누운 곳, 백두산의 기운이 내려와 모인 마두명당, 제왕이 태어날 종제지전이자 36구의 집을 만들어 비보하는 천부의 명허 즉 명당이었다. (…) 또 자라서는 제왕의 골상을 갖추었는데, ‘용과 같은 얼굴에 이마 한가운데 뼈가 도드라졌고 턱은 네모나고 넓었다’라 했다. (…) 이들 내용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정사의 기록이나 설화가 있고, 이를 위한 재생산의 장치들이 있으므로 신성화의 기제가 된다. (42쪽)

 

태조는 이처럼 고려 왕조가 명심해야 할 왕조의 과제이자 경계로 삼아야 할 바를 「훈요」로 정리해 박술희에게 내렸다. 그리고 943년(태조 26) 5월 정유일(20)에 재신 염상·왕규·박수문 등의 부축을 받으면서 앉아 한 문제가 남긴 ‘천하의 온갖 사물이 태어나 죽지 않는 것이 있지 않으니, 죽음이란 천지의 이치이며 사물의 자연스러움이므로 어찌 크게 슬퍼하랴?’라는 말을 언급하며 죽음을 준비했다. (…) 신하들은 백성의 부모인 태조가 죽음을 맞이하려 하자 이를 애통해하였다. 태조는 마지막으로 “뜬구름 같은 인생 예로부터 그러하다”라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67세의 나이였다. (85-86쪽)

 

태조 대는 태조 즉위공신 및 삼한공신 등과 함께 호족 세력, 그리고 왕실 외척 세력이 자리를 잡았고, 유교 정치를 꿈꾼 이들은 보조 역할을 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혜종과 정종, 광종, 경종 대를 거치면서 강성했던 공신이나 호족 세력은 숙청을 통해 정리되었다. 반면 유교 정치 세력은 왕권을 뒷받침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하는 한편 광종 대 과거제를 통해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과거급제자들과 맥을 같이하였다. (…) 성종은 이들을 조화시켜 가면 되었다. 전 시대 난세의 어려움이 이제 성종 대에 들어와서는 태평함을 만나는 토대가 된 것이다. (162쪽)

 

1인 지배구조인 왕조 사회에서 왕권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영구적 절대 권력은 아니었다. (…) 이 때문에 신성한 혈통 혹은 그를 이은 정통의 계승이라는 점으로 신성함을 상징화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를 토대로 직계를 중심으로 신성한 왕실을 구축하여 신성한 왕권을 만드는 방식이 추구되기도 했다. 수난을 받은 신성한 혈통의 용손과 그의 용비 즉 즉위의 서사는 이 점에서 더욱 극적인 효과가 있었다. 이에 기반을 두면서 현종은 자신과 왕실의 신성성을 만들고 확산시키려 노력했다. (219쪽)

 

문종의 시대는 이렇게 마무리되어 갔다. 불교 및 도교, 유교 의례와 정치를 통해 공덕과 인덕을 쌓는 방식이 정해졌고, 송 출신 의원의 자문을 받으면서 의료 시스템도 어느 정도 갖춰졌다. 군주의 건강과 축수를 위한 조치가 마련된 것이다. 문물과 전시과 및 녹봉 제도, 관직 및 관청 등도 정비되면서 고려는 당시 가장 선진 문물로 자타가 인정한 송에 견줄 문물 제도를 갖췄다. 군자국이나 소중화의 칭호가 이를 말해 주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생긴 자신감과 문물 정비 등을 통해 생긴 자존의식은 문명의식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에 거란과 송으로부터는 존중을 받았다. 동·서여진, 일본, 탐라 등의 귀부 및 내조를 받으면서는 고려 중심의 천하의식을 형성했다. 해동천자가 다스리는 태평천하 즉 해동천하의 인식이 그것이었다. (303-304쪽)

 

크게 두 차례에 걸친 여진 정벌은 동여진 완안부 태사 오아속이 중심이 된 여진에 의해 좌절되었고, 여진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힘을 키웠다. (…) 그러나 예종은 이미 성취한 결과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나아가 송나라와 더욱 밀착하면서 그 문물을 그대로 흡수하고 고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천장각을 두고 청연각과 보문각을 설치한 뒤 학사들과의 강론을 행하여 고려의 문물이 송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상징화했다. 이를 토대로 예종은 고려 왕조가 제불이 호위하는 나라, 원시천존이 가호하는 나라, 명산대천의 신령이 보호하는 나라, 천령이 지켜 주는 나라임을 자신했다. (381-382쪽)

 

정국 운영과 관련해 인종의 선택은 중요했다. 이 상황에서 인종은 일방 주도의 정치보다는 경쟁과 비판, 소통과 통합이라는 운영 방식을 택하였다. 결정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조심하고 삼간다는 ‘소심(小心)’ 즉 신중을 다하겠다는 의지였다. 인종의 정치 자세는 묘청 등이 강력하게 추진한 서경 천도나 칭제건원, 금국정벌론 등을 제어하는 기제가 되었다. 또 반대로 지나치게 기존 체제를 지키거나 금국사대론에 경도된 정국 운영론자들에게는 자극제 역할이 되었다. (424-425쪽)

 

최씨 무신정권은 60년간 중방·교정도감·진강부·진양부·도방·정방·서방·삼별초·마별초 등의 지배 기구를 통해 고려 사회를 통제했다. 이들 기구에 최씨 정권이 임명한 무신과 문신, 군사들이 소속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군주에게보다는 최씨 집정자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집정의 수족 역할을 한 것이다. (…) 군주와 문신 등도 나름의 역할을 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최씨 무신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예컨대 신종을 옹립하면서 명종을 죽이거나 하지 않았다. 최충헌을 죽이려는 것을 묵인한 희종이었지만 유배했을 뿐 죽이지 않았다. 명종의 태자였다가 폐위되었던 강종을 다시 왕위에 앉혔으며, 그 아들 고종이 왕위를 잇도록 했다. 이를 보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과시했으나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567쪽)

 

충렬왕의 잦은 입조와 긴 체류 기간 등은 여러모로 고려에 큰 부담이 되었다. 물론 입조는 (…) 부마제후인 고려 국왕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보여 주는 측면이 있었다. (…) 그렇더라도 충렬왕의 잦은 입조와 긴 체류, 이에 따른 고려 관원의 수행이나 원 황실 케식 숙위 참여 등은 친원 혹은 부원이라는 측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려인으로서 몽골인화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고려인으로서 몽골식 이름을 받는 등 이는 고려인의 정체성 문제에 이르기도 했다. (612쪽)

 

충혜왕은 실정을 넘어선 탐욕과 음탕, 사치, 겁탈, 겁략, 과렴, 인사 파동, 과소비 등으로 재위 기간 내내 위태로웠다. (…) 이러한 상황은 당시 널리 알려졌다는 다음의 노래 가사에 고스란히 담기게 되었다. “아야마고지나, 종금거하시래?(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잘 몰랐으나 누군가가 이를 해석하자 비로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악양에서 죽을 위기를 만났으니, 오늘 가면 언제 돌아오리요?[岳陽亡故之難, 今日去何時還]” (705-706쪽)

 

공민왕 세가를 집필한 사신은 공민왕의 성품과 행실 그리고 정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왕은 즉위 이전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민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 이후에도 온갖 힘을 다해 정치를 도모했다. 중외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였다. 노국공주가 훙서하고 나서 슬픔이 지나쳐 뜻을 잃어버렸다. (…) 또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여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몰래 폐신으로 하여금 후궁을 욕보이고, 임신하게 되면 그를 죽여 입을 막아 버리곤 했다.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788쪽)

 

이성계는 잡혀 온 최영에게 이 사태는 원성이 하늘에 이르러 부득이한 것이라 하면서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好去好去]”라 했다. 곧바로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시 지장사에서의 회의를 거쳐 요동 정벌군에 저항했던 이들을 선별하기 시작했고 처벌 결정을 내렸다. (…) 73세의 최영은 죽음을 맞았다. 다만 이때 그의 죽음에 대해 개경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철시(輟市)하고 많은 백성이 눈물을 흘렸으며, 시신이 길가에 버려지자 길 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다 했다. 그만큼 최영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경의의 마음이 깊었음을 읽을 수 있다. (821쪽)

 

이성계 자신은 부덕하다 자처하고 있었다. 천명이 이성계에게 있음을 상징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오랜 가뭄이 즉위 이튿날 큰비로 해소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성계와 조선 건국 세력은 이를 통해 천명과 민심이 이성계에게 있음을 내세우고 기록으로 남겼다. 유덕자에 의한 역성혁명의 논리를 갖춘 셈이었다. 즉, 하늘이 가뭄과 성변, 서리 등으로 군주에게 경고를 내렸지만 공양왕이 책기수덕을 행하지 않아 재이를 내림을 넘어 천명을 고려 왕실로부터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천명을 부덕을 자처한 유덕자에게 옮겨 하늘의 뜻과 민심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었다는 천인감응론적 역성혁명의 논리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869쪽)

 

1413년(태종 13) 태종은 예조에 명하여 전 왕조의 자손에 대한 대우 사례를 찾도록 했다. 예조에서는 중국 역대 사례에서 대체로 자손을 보존토록 하였고 베어 없앤 것은 오호(五胡)와 후진 등 오대에 불과하다 했다. 이에 태종은 전조 후손의 보존을 명하고는 “이씨가 도(道)가 있다면 비록 백 명의 왕씨가 있더라도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라 하면서 입장을 정하였다. (…) 고려 왕조는 이렇게 공양왕과 왕씨들의 절멸이라는 파란을 겪은 뒤 그야말로 극소수의 후손들과 함께 제사 의례와 역사 기록 속에서만 명맥을 유지하며 역사라는 시간 속에 머무르게 된다. (878쪽)

서평

태조 왕건은 어떻게 왕위에 올라 삼한을 일통할 수 있었을까?

그가 운영한 고려는 어떤 왕조였을까?

그는 어떠한 천하를 세우려 했고 어떤 족적을 남겼을까?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할까?

 

다채로운 시각으로 진입하는 새로운 고려 왕조사!

34명 고려 제왕의 치적과 5백 년 왕조의 흥망을 읽는다

 

『새 고려 왕조사: 제왕의 나라 고려 역사 읽기』는 고려를 ‘제왕의 나라’로 조망하는 본격 왕조사이다. 삼한 일통의 위대한 왕 즉 신성 대왕이 통치한 나라, 제불신기의 가호를 받는 신성 군주가 다스린 왕조, 천명을 받은 성인 군주가 아우른 국가, 동국과 해동천하를 구축하고 태평의 시대를 연 나라, 때로는 황제로 호칭되면서도 국왕 책봉을 받은 국가 등의 다채로운 시각을 ‘제왕의 나라’로 함축하였다.

 

이 책은 고려 왕조에 대한 다양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태조 왕건은 어떻게 후삼국의 전란을 수습하고 삼한을 일통할 수 있었는가? 고려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고려의 제왕들은 누구였고 무엇을 이루었으며 어떻게 무너졌는가? 저자 한정수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918년 태조 왕건의 즉위에서 시작해 1392년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개국에 이르기까지 34명 고려 제왕의 475년에 걸친 흥망성쇠를 깊이 있게 서술하였다.

 

역사의 기록, 그 행간에서 되살아나는

고려 왕조의 생생한 얼굴

 

918년 시작된 고려는 1392년 이성계의 즉위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어 1394년에 일어난 공양왕과 왕씨 일족 제거는 어떠한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역사의 비극이었다. 475년 이어진 용손 혈통을 다시 부흥시키려 한다는 의혹을 빌미로 발본색원 차원의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후일 조선 왕조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해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고 조선 건국의 명분을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조선판 고려 역사 세우기로 인해 고려의 역사는 조선의 관점에서 각색되었고, 그로 인해 고려사에는 왜곡과 단절이 남았다.

 

그럼에도 정사, 문집, 금석문, 각종 문서, 불경 등에 고려의 역사 유산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행간에도 보인다. 이를 통해 신성한 용손 혈통의식에 따른 왕위계승, 제불신기의 가호와 그에 대한 보은, 사회통합을 위한 팔관회 개최와 보살계 수계, 장경도량 등 호국 불교 도량 설행, 유불도 문명의식과 선랑 등에 기초한 해동천하 건설, 고려 왕조의 자주성 유지를 위한 외교적 노력, 왕조 중흥을 위한 다양한 개혁 정책의 추진 등 고려의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왕조의 흥망과 문명의 깊이를 다시 사유하게 할

새로운 고려 왕조사

 

이 책은 각 군주의 즉위 과정과 왕실 구성 및 공신, 정치와 업적, 죽음과 시대 과제라는 틀로 고려 왕조사를 재구성하였다. 제1장 천수(天授) 혁명 왕건과 고려, 제2장 5백 년 왕조의 토대 만들기(혜종~목종), 제3장 위기 극복과 해동천하(현종~숙종), 제4장 12세기 대전환 속 고려의 선택(예종~인종), 제5장 제왕과 무신정권(의종~원종), 제6장 고려와 원 그리고 부마고려국왕(충렬왕~충정왕), 제7장 왕조의 가을과 역성혁명(공민왕~공양왕)으로 나눠 고려 건국부터 왕조 멸망과 조선에서의 고려 역사 세우기에 이르기까지를 정리했다. 책의 말미에는 고려 제왕 일람표와 고려 제왕 세계도를 부록으로 실어 고려사 전체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려는 천명과 제불, 천지산천의 신기, 풍수지리와 도참 등에 가탁하여 왕실 신성화와 왕업의 중흥 및 연장을 도모했다. 수많은 사찰을 세우고 제불 도량을 열었으며, 천지산천의 신기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천명에 의지하는 덕치, 풍수에 의한 정도 및 천도론 등을 추구했다. 왕실은 용손 혈통의 황가로 신성화했으며 팔관회를 열어 왕실이 천령과 제불신기의 가호를 받고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했다. 그러면서도 유교 정치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신성한 성인 군주인 제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인식은 이를 토대로 점차 강화되었다. 그 결과 고려는 문종 대에 고려 중심의 해동천하 인식과 문명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고려는 쇠퇴했다. 그렇지만 삼한 일통과 해동천하 등은 고려를 상징하는 문명 및 자존의식의 토대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고려 왕조는 무신정변, 여몽 전쟁, 원 간섭기 부마제후국 단계를 거치면서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선왕 정치 모델로의 지나친 개혁과 회귀 시도는 독이 되기도 했다. 궁예가 암군으로 쫓겨나고 태조 왕건이 추대로 즉위했듯이, 공양왕 역시 혼암한 군주라는 명분으로 축출되었다. 이성계 등은 이미 수명을 다한 고려 왕실의 혈통을 발본색원 단절함으로써 강제로 그 명분을 세웠다. 제왕의 나라 고려는 이로써 마무리되었다. 고려는 살아남기에도 급급해진 나라가 되었고, 그마저도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천명은 다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또한 역사의 일부일 따름이었다.

저자소개

저자 : 한정수
한정수(韓政洙)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고려 시대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전북대학교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 『한국사 속 재해와 리더십』 등이, 공저로 『왕으로 읽는 기막힌 한국사 43』, 『고려시대사 2: 사회와 문화』,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고려 편』, 『고려의 국가의식과 동아시아』, 『21세기에 다시 보는 고려시대의 역사』 등이 있다. 이 외 논문으로는 「고려 초 齋祭·醮·八關會의 분석과 그 정치종교적 의미: 道敎 수용 양상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고려 현종 대 '신성한 날'의 재편과 왕권」, 「고려시대 구정(毬庭)의 풍수적 상징과 정치·의례적 기능」, 「高麗 太祖代 八關會 설행과 그 의미」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고려 시대 정치와 의례, 문화 등을 분석하고 그 상징성을 찾아내고 있으며, 이를 통한 중세 왕조의 성격 규명 등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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