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탄생을 보자. 그는 그간 선대로부터 풍수지리와 도참으로 예지된 삼건의 성자 즉 성스러운 아이였다. 그가 태어나게 된 송악산 남쪽 자락의 터전은 용녀가 데리고 온 신성한 돼지가 누운 곳, 백두산의 기운이 내려와 모인 마두명당, 제왕이 태어날 종제지전이자 36구의 집을 만들어 비보하는 천부의 명허 즉 명당이었다. (…) 또 자라서는 제왕의 골상을 갖추었는데, ‘용과 같은 얼굴에 이마 한가운데 뼈가 도드라졌고 턱은 네모나고 넓었다’라 했다. (…) 이들 내용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정사의 기록이나 설화가 있고, 이를 위한 재생산의 장치들이 있으므로 신성화의 기제가 된다. (42쪽)
태조는 이처럼 고려 왕조가 명심해야 할 왕조의 과제이자 경계로 삼아야 할 바를 「훈요」로 정리해 박술희에게 내렸다. 그리고 943년(태조 26) 5월 정유일(20)에 재신 염상·왕규·박수문 등의 부축을 받으면서 앉아 한 문제가 남긴 ‘천하의 온갖 사물이 태어나 죽지 않는 것이 있지 않으니, 죽음이란 천지의 이치이며 사물의 자연스러움이므로 어찌 크게 슬퍼하랴?’라는 말을 언급하며 죽음을 준비했다. (…) 신하들은 백성의 부모인 태조가 죽음을 맞이하려 하자 이를 애통해하였다. 태조는 마지막으로 “뜬구름 같은 인생 예로부터 그러하다”라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67세의 나이였다. (85-86쪽)
태조 대는 태조 즉위공신 및 삼한공신 등과 함께 호족 세력, 그리고 왕실 외척 세력이 자리를 잡았고, 유교 정치를 꿈꾼 이들은 보조 역할을 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혜종과 정종, 광종, 경종 대를 거치면서 강성했던 공신이나 호족 세력은 숙청을 통해 정리되었다. 반면 유교 정치 세력은 왕권을 뒷받침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하는 한편 광종 대 과거제를 통해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과거급제자들과 맥을 같이하였다. (…) 성종은 이들을 조화시켜 가면 되었다. 전 시대 난세의 어려움이 이제 성종 대에 들어와서는 태평함을 만나는 토대가 된 것이다. (162쪽)
1인 지배구조인 왕조 사회에서 왕권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영구적 절대 권력은 아니었다. (…) 이 때문에 신성한 혈통 혹은 그를 이은 정통의 계승이라는 점으로 신성함을 상징화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를 토대로 직계를 중심으로 신성한 왕실을 구축하여 신성한 왕권을 만드는 방식이 추구되기도 했다. 수난을 받은 신성한 혈통의 용손과 그의 용비 즉 즉위의 서사는 이 점에서 더욱 극적인 효과가 있었다. 이에 기반을 두면서 현종은 자신과 왕실의 신성성을 만들고 확산시키려 노력했다. (219쪽)
문종의 시대는 이렇게 마무리되어 갔다. 불교 및 도교, 유교 의례와 정치를 통해 공덕과 인덕을 쌓는 방식이 정해졌고, 송 출신 의원의 자문을 받으면서 의료 시스템도 어느 정도 갖춰졌다. 군주의 건강과 축수를 위한 조치가 마련된 것이다. 문물과 전시과 및 녹봉 제도, 관직 및 관청 등도 정비되면서 고려는 당시 가장 선진 문물로 자타가 인정한 송에 견줄 문물 제도를 갖췄다. 군자국이나 소중화의 칭호가 이를 말해 주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생긴 자신감과 문물 정비 등을 통해 생긴 자존의식은 문명의식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에 거란과 송으로부터는 존중을 받았다. 동·서여진, 일본, 탐라 등의 귀부 및 내조를 받으면서는 고려 중심의 천하의식을 형성했다. 해동천자가 다스리는 태평천하 즉 해동천하의 인식이 그것이었다. (303-304쪽)
크게 두 차례에 걸친 여진 정벌은 동여진 완안부 태사 오아속이 중심이 된 여진에 의해 좌절되었고, 여진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힘을 키웠다. (…) 그러나 예종은 이미 성취한 결과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나아가 송나라와 더욱 밀착하면서 그 문물을 그대로 흡수하고 고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천장각을 두고 청연각과 보문각을 설치한 뒤 학사들과의 강론을 행하여 고려의 문물이 송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상징화했다. 이를 토대로 예종은 고려 왕조가 제불이 호위하는 나라, 원시천존이 가호하는 나라, 명산대천의 신령이 보호하는 나라, 천령이 지켜 주는 나라임을 자신했다. (381-382쪽)
정국 운영과 관련해 인종의 선택은 중요했다. 이 상황에서 인종은 일방 주도의 정치보다는 경쟁과 비판, 소통과 통합이라는 운영 방식을 택하였다. 결정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조심하고 삼간다는 ‘소심(小心)’ 즉 신중을 다하겠다는 의지였다. 인종의 정치 자세는 묘청 등이 강력하게 추진한 서경 천도나 칭제건원, 금국정벌론 등을 제어하는 기제가 되었다. 또 반대로 지나치게 기존 체제를 지키거나 금국사대론에 경도된 정국 운영론자들에게는 자극제 역할이 되었다. (424-425쪽)
최씨 무신정권은 60년간 중방·교정도감·진강부·진양부·도방·정방·서방·삼별초·마별초 등의 지배 기구를 통해 고려 사회를 통제했다. 이들 기구에 최씨 정권이 임명한 무신과 문신, 군사들이 소속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군주에게보다는 최씨 집정자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집정의 수족 역할을 한 것이다. (…) 군주와 문신 등도 나름의 역할을 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최씨 무신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예컨대 신종을 옹립하면서 명종을 죽이거나 하지 않았다. 최충헌을 죽이려는 것을 묵인한 희종이었지만 유배했을 뿐 죽이지 않았다. 명종의 태자였다가 폐위되었던 강종을 다시 왕위에 앉혔으며, 그 아들 고종이 왕위를 잇도록 했다. 이를 보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과시했으나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567쪽)
충렬왕의 잦은 입조와 긴 체류 기간 등은 여러모로 고려에 큰 부담이 되었다. 물론 입조는 (…) 부마제후인 고려 국왕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보여 주는 측면이 있었다. (…) 그렇더라도 충렬왕의 잦은 입조와 긴 체류, 이에 따른 고려 관원의 수행이나 원 황실 케식 숙위 참여 등은 친원 혹은 부원이라는 측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려인으로서 몽골인화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고려인으로서 몽골식 이름을 받는 등 이는 고려인의 정체성 문제에 이르기도 했다. (612쪽)
충혜왕은 실정을 넘어선 탐욕과 음탕, 사치, 겁탈, 겁략, 과렴, 인사 파동, 과소비 등으로 재위 기간 내내 위태로웠다. (…) 이러한 상황은 당시 널리 알려졌다는 다음의 노래 가사에 고스란히 담기게 되었다. “아야마고지나, 종금거하시래?(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잘 몰랐으나 누군가가 이를 해석하자 비로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악양에서 죽을 위기를 만났으니, 오늘 가면 언제 돌아오리요?[岳陽亡故之難, 今日去何時還]” (705-706쪽)
공민왕 세가를 집필한 사신은 공민왕의 성품과 행실 그리고 정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왕은 즉위 이전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민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 이후에도 온갖 힘을 다해 정치를 도모했다. 중외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였다. 노국공주가 훙서하고 나서 슬픔이 지나쳐 뜻을 잃어버렸다. (…) 또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여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몰래 폐신으로 하여금 후궁을 욕보이고, 임신하게 되면 그를 죽여 입을 막아 버리곤 했다.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788쪽)
이성계는 잡혀 온 최영에게 이 사태는 원성이 하늘에 이르러 부득이한 것이라 하면서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好去好去]”라 했다. 곧바로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시 지장사에서의 회의를 거쳐 요동 정벌군에 저항했던 이들을 선별하기 시작했고 처벌 결정을 내렸다. (…) 73세의 최영은 죽음을 맞았다. 다만 이때 그의 죽음에 대해 개경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철시(輟市)하고 많은 백성이 눈물을 흘렸으며, 시신이 길가에 버려지자 길 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다 했다. 그만큼 최영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경의의 마음이 깊었음을 읽을 수 있다. (821쪽)
이성계 자신은 부덕하다 자처하고 있었다. 천명이 이성계에게 있음을 상징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오랜 가뭄이 즉위 이튿날 큰비로 해소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성계와 조선 건국 세력은 이를 통해 천명과 민심이 이성계에게 있음을 내세우고 기록으로 남겼다. 유덕자에 의한 역성혁명의 논리를 갖춘 셈이었다. 즉, 하늘이 가뭄과 성변, 서리 등으로 군주에게 경고를 내렸지만 공양왕이 책기수덕을 행하지 않아 재이를 내림을 넘어 천명을 고려 왕실로부터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천명을 부덕을 자처한 유덕자에게 옮겨 하늘의 뜻과 민심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었다는 천인감응론적 역성혁명의 논리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869쪽)
1413년(태종 13) 태종은 예조에 명하여 전 왕조의 자손에 대한 대우 사례를 찾도록 했다. 예조에서는 중국 역대 사례에서 대체로 자손을 보존토록 하였고 베어 없앤 것은 오호(五胡)와 후진 등 오대에 불과하다 했다. 이에 태종은 전조 후손의 보존을 명하고는 “이씨가 도(道)가 있다면 비록 백 명의 왕씨가 있더라도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라 하면서 입장을 정하였다. (…) 고려 왕조는 이렇게 공양왕과 왕씨들의 절멸이라는 파란을 겪은 뒤 그야말로 극소수의 후손들과 함께 제사 의례와 역사 기록 속에서만 명맥을 유지하며 역사라는 시간 속에 머무르게 된다. (8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