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문화적 특성이 고정되어 있다는 본질주의 관점과는 반대로, 사람들의 문화적 조건과 신념은 시간과 함께 변한다. 우리는 새로 공동체community에 가입할 때마다 새로운 문화 정체성과 규범을 내면화한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새로운 페르소나를 장착하고 집에 온 대학 신입생을 떠올려보자. 그는 새로운 음악을 듣고, 새로운 표현을 구사하고, 전과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고, 아마 다른 정치 성향을 드러낼 것이다. 군에 입대하거나 아슈람ashram(힌두교도 수행처–옮긴이)에 들어간 사람 역시 새로운 정체성과 관점을 갖게 된다. 인간의 뇌는 우리가 자라난 공동체의 방식을 자동으로 인코딩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는 생각조차 없이 무의식적으로 문화 패턴을 습득한다. 이런 자동 학습 과정은 집단의 변화된 경험이 집단 전체 행동의 새로운 패턴을 촉발할 때도 동일하게 기능한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에서 고참과 신참을 한 방에 묵게 하고, 호주 대표팀에서 벤치 응원을 금지하고, 토탈보트발이 러시아 축구와 뿌리가 닿아 있음을 강조한 것은 변화된 팀 문화를 배양하기 위해서였다. _〈본문 27쪽〉
집단 구성원이라는 의식이 행동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발현되면서 더 유사하고 예측 가능하고 동조하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가까운 친족관계와 우정을 넘어 더 큰 집단으로 정체성이 확장된 “우리”라는 고양된 감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 확장된 씨족clan 집단의 구성원들은 독특한 복장과 장신구로 소속감을 강조했다. 동시에 인간의 뇌는 이런 더 큰 집단에서 평판 등 새로운 종류의 지식을 공유하게끔 계속 진화했고, 이 모든 것이 사회적 동물로서의 적응력을 더욱 강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례ritual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지식을 활용한 상호작용을 토대로 씨족들이 결합하면서 짝짓기 대상, 자원, 지식을 공유하는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인간은 공동의 문화 지식이라는 접착제로 연결된 대규모 공동체(소집단 안에서 생활하면서 더 큰 집단 안에 둥지를 튼 수천 명의 사람들)와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형태의 사회 조직은 단순히 무리가 아니라 “부족tribe”이다.
이처럼 서로 연대하는 중첩된 집단들 속에서 지식을 공유하며 생존하는 것이 바로 부족 생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부족적 동물tribal animal”이다. _〈본문 36~37쪽〉
이 책에서 나는 집단과 공유하는 인간의 특별한 재능을 놓고, 그 양파 껍질을 벗겨 “부족 본능 tribal instinct”을 세 층으로 구분한다. 석기 시대에서 유래한 본능이지만 오늘날에도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서 이런 진화 시스템을 인식할 수 있다.
첫째는 “동료 본능peer instinct”이다. 일상적인 추론과 행동에서 동료들의 패턴에 맞추려는 충동은 물론이고 급우, 동료, 이웃을 곁눈질하는 것도 동료 본능의 일부다. 둘째는 “영웅 본능hero instinct”이다. 유명인, CEO(최고경영자), MVP 등 엘리트들을 올려다보며 매혹되는 것은 영광을 향한 열망, 헌신하려는 의지와 마찬가지로 영웅 본능에서 나온다. 셋째는 “조상 본능ancestor instinct”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향수를 느끼는 것은 조상 본능의 일부며, 전통에서 위안을 느끼고 전통을 유지하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본능들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3가지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소속감과 이해를 추구하는 순응주의자, 존경과 찬사를 꿈꾸는 기여자, 연속성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주의자가 그것이다. 3가지 시스템 모두 고유한 결함이 있지만,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각각의 본능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적응적 방향으로 이끈다.
하지만 진정한 경이로움은 이 3가지 시스템이 결합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10만 년 전 3가지 부족 본능이 전부 자리를 잡은 뒤부터 우리 조상들은 번영을 누리며 인간답게 살게 되었다. 진화의 시간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훨씬 더 정교한 도구와 무기, 예술,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수백만 년에 걸쳐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 변화가 이어진 끝에 문화의 복잡성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인류 공동체의 공유 지식 풀이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되어 지역 생태에 적응했다. (개인의 강화된 두뇌 능력이 아니라) 이런 부족 단위의 학습이야말로 인류가 다양한 기후와 지형에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인간은 지구의 지배 종으로 부상했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공뿐인 상황이 되었다.
이 책에서 나는 “공유 문화를 통한 공동체”라는 “부족”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되찾고자 한다. 이는 인류가 처음으로 혈족kith and kin이라는 좁은 유대를 넘어 씨족이라는 더 큰 성취를 이루어낸 방식이다. 또한 이후에 “부족”이라는 더 넓은 네트워크에서 낯선 사람들과 교류하고 협력한 방식이다. 이런 중첩된 집단들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수많은 개인과 아이디어에 접근하는 고무적인 일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이것이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실험이다. 이것이 집단의 변화와 차별화를 위한 원동력이었다. 나는 부족 생활이 문화 변화와 진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부족을 정체나 원시성과 연관 짓는 오랜 관념을 떨쳐내고 싶다. 우리를 진정으로 인간답게 만들어준 것이 부족 생활이다. (…)
강력하고 변화무쌍한 정치의 시대에는 특히 더, 공동체와 유대를 맺는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합리성과 보편주의라는 얄팍한 대체물로 사람들을 동원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거스 히딩크는 합리적인 이기심에 호소해 팀을 성공시킨 것이 아니다. 동료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 영웅이 되고 싶은 충동, 전통을 유지하려는 열망 등 부족 동기를 활용해 팀을 이끌었다. 선수들이 일시적으로 팀 정체성이나 직업 정체성에 집중한다고 해서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었다. 부족 충동을 활용할 수 있는 리더는 팀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으며, 적절한 조건 아래에서 이런 충동은 국가를 치유하는 방식으로도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부족주의와 싸울 것이 아니라 부족주의와 소통해야 한다. (…)
예전에는 집단과 관련된 본능을 인류에게 해로운 힘이라고 생각했다. 나는(여러분도 그랬겠지만) 합리성, 창의성, 도덕성을 인간의 특징으로 간주하도록 교육받았고 순응, 지위 추구, 전통주의는 그릇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행동과학자로서 수십 년 동안 배운 것을 바탕으로, 지금은 내가 예전에 가졌던 인문학적 세계관이 순진했다고, 적어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부족 본능은 지능적인 종을 방해하는 버그가 아니다. 부족 본능은 진화적 상승을 가능하게 만든 우리 종의 특징이며, 오늘날에도 여러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약점이 아니라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는 인류의 막강한 능력이다. _〈본문 41~45쪽〉
1장 동료 본능, 많은 사람이 하면 나도 따라 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고고학자들이 오랫동안 묘사해온 것처럼 단일 도구만 사용한 얼간이가 아니었다. 협동하며 집단생활을 했던 최초의 사람족hominin이었고, 이런 조율된 집단은 부족 생활로 향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조정, 곧 마음을 나누고 맞물려 행동하는 것을 통해 호모 에렉투스 집단은 더 효율적으로 먹이를 구했으며 협동 작업으로 연대감을 형성했다. 그들의 진화 돌파구는 (에렉투스라는 이름의 유래인) 직립보행이 아니라 팀을 이룬 활동이었다. 그들의 위대한 혁신은 (모든 교과서에서 열심히 강조하는) 주먹도끼가 아니라 사냥대, 채집대, 조리팀이었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었다. _〈본문 59~60쪽〉
영리한 영장류가 더 복잡한 사회생활을 한 것이다. 여기서 던바는 새로운 이론을 제안했다. 큰 뇌는 물리 환경이 아니라 사회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 진화했다는 것이다. _〈본문 62쪽〉
지난 10년간의 새로운 과학은 이 사회 발전 이론을 연대기뿐 아니라 계통 발생까지 뒤집었다. 고고학자들은 농업이 시작되기 수만 년 전에 만들어진 “지배자 무덤princely burial”들과 신전 건축들을 발견했다. 종교가 농경과 정착을 위한 길을 닦은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한편 수십만 년 전의 대규모 사냥 유물은 씨족 단위의 협력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다. 100만 년 전에도 이미 우리 조상들은 다른 영장류를 훨씬 뛰어넘는 협동심을 갖추고 의사소통을 하면서 팀을 이루어 먹이를 찾았다. 이런 발견들은 인류의 여정을 새롭고 고귀한 빛으로 조명한다. 거의 인류의 시작 지점에서부터 우리는 부족적 동물로 살아왔다. _〈본문 66쪽〉
여러분과 나는 다국어를 구사하는 조종사나 비밀 요원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다수의 코드를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이 여러 동료 집단을 인코딩하고 있다. 이 코드들은 교대로 우리를 인도하며 단서에 자극받으면 활성화된다. 우리는 당구를 칠 때는 이런 방식으로, 교회 모임에서는 저런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문화 세계들을 넘나들면서 사람들의 얼굴, 말투, 옷차림을 비롯한 각종 부족 표지가 주는 단서들에 반응한다. _〈본문 90쪽〉
아주 먼 옛날 투르카나호 가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벌어졌을 것이다. 물가에 영양 무리가 주위를 경계하며 모여 있다. 산등성이 뒤편에서 호모 에렉투스 남성 셋이 나타난다. 그중 한 명이 호수를 향해 손짓하거나 약해 보이는 영양을 가리킨다. 어쩌면 그저 눈을 마주치면서 서로의 마음을 읽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전에도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다. 희미하게 빛나는 청록색 호수, 가까이 보이는 영양 무리가 힝힝거리고 끙끙거리는 소리, 동료 사냥꾼들의 간절한 표정 등 주변 환경의 시청각 요소로 동료 코드가 발동한다. 사냥하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그 순간의 긴박함은 성공을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힘을 합치려는 그들의 동기를 더욱 강화할 따름이다. 그들은 완벽한 사냥대로 변모한다.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는다. 드디어 행동을 개시한다. 지칠 줄 모르는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면서 추격을 되풀이해 몇 시간 뒤 쓰러진 영양을 제압한다.
그들의 결정적인 무기는 팀워크다. 이 사냥꾼들과 그들이 사냥감을 가지고 돌아간 몇몇 가족들로 이루어진 무리는 생존 게임에서 또 한 번 이겼다. 동료 본능 덕분에 거둔 승리였고, 부족 생활로 향하는 100만 년에 걸친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_〈본문 96~97쪽〉
2장 영웅 본능,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기
하이델베르크인의 이런 사회적 혁신은 내가 “영웅 본능”이라 부르는 인간 심리의 한 측면을 반영한다. 동료 본능이 집단 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인코딩해 순응을 유도하는 반면, 영웅 본능은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하는 일을 인코딩해 그와 비슷하게 기여하고 싶은 열망을 일으킨다. 이 조상들은 자기 집단에서 무엇이 정상인지뿐 아니라 규범적인 것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공동체에 기여하려면 구성원들이 어떤 행동을 승인하고 칭찬하는지, 반대로 어떤 행동을 거부하고 경멸하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행동과학자들은 이런 평가적 사회 규범을 “이상ideal” “준거準據, mores” “명령적 규범injunctive norm”이라고 하는데 더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 “영웅 코드”다. 영웅 코드는 문화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구성원들이 보인 모범에서 인코딩된 미덕의 이미지로, 비슷한 존경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틀 짓는다. _〈본문 102쪽〉
지위와 관련된 동기 및 학습 휴리스틱의 묶음인 영웅 본능은 우리 조상들의 부족 생활에 새로운 차원을 가져왔다. 단순히 동료를 통해 사회 학습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웅을 통한 학습(지위가 높은 구성원에 대한 관심과 모방)이 이루어졌다. 그저 정상적으로 행동하려는 동기에 규범적으로 행동하려는 동기가 더해졌다. 구성원들은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면서 집단의 선에 기여하는 모범 방식을 찾게 되었다. 그 결과 돌창 같은 새로운 도구, 대규모 사냥과 은신처 건설 같은 새로운 관행이 생겨났다. 이로써 (순전히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행위자들 간의 협력을 가로막는 “무임승차 문제”를 줄임으로써) 더 큰 집단에서도 협력이 가능해졌고, 하이델베르크인은 이전 인류가 누렸던 것보다 더 사회적이고 정교하고 안전한 생활방식을 갖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영웅 본능은 공동체를 위한 강력한 힘으로 남아 있다. 기술을 습득하고, 이상을 지키고,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열망에 동기를 부여한다. 날마다 자기 이익을 희생할 수는 없지만 “영혼이 움직일 때면” 떨치고 일어나 영웅처럼 행동한다. _〈본문 108~109쪽〉
동료 코드는 부족 표지sign에서 유발되고, 영웅 코드는 부족 “상징symbol”에서 유발된다. 부족 상징은 공동체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특수한 표지다. 한 집단의 상징은 집단의 핵심 이념과 관련이 있다. 킹의 연설을 듣던 군중은 미국 국기Old Glory와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링컨의 별명–옮긴이)를 눈으로 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 “아메리칸드림” 같은 문구를 귀로 듣고는 기회 균등이라는 정치적 이상을 떠올렸다. 《구약성경》의 금언과 《신약성경》의 비유를 듣고 신 앞에서 평등한 영혼이라는 유대-기독교적 이상을 떠올렸다. 아이콘 icon급 상징은 의미를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아서 잠재된 이상을 기억의 저 밑바닥에서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_〈본문 113쪽〉
기부를 하는 이유, 그리고 누군가가 보고 있을 때 그렇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평판이다. 고전 경제학에서는 자선을 평판이라는 보상을 추구하는 이기적 행위로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 나온 증거를 보면 분명 이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행동경제학 실험들에 따르면 자선 행위가 익명으로 이루어져 평판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도 사람들은 부를 공유하는 경향이 있다. 한 명이 거액의 현금을 받는 게임에서 횡재한 플레이어는 그중 일부를 아무것도 받지 못한 동료 플레이어와 나눈다. 2023년 TED 재단에서 행운의 지원자 200명에게 1만 달러씩 지급했더니 돈을 받은 이들은 평균 6400달러를 다른 사람을 위한 구매에 지출했다. 아동심리학 실험들을 보면, 유아들조차 자기는 간식을 많이 받았는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아이가 있으면 나눠준다. 유아들은 이런 상황에서 침팬지들보다 더 많은 몫을 공유하는데, 이는 인간의 부족 본능이 개입되었음을 시사한다. 관대한 행동은 심지어 “미운 두 살”에게서도 나타난다. 평판 이득과 번식의 대가를 계산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두 살짜리 아이 아닌가!
물론 이런 익명 기부의 동기가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도울 때면 누구나 내면에서 “따스한 빛”을 느낀다. 똑같은 20달러를 각각 자신과 남을 위해 쓰라고 할당받았을 때 후자가 하루를 마칠 무렵 기분이 더 좋다. 이는 회고적 감정이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이런 “자부심”을 느끼기 위해 기부함으로써 미래지향적으로 행동한다. 엘리자베스 던Elizabeth Dunn의 연구에 따르면 급우와 나눌 기회를 놓친 학생들은 약간 “수치심”을 느낀다. _〈본문 127~128쪽〉
3장 조상 본능, 전통을 배우고 잇고 지키는 것의 이로움
쇼베동굴에 두 번째로 그려진 그림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벽화보다 더 흥미롭다. 어둡고 외딴 동굴에서 누가 그렸는지 모를 무시무시한 동물들의 고대 이미지와 맞닥뜨린 후기 석기 시대 사람들은 도망치는 대신 경건한 반응을 보였다. 기법을 면밀히 관찰하고 모방해 이 벽화를 동물 이웃들에게 헌정하는 형태로 확장했다. 과거의 방식을 유지하려는 충동, 심지어 불가사의하고 비현실적인 활동까지 고수하려는 이런 충동은 인간 심리의 새로운 층위를 말해준다. 동료 본능의 순응성이나 영웅 본능의 친사회성과는 다른 층위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런 심리를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의식, 오래된 문서, 골동품 가구에 매료되는 것이 그런 사례다. 우리가 과거 세대에, 특히 자신이 속한 국가, 종교, 부족 단체의 창시자들에게 깊은 호기심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 의식, 명절 풍습, 우리를 과거의 방식과 연결해주는 전통 요리법에 열성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집단의 전통을 배우고, 유지하고, 나아가 지키려고 한다.9 진화한 부족 심리의 이 마지막 조각을 “조상 본능”이라 부를 수 있다. 동료, 영웅과 마찬가지로 조상은 우리가 교훈을 얻고 동기를 부여받는 또 다른 참조 집단이다. _〈본문 137쪽〉
이 시기 호모 사피엔스는 신뢰와 협력의 반경이 확장되었다는 점에서도 우위를 보였다. 네안데르탈인은 그 지역의 (생활권 근처에서 채석한) 돌로 도구를 제작했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때로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온 “이국적인 돌”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그 정도 먼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내륙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조개껍질 장신구와 더불어 이런 돌들은 여러 씨족 간에 광범위한 재료 교환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와 관련해 호모 사피엔스 유적지의 DNA 분석에서는 현대의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들보다 근친교배가 잦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 반면, 네안데르탈인 유적지의 분석 결과는 짝짓기가 고도로 지역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씨족 생활 그림과 일관되게, 네안데르탈인의 뼈에는 잦은 전투(예를 들어 창에 찔린 상처)와 식인(예를 들어 사람의 잇자국) 흔적이 남아 있다. 요약하면 두 종은 “대외 정책”에서 차이가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인근 씨족들과 싸우고 서로 잡아먹었고, 호모 사피엔스는 거래하고 짝짓기를 했다. 후자가 더 유리한 장기 전략으로 판명되었다. (…)
후기 석기 시대의 호모 사피엔스는 석재 거래상, 유혹자, 신전 건축자로서 다른 씨족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인근 씨족과 점점 더 많은 “공통 기반”을 갖게 되었다. 인사와 숭배 의식을 배웠기 때문에 신뢰와 교류의 문이 더 넓게 열렸고, 외부인이 내부인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점차 사피엔스 씨족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더 넓은 네트워크 안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지역의 씨족들을 연결하는 이 광범위한 네트워크 덕분에 점점 더 풍부해진 공유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다. 네안데르탈인보다 뇌가 더 크지는 않았지만 그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 종은 부족 덕분에 더 현명해졌다. _〈본문 140~142쪽〉
부족 표지가 동료 코드를, 부족 상징이 영웅 코드를 유발한다면, 조상 코드를 소환하는 상황 단서는 “부족 의식tribal ceremony”이다. 여기서 부족 의식이란 집단의 과거를 참조해 연출된 공개 행사로 가톨릭 미사, 그리스식 결혼식, 공화당 전당 대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행사들에는 최소한 2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동시성과 역사성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공동체의 과거 일부, 대개 현재에 대한 비유로 적합한 부분을 떠올리며 한마음으로 행동(예를 들어 기도, 춤, 투표)한다면 이것은 부족 의식이다.
우리는 의식ceremony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영향이 대부분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동시에 의식 시범을 보이면서 집단적 제도라고 알려주면(예를 들어 “우리는 늘 이렇게 해왔단다.”) 아이들은 암기식 학습과 엄격한 재연이라는 의식 모드에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공동체에서 극단적인 입단식(예를 들어 통과 의례, 형제 서약, 미국 해군 엘리트 특수부대인 네이비 실의 지옥 주간)은 개인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집단에 대한 일체감과 의무감을 구축한다. 종교성과 그 결과에 대한 연구는 종교 의식에 공개적으로 참여하는 것보다 사적인 신앙이 더 중요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발성 및 헌신과 관련된 의식이 더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_〈본문 152~153쪽〉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석기 시대 조상들 경우에도, 각각의 본능이 한 단계 도약을 가져다주었지만 진정한 마법은 3가지 본능이 함께 작동했을 때 일어났다. 조상 본능이 과거에 관한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 부족은 과거의 교훈들을 기억했다. 더 이상 세대마다 “바퀴를 재발명”할 필요가 없어지자 영웅 본능에 힘입어 과거의 기술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뛰어넘는 쪽으로 향했다. 이어 이런 새로운 혁신들을 동료 본능의 모방을 통해 확산시켜 집단의 공유 전문 지식에 추가했다. 부족의 지혜가 축적되기 시작했고, 이제 그들은 생존과 번영에 관한 더 많은 지식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게 되었다.
이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문화 축적”이었다. 후기 석기 시대 유럽에서 문화 복잡성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은 개인 지능이 높아진 덕분이 아니라 문화 축적의 효과였다. 그 시기 조상들은 뼈 도구를 이용해 낚시를 하고 옷을 만들었다.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고, 비너스 상을 조각하고, 뼈 피리를 연주했다. 2만 년 전에는 수렵채집 집단들이 모여서 족장을 매장하고 성소를 지었으며, 마침내 거대한 사원을 설계하기에 이르렀다. 약 1만 년 전에는 농경을 시작해 영구 정착했고, 땅을 가는 쟁기와 잉여 식량을 저장하는 토기 같은 도구를 사용했다. 5000년 전에는 가축, 도시, 바퀴, 청동, 문자를 인류 문화에 포함시켰다. 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등에서 왕국이 되었고, 이어 서로 연결되어 더 큰 제국, 곧 부족들의 부족이 되었다. 1000년 전에는 민족, 종교, 길드, 군대, 기업 등 다양한 부족들이 많은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몇 세기 뒤 르네상스 때는 교육, 기술, 탐험 여행에서 또 다른 혁명이 시작되었다. 200년 전에는 산업혁명으로 철도, 증기선, 방직, 전신 통신, 식민주의가 등장했다. 50년 전에는 원자를 쪼개고, 컴퓨터를 만들고, 우주로 날아가고, 유엔 같은 국제기구를 세웠다. 25년 전에는 인터넷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연결해 기존의 어떤 제국, 국가, 조직보다 더 큰 연결망을 만들었다. _〈본문 166~167쪽〉
4장 동료 코드의 우세 신호가 우리를 바꾸는 방식
사람들의 문화 코드들을 형성하는(또한 재형성하는) 정보를 “부족 신호tribal signal”라고 부를 수 있다. 각각의 부족 본능은 각기 다른 부족 신호에 반응해 업데이트된다. 동료 코드는 “우세 신호 prevalence signal”에, 곧 집단 구성원들이 무엇을 하고, 생각하고, 말하는지에 민감하다. 이런 신호들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보여주고, 그들을 경험에 끌어들이는 것(가장 효과적이다)을 통해 전달된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 문화를 바꾸기 위해 훈련 캠프에서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어떻게 조율했는지 떠올려보자. 몇 달에 걸쳐 그런 평등한 상호작용을 팀원들끼리 주고받은 결과 “한국 대표팀 방식”에 관한 선수들의 감각이 재프로그래밍되었다. 금주 운동가들도 새로운 문화 습관을 심는 유사한 과제에 직면했다. 금주법 폐지 운동 역시 다수 의견임에도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던 의견을 드러내야 한다는 또 다른 과제에 직면해 대중이 오인한 동료 코드를 바로잡아야 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것과 기존의 규범을 드러내는 것, 이 2가지 과제는 우세 신호를 보낼 때 각기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_〈본문 177~178쪽〉
주로 코닥의 노력 덕분에 20세기 초반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카메라를 향해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웃는 것이 관행으로 허용되자 더 많은 사람이 시도했고 그 결과 웃는 사진이 더 많이 유통되었다. 변화된 인식과 변화된 행동이라는 이 사이클을 통해 미소 짓기는 표준 행동이 되었으며 이어 당연한 행동이 되었다. 요즘 우리는 자동 조종 장치처럼 반사적으로 웃는다. 심지어 범죄자들의 상반신 사진에도 얼빠진 미소가 등장한다. 코닥은 유도와 광고로 이런 관행의 씨앗을 뿌렸고, 그렇게 찍힌 사진을 게재하는 한편 이에 관한 대화를 촉진할 귀에 꽂히는 문구를 만들어 관행이 널리 퍼지는 데 힘을 보탰다. 그 결과 일어난 문화 변화는 20세기 전반에 걸친 미국 졸업앨범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기 수십 년 동안의 다문 입술과 생기 없는 눈이 이후 활짝 웃음과 반짝이는 눈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다수에 순응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우리의 뇌는 단순히 “마음”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분위기”를 읽는다. _〈본문 179~180쪽〉
5장 유명인의 명성 신호가 일으키는 사회 변화
또 다른 연구에서는 출생률 하락에 이어 이혼율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글로부의 영향을 받은 아내들의 가족 계획 선택이 배우자와 갈등을 빚었음을 암시한다. 글로부 여주인공들은 가상의 인물일지 몰라도 그들의 영향력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브라질의 가족 규모 축소는 문화적 이상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보여준다. 텔레노벨라가 등장하기 전에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관념은 주로 성직자와 정치인이 형성했다. 그들은 신과 나라를 위해 많은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를 가치 있게 여겼다. 그러다 글로부를 보게 된 브라질 여성들은 자녀 양육을 넘어서는 삶을 사는 여주인공들에게 하루에 1시간씩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 캐릭터들은 단순히 호감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의 존경을 받았고, 시청자들로부터도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 따라서 허구의 캐릭터임에도 시청자들은 직관적으로 그들을 지위가 높은 인물로 인식했다. 의식하지 못한 채로 글로부는 브라질 여성들에게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대안 경로를 약속하는 “명성 신호prestige signal”를 보낸 것이다. 해마다 새로운 텔레노벨라가 나오면서 독립적인 여성이 대중문화의 새로운 원형이 되었다. _〈본문 205쪽〉
2014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장이 된 사티아 나델라는 기업 문화에 “새로 고침”을 눌러야 했다. CEO부터 시작해 기업 전체가 기술 전문가를 존중하는 문화 탓에 앱이 점점 무거워져(극소수 고객만 사용하는 기능들로 과부화가 걸렸다) 시장 점유율이 급속히 낮아지고 있었다.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시대에는 고객의 요구를 잘 파악하고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필수다. 하지만 나델라는 자신의 권한을 내세워 고객에게 초점을 맞추라고 관리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더 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라고 고함치는 것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 대신에 나델라는 “경청 투어listening tour”를 하며 회사 전체의 관리자들과 만났고, 상향식 요청(예를 들어 강제적인 순위 매기기에 따른 성과 평가 폐지)을 빠르게 실행했다. 또 고객사, 파트너 회사, 직원 채용 풀인 대학 등 자사 생태계도 돌았다. 어느 기술 콘퍼런스에서 성차별에 관한 질문에 잘못 답변해 물의를 빚자 직접 나서서 사과했고, 자신의 실수에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공개적으로 기술 그룹 여성들과 만나서 귀를 기울였다. 호기심, 경청, 겸손 등 시대가 요구하는 경영 스타일의 모범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나델라는 솔선수범을 통해 기업을 이끌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모든 것을 아는” 문화를 “모든 것을 배우는” 문화로 바꾸어 기업이 성장과 혁신을 되찾도록 도왔다 _〈본문 214~215쪽〉
컬트는 입문자가 완전히 내부자들과의 관계로 뒤덮이고 외부와의 연계가 끊어질 때까지 그의 사회생활을 재편한다. 컬트 거주지에서 생활하는 구성원들은 단 한 명의 영웅에 대한 승인 신호로 가득 찬 환경에 놓인다. 이런 일이 하루 내내, 매일매일 계속된다. 다른 영웅, 상반되는 이상에 대한 균형 잡힌 승인 신호는 전무하다. 이런 불균형한 경험은 개인의 정체성을 불안정하게 하고 무분별한 추앙에 취약하게 만든다. _〈본문 219쪽〉
6장 조상 본능, 현재와 미래를 위해 과거를 활용하다
2가지 의미에서 추수감사절 전통은 19세기에 시작되었다. 첫째, 19세기부터 시작해 그 이후로 매년 국가적 의식이 열렸다. 둘째,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의식의 기원을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청교도들이 미국 해안에 도착한 첫해까지 추적한 것이 19세기다. 영, 헤일, 링컨이 고의로 거짓 역사를 조작하지는 않았지만 사후 확신 편향, 선택적 기억, 희망적 관측이 작용했다. 당시에는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집단들을 하나로 묶는 의식이 최초의 미국 정착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친절한 청교도들과 왐파노아그족 손님들이 칠면조, 크랜베리, 파이를 먹으며 감사하는 “최초의 추수감사절” 장면을 동판화와 그림으로 표현해 이 신화가 확산되는 데 힘을 보탰다. 고마워하는 왐파노아그족 추장 마사소이트Massasoit의 동상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대중은 선견지명 있는 창시자들이 전통을 처음부터 완전하게 형성해 시작한다고 상상하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많은 신화와 의식이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긴 해도, 그중 일부는 자기 의제를 집단의 과거와 연속된 것으로 틀을 짜서 홍보하는 지도자들이 더 최근에 그리고 소급해(회고적으로) 만든 것이다. _〈본문 240~241쪽〉
과거는 여러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우리가 말하는 역사는 매우 선별적으로 초점을 맞춘 것이고, 그러므로 절대 확정적이지 않다. 공식 역사는 무엇을 포함하고 배제할지에 따라 달라지는 전략적인 것이다. 과거의 각기 다른 부분이 한 집단의 현재 행동 방침에 대해 각기 다른 의미를 갖는다. (…)
역사에 관한 이런 조작은 국가 정치에 한정되지 않는다. 마케터들은 기업의 과거를 선택적으로 상기시켜 현재의 구매를 유도한다. 리바이스는 골드러시 시절의 광부들을 위해 디자인했던 그대로인,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501 청바지를 기반으로 제품 라인을 구축하고 있다. 이 회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광고에는 가죽 재킷을 입은 1950년대의 저항자, 긴 머리의 1960년대 히피, 1970년대 게이 프라이드Gay Pride 행진 참가자가 등장해 개척자들이 오래전부터 이 청바지를 입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 내구성 좋은 바지를 오랫동안 물려 입고, 취향대로 꾸미고, 재활용해왔다. 요즘 나온 광고들은 그런 역사가 Z세대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관심과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 많은 것들이 변할수록 리바이스는 더 변하지 않는다. _〈본문 255~256쪽〉
7장 왜 어떤 변화는 확산되고 어떤 변화는 소멸하는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습관에서 출발해, 미디어를 통해 공유되는 집단적 이상에 도달하고, 마침내 대중적 전통과 제도를 바꾸는 데까지 이르는 이런 상향식 변화의 진행을 “풀뿌리 운동grassroots movement”이라고 한다. 앞서 6장까지 살펴본 변화 전술 중 일부가 이런 유형의 광범위한 캠페인이나 운동에 포함되어 있다. 금주 운동가들은 먼저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 금주 서약을 하도록 설득한 다음 미디어 이미지를 형성하고 끝으로 법 개정을 위한 로비를 펼쳤다. 미투 운동은 개인 대 개인으로 확산되는 게시물에서 시작해 미디어 기사들로 나왔고 이어 업계 정책과 법적 기준의 변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풀뿌리 모델이 순차적 전략의 전부는 아니다. 이스라엘의 문화적 군사화는 먼저 제도를 통해(마사다 이야기와 군사 훈련을 연결), 이어 집단적 이상을 통해(군사 영웅들의 출현과 사브라 정체성), 그다음에는 일상생활의 습성을 통해(군 복무는 이스라엘 국민을 하나로 묶는 공유된 경험이자 기준점)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싱가포르에서는 급격한 제도 변화(독립과 엄격한 부패방지법)로 이상(리콴유의 검소함과 청렴함 모델링)을 알리는 무대를 마련한 다음 “자유항” 습관(영어와 흰색 유니폼)을 촉발했다. 이는 제도에서 이상으로, 이상에서 습관으로 이어지는 하향식 진행 방식이다. 이 전략은 흔히 “충격 요법shock therapy”이라고도 하는데, 제도 변화가 집단의 평형을 깨트려 새로운 이상과 습성이 결합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_〈본문 280~281쪽〉
8장 오늘날의 극단적 분열과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독성 부족주의 비유는 저널리즘을 다채롭게 만들지만 정확한 이해나 실용적 해결책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종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심리 체계를 진화시켰고, 그 결과로 생긴 인지적 편견과 동기 부여가 정치를 비롯한 여러 삶의 영역에서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부족 본능에는 외부인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진화에서 집단에 관련된 동기는 우리 조상들이 가끔씩 마주쳤던 외부 집단인 “그들”이 아니라 날마다 함께 지냈던 내부 집단인 “우리”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인간은 서로 다른 종류의 지식을 공유하는 집단들을 통합하고, 돕고, 보존하려는 연대 본능을 진화시켜왔다. 이런 본능이 다른 집단과의 갈등에 간접적으로 작용할 수는 있지만, 집단 내 연대가 다른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직접 수반하지는 않는다. 갈등이 적대감으로 확대될 수는 있다. 하지만 갈등의 시작점이 적대감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_〈본문 321~322쪽〉
부족 심리는 우리 조상들이 북방 대초원과 호주 사막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개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기후 변화가 10도나 되었던 마지막 빙하기를 조상들이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기후 문제에 직면해 있다. 나는 부족 본능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일부 합리주의 경제학자들 입장에서는 탄소 연료의 종말보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가 더 쉽다. 공유 천연자원 개발이 과도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공유지의 비극”도 개인 차원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합리적 이기심으로 만 움직인다면 그런 비극은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부족적 동물인 우리는 자기 이익뿐 아니라 동료, 영웅, 조상에게 얽매여 있다. 일부는 무의식적으로 발현되지만 인식하게 되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_〈본문 373~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