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준비된 언어를 구사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시간을 두고 정리되었고, 그의 글은 오랜 사유와 통찰로 이어졌으며, 그의 몸짓은 항상 절제 속의 품격을 지켰다. 그는 말로 이기려 하지 않았다. 유머와 침묵으로 이겼다. 그의 언어는 ‘양심을 흔드는 사상’이었다.
이재명은 정면 돌파의 언어를 구사했다. 그의 말은 길 위에서 태어났고, 그의 글은 고단한 삶의 기록이었다. 그의 몸짓은 자신을 가로막는 벽을 넘기 위한 사다리였다. 그는 대통령 선서를 하자마자 국회 청소원들과 악수하고, 쪼그려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는 때때로 그렇게 몸으로 말했다. 그의 언어는 ‘현장을 흔드는 파격’이었다.
- 6~7쪽, 〈프롤로그〉 중에서
그들의 눈이 공통적으로 닮은 것은 ‘권력’이 아닌 ‘민중’을 중심에 두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은 군사독재 권력 앞에서도 민중의 뜻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재명은 기득권과 대립하면서도 늘 서민의 삶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들은 모두 민중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이다. 그 고통을 이해하는 눈, 그 고통을 없애거나 덜어주고자 하는 꿈과 열정과 의지가 그들의 정치를 만들어냈다.
김대중은 긴 호흡으로 역사의 흐름을 읽는 눈을 가졌고, 이재명은 현장의 순간순간에서 움직이는 민심을 읽는 눈을 가졌다. 두 사람은 멀리서 전체를 조망했고, 가까이에서 미세한 진동을 감지했다. 두 시선이 바라본 방향도 하나였다. 이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 국민의 삶이 더 좋아지는 사회, 정의와 평등이 살아 숨 쉬는 민주주의. 그들의 눈은 언제나 그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20~21쪽, ‘1장 눈, 약자의 시각’ 중에서
김대중은 “국민을 보는 눈이 사라지면, 그 정치는 이미 죽은 것”이라 했고, 이재명은 “국민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 정치인은 진실을 모른다”고 했다. 두 사람은 모두 “민주주의란, 권력자의 말이 아니라 눈의 방향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지도자의 눈이 달라지면, 국가의 정의가 달라진다. 김대중의 시선은 남북 관계의 지형을 바꾸었고, 이재명의 시선은 ‘싸울 필요가 없는’ 남북 관계를 토대로 성장과 분배, 복지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김대중은 ‘햇볕’이라는 언어로 북한을 보는 눈을 바꾸었고, 이재명은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으로 빈곤을 보는 눈을 재정의했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생활이고, 그것은 ‘지도자의 눈’을 통해 사회로 번지며 진화한다.
-48~49쪽, ‘1장 눈, 약자의 시각’ 중에서
김대중의 말은 국민 다수의 동의를 모으는 기술이었다. 이재명의 말은 같은 기술 위에 불만을 결집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기술이 더해졌다. 두 사람 다 결국은 민주주의를 진화시키는 말의 선구자였다 할 수 있다. 김대중은 ‘기본형 상식’으로 대타협을 이뤘고, 이재명은 ‘돌파형 상식’으로 구조개혁을 추구하고 있다.
한 사람은 공존의 언어, 다른 한 사람은 돌파의 언어로 민주주의를 전진시켰다. 한마디로, 김대중의 말이 ‘시대를 설득’한 언어였다면, 이재명의 말은 ‘시대를 흔드는’ 언어다. 놀랍게도 그 둘이 만나는 지점은 하나다. 국민을 향한 진심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과 방향은 같다.
-67쪽, ‘2장 말, 시대를 돌파한 언어’ 중에서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을 때도 김대중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희호 여사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쓰기였다. 훗날 《옥중서신》(1983년)으로 묶인 이 책은 김대중의 삶의 진면목을 가장 잘 응축해 놓은 기록이다. 내가 연설비서관 이전부터 외우다시피 읽은 김대중의 《옥중서신》은 어마어마한 철학적・정치적 사상서다. 절대고독과 침묵 속에서 분수처럼 솟구쳐 나온 사상의 진수다.
위대한 문장은 고난이라는 직접 경험과 독서라는 간접 경험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사유되고 발효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평생 글쟁이로 살아온 나의 굳은 믿음이다. 고난이 지독하고 깊을수록, 외로운 독서량이 방대할수록 그만큼 좋은 문장이 튕겨 나온다.
-79쪽, ‘3장 글, 기록된 사상과 철학’ 중에서
김대중은 양심으로 시대를 이끌었고, 이재명은 진실로 대중을 이끌고 있다. 김대중은 정치적 도덕성이 근간이고, 이재명은 정서적 신뢰가 기반이다.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글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고 그 드러냄 속에서 양심과 진실을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글은 감춰진 인격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김대중의 글이 시대의 양심을 보여주었다면, 이재명의 글은 현재의 진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글은 정치를 보호하는 무기가 아니다. 글은 정치인을 드러내는 진실의 거울이다. 국민은 그 거울을 통해 묻는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람은 우리 국민을 무엇으로, 어떻게, 어디로 이끌어 가려 하는가?”
-90쪽, ‘3장 글, 기록된 사상과 철학’ 중에서
김대중은 말의 무게로 진실을 지켰고, 이재명은 말의 속도로 진실을 돌파했다. 방식은 달랐지만, 말을 거짓의 도구로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둘이 똑같다. 정치는 때로 ‘거짓의 기술’이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 기술을 거부했고, 이재명은 그 기술을 되받아쳤다. 두 사람 모두 정치가 말로 사람을 속이는 일이 아니라 말을 통해 사람을 믿게 하는 일임을 증명하려 애썼다.
정직한 말은 멀리 퍼지고 오래 간다. 두 사람 모두 거짓을 이겨냈다. 그들은 진실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삶으로 ‘증명’했다.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난다는 확고한 신념, 그것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감을 갖게 만들었다.
-112쪽, ‘4장 언어, 시대를 꿰뚫는 유전자’ 중에서
이재명의 언어는 늘 뜨겁고 강렬하다. 그의 말은 분노에서 출발해 변화로 나아간다. 혁명에서 시작해 통합으로 이어진다. 소년공에서 시작해 대통령에 이른, ‘개천에서 용이 난’ 그의 서사는 대한민국이 ‘기회의 나라’, ‘희망의 나라’임을 온몸으로 입증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저절로 울컥해진다. 실제로 그는 늘 ‘사람’을 강조한다. 좋은 사람, 깨인 국민이 있어야 국가도, 역사도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믿는다. 이재명의 언어에는 거리의 소리, 청년의 기백이 담겼다. 그는 말로 울렸고, 말로 달랬으며, 말로 대중의 감정을 흔들었다. 그의 ‘분노의 외침’은 파괴가 아니라 정의와 혁신의 감정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재생산의 언어’였다.
-125쪽, ‘4장 언어, 시대를 꿰뚫는 유전자’ 중에서
1998년 2월 25일, 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김대중은 ‘고통’이라는 말 앞에서 잠시 침묵했다. IMF를 극복해야 하는 국민들이 “더 많은 땀과 눈물, 고통을 요구받고 있다”는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추었던 것이다. 울먹울먹하며 가까스로 눈물을 삼키는 ‘7초의 침묵’이었다. 그 ‘7초의 침묵’은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일으킨 역사적인 ‘몸 언어’였다.
-136쪽, ‘5장 몸, 말보다 강한 몸의 언어’ 중에서
이재명의 캠페인은 무대 위가 아니라 길 위에 있다. 도로와 시장과 좁은 골목이다. 그곳에서 그는 시민과 1초, 아주 짧은 눈 맞춤을 반복한다. 그는 말에 앞서 눈을 먼저 맞추고, 미소로 반응한다. 이 ‘단 1초’가 시민에게는 “이재명이 나를 본다”는 느낌을 준다. 친밀한 믿음의 감정을 남긴다. 이재명은 연설 도중에도 자주 청중 한 명 한 명을 응시한다. 그 사람의 시선과 표정을 따라가며 말의 강도를 조절한다.
-138쪽, ‘5장 몸, 말보다 강한 몸의 언어’ 중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많은 정치인과 대통령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처럼 자신의 눈, 말, 글, 몸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또 있을까 싶다. 그들처럼 자신이 말한 것을 삶으로 증명하려 했던 사람을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 지도자가 또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말은 현장에서 사라지지만 글은 남는다. 그 말과 글이 진심이었다면, 역사의 벽면에 작은 불빛으로 남아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비춘다. 우리는 지금, 그 불빛을 따라 걷고 있다. 두 사람의 언어에서 우리는 어떤 역사와 민주주의를 배울 것인가.
-146쪽, 〈에필로그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