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죽어라 뛰어야 한다.”
김영주, 이정모, 이현서, 정명섭의 SF소설로 만나는
‘붉은 여왕’의 거울 속 나라
‘붉은 여왕’을 테마로 뭉친 네 작가의 SF 모음집
《붉은 여왕》은 우리 청소년 문학의 밭을 꾸준하게 일구고 있는 단비 청소년문학 42.195의 44번째 책으로 SF 단편 네 작품을 모은 소설집이다. 이번 테마인 ‘붉은 여왕’은 동명의 카페 룸에서 시작되었다. 정명섭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앤솔러지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느 날, 그곳에서 지인들과 커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붉은 여왕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를 기획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등장인물이자 그 이름을 딴 이론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죠. 이 괴상한 생각을 다행히 같이 있던 작가님들이 모두 흔쾌하게 받아 주셨고, 단비 출판사 김준연 대표께서 손을 내밀어 주셔서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화 생물학자 리 밴 베일른(Leigh Van Valen)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말을 응용하여 종들 간의 진화 경쟁을 설명했다. “여기서는 제자리라도 있으려면 계속 뛰어야 해”라는 붉은 여왕의 문학적 은유가 과학으로 개념화되는 장르 이동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 재미난 발상의 전환을 이번 책에서 다시 ‘문학’으로 받아안았다. 문학이 과학으로, 과학이 다시 문학으로 탈바꿈하고 재서사화되는 과정이다. 김영주, 이정모, 이현서, 정명섭 4인의 작가가 자신만의 SF로 매만진 ‘붉은 여왕 효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의 키워드, 네 개의 우주! 각기 다른 상상력으로 폭발한 진화형 앤솔러지
《붉은 여왕》에는 네 작가가 같은 키워드로 출발해 도달한 서로 다른 상상의 세계가 담겨 있다. 김영주의 〈붉은 여왕〉은 외모 콤플렉스를 지닌 소녀가 사랑의 묘약을 통해 ‘더 나은 나’를 꿈꾸다 부작용을 겪는 이야기로, 외적 진화와 내면의 감정이 충돌하는 정체성의 역설을 아이들 눈높이에서 발랄한 문체로 풀어냈다. 정명섭의 〈소녀 C〉는 인간과 거대 개미 간의 전쟁이라는 극단적 설정 속에서 감정을 지운 소녀가 ‘존재’로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윤리와 희생을 묻는다. 이정모의 〈붉은 여왕과 거울 속 공룡〉은 자아를 인식한 공룡이 인간의 진화 실험 속에서 주체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질문하는 존재로서의 생명에 대한 통찰을 담는다. 마지막으로 이현서의 〈파동의 언어〉는 언어와 초음파로 소통하는 고래족의 세계에서, 비주류로 살아가는 인간 소녀가 공명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발견해가는 성장 서사다. 각기 다른 시선과 장르, 톤을 지닌 이 네 개의 단편은 공통된 키워드로도 이렇게 다른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며, 우리 시대 SF가 감당해낼 수 있는 사유의 지평을 스펙트럼처럼 펼쳐 보인다.
‘붉은 여왕’이라는 상상력의 엔진에 작가들의 고유한 세계관이 연결되었을 때, 이야기는 자신만의 매력을 뿜어낸다. 작가마다 다른 빛으로 빛나는 붉은 여왕의 경이로운 격차가 《붉은 여왕》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현재와 미래, 문학과 과학, 현실과 허구의 상호텍스트성의 축제를 맘껏 즐겨보기를 바란다.
작품별 줄거리
붉은 여왕_김영주
우주 정거장 1함대의 신입 경찰 네네는 미성년자들에게 사랑의 묘약을 판다는 ‘붉은 여왕’ 약방의 수상한 소문을 듣고 수사를 시작한다. 한편,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소녀 미로는 짝사랑하는 필립의 관심을 얻기 위해 친구 준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붉은 여왕에서 묘약을 구매한다. 약을 마신 미로는 순식간에 아름답게 변모하고, 필립의 주목을 받게 되지만, 필립은 그저 ‘어울릴 외모’로 그녀를 선택했을 뿐 진심은 없다.
72시간 내 고백을 받지 않으면 되돌릴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는 경고를 뒤늦게 알게 된 미로는 점차 변이되어 피부에 촉수가 돋고 외계 생명체처럼 변해 간다. 결국 미로는 우주를 탈출하려 하지만, 그녀를 따라온 준이의 진심 어린 고백으로 변화가 멈추고, 외모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네네는 ‘붉은 여왕’ 약방 주인의 정체가 불법 실험을 지속하던 과학자 피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체포에 성공한다. 사랑, 정체성, 성장, 그리고 진정한 관계의 의미를 경쾌한 우주 판타지 속에 담아낸 이야기로, 10대의 외모 불안과 사랑의 본질을 SF로 풀어낸 성장담이다
소녀C_정명섭
가까운 미래, 환경오염과 유전자 조작의 여파로 개미들이 거대화되며 인류는 생존을 건 전쟁에 돌입한다. 여왕개미의 강력한 번식력에 밀린 인류는 ‘붉은 여왕’을 제거하는 작전을 계획한다. 개미는 특정 호르몬에 반응해 인간을 감지하지만, 어린아이의 체취는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작전에 16세 이하의 아이들이 전투에 투입된다.
‘소녀 C’는 개미의 습격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감정까지 마비된 채 생존한 아이 중 하나다. 얼굴의 절반이 개미산에 녹아버린 장군의 권유로 그녀는 ‘붉은 여왕’을 제거하는 작전에 참여한다. 멸종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인간에겐 더 나은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작전에서 동료 소녀A를 불길 속에서 구해내고, 미지의 구조물 안으로 함께 침투해 깡통 폭탄을 던져 ‘붉은 여왕’을 해치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끝까지 인간성과 용기를 잃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는 16세 청소년의 비장함에 숙연해진다. 작품은 전쟁 속 아이들의 희생과 존재 의미, 인간성과 생존 사이의 윤리적 딜레마를 묵직하게 다루며, SF적 배경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환기시킨다.
붉은 여왕과 거울 속 공룡_이정모
2100년, 인간은 유전공학으로 공룡을 되살려 공룡 사파리 월드를 운영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안킬로’라고 여기는 인공지능 생명체다. 그는 절친 공룡 ‘아크로’와 함께 박물관의 거울을 통해 알 수 없는 가상세계로 들어가며 점점 자신의 정체에 의문을 품는다. 붉은 여왕의 게임에서 혼자 살아남게 되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 공룡 생명체는, 인간이 공룡에게 인간의 전두엽을 이식해 실험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붉은 여왕 프로토콜’로 불리는 진화 실험 장치였고, 공룡들에게 인간보다 더 깊은 질문 능력을 부여했기에 그 실험은 제거 대상으로 전환된다.
마지막 순간, 안킬로는 “나는 질문이다!”라고 외치며 인간의 도구가 아닌 존재로서 자기 선언을 하지만, 실험 종료와 함께 데이터로 분해된다. 남겨진 것은 기억과 물음뿐. 작품은 인공지능과 정체성, 진화와 질문의 힘을 묻는다. 존재란 무엇이며, 인간이 만든 생명체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SF우화다.
파동의 언어_이현서
고래족이 지배하는 미래 지구, 멸종 위기에 처한 인류족 소녀 리안은 물속 활동에 서툴고, 초음파 언어에도 익숙지 않아 학교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리안은 인류의 언어와 과거를 이해하고자 고래번역기를 몰래 탐색하고, 같은 인류족 친구 현진과 함께 과거 인류가 보이저 1호를 통해 외계로 보낸 혹등고래의 노래와 메시지의 진실에 다가선다. 그 메시지는 “지구를 지켜 줘, 인류가 파괴하고 있어”라는 간절한 외침이었고, 이는 외계 문명에 닿아 고래족의 지구 정착과 진화를 불러온 배경이 된다. 리안은 고래족 친구 테이, 그리고 의문의 가희와 점차 관계를 맺으며, 진동과 공명의 세계에 자신의 목소리를 보태기 시작한다. 음악 수업 중 리안의 노래는 고래족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전해지고, 리안은 처음으로 자신이 타자임에도 존재 자체로 연결될 수 있음을 느낀다. 고래족과 인류족 간의 파동 공명은 서로 다른 존재 간의 소통 가능성을 보여주며, 존재의 존엄과 다름의 가치, 연대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소수자, 타자, 차별, 공존이라는 주제를 SF적 설정 속에 섬세하게 녹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