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줏간 주인은 자기가 곡식 자루에 넣어준 간이나 살점 붙은 묵직한 뼈가 노파의 남편이나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돌아가느니 차라리 놈들이 굶어 죽는 게 낫다고 말했다.
굶어 죽으라고? 아니, 어떤 존재든 밥은 먹어야 했다. 인간은 먹어야 했다. 별 쓸모는 없지만 팔 수 있을지 모르는 말도, 석 달 동안 우유를 전혀 내놓지 않은 가엾고 여윈 소도.
말, 소, 돼지, 개, 인간 모두 다.
ㅡ20쪽, 「숲속의 죽음」
닭은 달걀에서 태어나 부활절 카드 그림에서 볼 법한 솜털 보송한 미물로 몇 주를 살다가 흉물스럽게 깃털이 빠지고, 아버지가 눈썹에 땀방울 맺혀가며 일해서 사 온 옥수수와 모이를 잔뜩 먹고, 핍이니 콜레라니 각종 이름을 단 병에 걸려서는, 멍청한 눈으로 멀뚱히 태양만 바라보며 서 있다, 앓다가 죽는다. 암탉 몇 마리는, 그리고 가끔은 수탉도 한 마리쯤은 신의 수수께끼 같은 목적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졌는지 고생 끝에 성체가 된다. 그리하여 암탉이 알을 낳고 거기서 다른 병아리가 나오면 이 지독한 순환이 완성된다. 이 모든 것이 믿기 어려우리만치 복잡하다. 철학자 대다수는 분명 양계장에서 성장한 사람들일 것이다. 닭에게 크나큰 기대를 걸고 살다 보면 지독한 환멸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ㅡ39~40쪽, 「달걀」
아버지는 그저 “사람들은 어딘가 갈 곳을 원하지. 갈 만한 곳을 원해”라고 반복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었다. 나머지 공백은 내 상상으로 채운 것이고.
이삼 주 동안 아버지의 이런 생각이 우리집을 장악했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무뚝뚝한 표정 대신 미소로 얼굴을 채우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어머니는 하숙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었고 거기에 감염된 나도 우리 고양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ㅡ49~50쪽, 「달걀」
아이고, 내가 처음부터 정직하게 굴었더라면, 하다못해 나를 다시 정직하게 설명할 길이 있었더라면. 내가 루시와 일행에게 말한 월터 메이더스란 인간은 세상에 없었다. 아예 있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설사 있대도 다 걸고 말하는데 내가 다음 날 오하이오 매리에타로 가서 쏴버릴 작정이었다.
내 꼴이 그랬다. 그야말로 왕맹추였다.
ㅡ80쪽, 「나는 바보다」
케이트에게서 편지를 받은 지금 윌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소년은 자연히, 스스로 뭘 어떻게 하지 않아도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연결은 이제 끊겼다. 윌은 둥지에서 내밀렸고 그 사실은, 둥지 밖으로 내밀렸다는 것은 성취였다. 난감한 건, 윌은 이제 소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자가 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윌은 허공에서 대롱거리는 존재였다. 발을 둘 곳이 없었다.
ㅡ137쪽, 「슬픈 나팔수들」
좋다, 거기, 읽고 있는 당신 역시 내가 얼간이라 생각하는군. 비웃고 히죽대는데. 나를 좀 봐라. 당신은 여기 공원을 걷고 있어. 개를 끌고 가고 있지.
당신 아내는 어디에 있나? 뭘 하고 있나?
뭐, 집에서 목욕하고 있다고 치자.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목욕하며 꿈을 꾸고 있다면 누구 꿈을 꾸지?
하나 말해주겠는데, 거기 개 끌고 가는 당신, 아내를 의심할 이유가 없을지 몰라도 당신은 나와 같은 처지다.
ㅡ182쪽, 「그 여자 저기 있네, 목욕 중이야」
“사람들 인생은 숲속 어린 나무를 닮았어. 기어오르는 덩굴에 숨통이 조이고 있지. 덩굴이란 죽은 사람들이 심어놓은 해묵은 생각과 신념이야. 나부터도 구물구물 기면서 내 숨통을 조이는 덩굴에 뒤덮여 있어.”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뛰놀고 싶단 것도 그래서야. 나뭇잎처럼 바람을 타고 언덕 위에서 흩날리고 싶다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지금은 덩굴에 덮여 서서히 죽어가는 나무에 불과하지만. 보다시피 난 지쳤고 깨끗해지고 싶어. 난 여러 인생에 소심하게 기웃대는 어설픈 인간이야.”
ㅡ208~209쪽, 「씨앗」
안개 속에서 노인의 호리호리한 몸이 왜소하고 옹이 진 나무를 닮아갔다. 이어서 허공에 매달린 무언가가 되었다. 교수대에 걸린 몸뚱이처럼 앞뒤로 덜렁거렸다. 노인의 얼굴은 그 입술이 하려는 이야기를 믿어 달라고 내게 간청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관계에 대한 모든 사실이 꼬여 뒤죽박죽되었다. 아내를 죽인 남자의 영혼이 길섶에 있는 왜소한 노인의 몸으로 들어왔다.
영혼은 도시의 법정에서는, 판사 앞에서는 결코 할 수 없을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썼다.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의 전모가,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에 손을 뻗어보려던 이야기가, 외로움에 실성해 안개 낀 아침 시골길 변두리에 서서 작은 개를 품에 끼고 웅얼거리는 노인의 입술로부터 자신을 드러내려 했다.
ㅡ260쪽, 「형제」
이때 일어난 일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기차의 여자는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설명했다. 여자가 말하길 다툼을 끝낸 두 영혼이 두 몸으로 돌아갔는데 노파의 영혼은 독일인의 몸에, 독일인의 영혼은 노파의 몸에 들어가고 말았다.
ㅡ272쪽,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