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5년을 돌아보면 어긋난 게 정말 많았는데, 가장 큰 게 대통령과 국민의 어긋남이었어요. 이 어긋남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재임 중에는 국정 수행 지지율이 아주 낮았는데, 퇴임한 뒤에는 인기가 막 올라갔고, 돌아가시고 나서는 국민이 제일 좋아하는 대통령이 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 계실 때 관광객들이 몰려오니까 인사하러 나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일할 때는 못한다 못한다 싫다 싫다 하더니 이제 그만두고 나와서 노니까 좋다 좋다 한다.” 국민과 대통령의 어긋남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표현한 농담 같은 진담이었어요. 그렇습니다. 국민과 대통령은 크게 어긋났습니다. 그게 다 제 자리에 들어가야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 인물로 합당한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_31쪽, ‘제1장 대통령 노무현을 말하다’에서
한국 사회는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겪었던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어긋남을 스스로 치유해 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사 전체를 이런 식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노무현 대통령만큼은 이렇게 해석해야 국민의 선호도가 계속 상승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돌아가신 과정에서 우리가 느꼈던 애통함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노 대통령은 정말 중요한 우리 사회의 과제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문제가 있으며 해결할 때 적용해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어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문제의식과 해결의 원칙은 빛이 바래지 않았어요. 여전히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호감도가 지속 상승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저의 해석이에요. _54쪽, ‘제1장 대통령 노무현을 말하다’에서
정말 책을 좋아하셨습니다.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면 2004년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1석 얻고 나서 당선자들을 청와대 영빈관에 초대해서 저녁을 주셨어요. 끝날 때 종이 쇼핑백을 하나씩 주시더군요. 다들 농협 상품권이라도 들었기를 기대하면서 거기서 열어 볼 수는 없으니 그냥 들고 나왔습니다. 대통령께서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된 동안 책을 많이 읽으셨는데 그중에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 있었어요. 굉장히 중요한 의제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제17대 국회의원이니까 이 책 정도는 읽고, 우리 노동시장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 보라고 주셨던 것이죠. 많은 의원들이 나오면서 농담 삼아 말하더군요. “농협 상품권도 없네!” 후보 시절 설렁탕도 안 사던 분인데 농협 상품권 주시겠어요? 그 정도로 책을 좋아하셨어요. 그렇게 떠나지 않으셨다면 틀림없이 책과 관련된 일을 무언가 하고 계실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유튜브 방송하셨으면 구독자가 500만 명은 되지 않았을까요? _62쪽, ‘제1장 대통령 노무현을 말하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이야기할 때 “유신체제 이거는 독재다, 이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정치적으로 보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 유신체제가 없었으면 중화학공업 건설이 성공했을까요? 저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 정도의 희생, 즉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게 바로 그겁니다. 최소한의 희생 대신에 우리가 얻은 게 최대의 업적 아닙니까! 지금 우리 자동차 산업, 우리 반도체, 우리 제철, 우리 석유화학, 우리 정밀기계 이거 빼면은 뭐가 있습니까? _92쪽, ‘제2장 대통령 박정희를 말하다’에서
“만약을 가정하고 질문합니다. 혹시 10·26 시해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과연 정권을 평화적으로 넘기고 가셨을지 아니면 끝까지 정권을 잡았을지가 궁금합니다.”
아주 좋은 질문을 해주셨어요. 저는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손으로 정권을 넘기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해서 교장 선생님처럼 살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상 그렇게 되지 않거든요. 권력이라는 것은 넘겨주면 넘겨받은 사람이 넘겨준 사람을 잘 모시는 경우는 참 드물어요. 그러면 박정희 대통령이 10·26 때 그런 식으로 돌아가시는 게 한국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됐느냐 하면 저는 도움이 됐다고 봐요. _106~107쪽, ‘제2장 대통령 박정희를 말하다’에서
늘 유머가 풍부하고 남자보다는 여자를 훨씬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때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없었을 때인데 그런 페미니스트적인 면모를 많이 보이셨지요. 서거하시고 난 다음에 언론사에서 원고 청탁을 하길래 제가 제목을 ‘보기 드문 양성적 인간’이라고 썼어요. _124쪽, ‘제3장 대통령 김대중을 말하다’에서
그분이 쓰신 옥중엽서를 보면 한없이 섬세하고 자상하고 따뜻하고 고운 심성을 그대로 볼 수 있어요. 당시 교도소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봉함엽서 편지를 쓸 수 있게 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원고지 80장 분량을 옥중편지로 썼어요. 아주 작은 글씨로 쓴 걸 보면 꼭 자수 틀을 보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이렇게 강인한 신념과 자잘한 섬세함·친절함·따뜻함 이런 감성들이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이렇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_126쪽, ‘제3장 대통령 김대중을 말하다’에서
1997년 11월에 IMF 경제위기를 겪었잖아요. 그 IMF 때 연쇄 도산을 일으킨 대기업 부실 채권이 GDP의 28%에 해당하는 112조였어요. 여기에 공적 자금을 투입했고요. 결국 IMF가 예측했던 2004년보다 3년 더 빨리 2001년에 경제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위대한 업적이죠. 어찌 보면 햇볕정책보다도 더 신속하고 효율적인 경제정책을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_144쪽, ‘제3장 대통령 김대중을 말하다’에서
압축 성장을 통해서 민주화를 달성한 김영삼은 군부 개혁에 나섭니다. 하나회를 해체하고 그다음에 법을 새로 만들어서 전두환·노태우 12·12 쿠데타에 대해서 형사처벌을 하면서 군사독재를 청산한 것이지요. 목숨 걸고 한 일이에요. 이것이 가능했던 거는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지지를 해줬기 때문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배짱과 강한 추진력 때문이기도 해요. _174~175쪽, ‘제4장 대통령 김영삼을 말하다’에서
금융실명제는 결국 경제정의를 구현한 것이었어요. 부정부패가 대폭 사라지면서 한국 사회 전체가 몰라보게 투명해졌어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거라는 거는 청와대 경제수석도 몰랐어요. 심지어 아들한테도 귀띔해 주지 않은 탓에 은닉해 둔 자금이 검찰에 적발되었고 기소까지 당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도 남겼지요. 아들 김현철이 대통령선거 비용으로 쓰고 남은 돈 50억 원을 안기부 예산에 묻어두었다가 실명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5년 뒤 한보사건 때 적발됐던 것이죠. _176쪽, ‘제4장 대통령 김영삼을 말하다’에서
‘좋아하는 대통령’도 조사했습니다. 2004년 첫 조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은 48%로 1위였어요. 당시 현직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7%로 3위에 불과했고요.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약 7배 많았던 거죠.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4년 두 번째 조사를 했습니다. 그해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합니다.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대통령 순위도 극적으로 바뀝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이 32%로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 28%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섭니다. 2014년에 이어서 2019년에도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은 32%로 변동이 없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시 한번 더 떨어져서 23%에 그칩니다. _192쪽, ‘제5장 대한민국 대통령을 말하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