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에서 ✦
“110번 질문요?”
“네.” 직원이 말했다. “가고 싶은 곳을 말해야 하는 질문이에요.”
그 질문을 그냥 뛰어넘었음이 분명한 푸시킨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 한순간도 그 질문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대에 찬 직원의 시선을 받으면서 푸시킨은 머릿속을 뒤졌다. 이리나가 항상 흑해에 가보고 싶어 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건 소련 영토에 있는 곳이고……. 그의 다음 차례인 남자가 발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확실하게 들려오기 시작하자, 푸시킨은 생각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졌다. 그때 갑자기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생각났다.
“뉴욕시?”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_44쪽, 「줄 서기」에서
작가들이 수백 년 전부터 괜히 언어의 장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려면 특별한 훈련과 대장장이 같은 체력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글을 쓰는 작가는 상상력이라는 대장간에서 땀을 흘리며, 언어라는 모루 위에서 문장에 망치질을 한다. 작가 지망생이 일용할 양식을 벌 수 있는 곳으로 대장장이의 공방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티모시는 이렇게 한껏 목적의식에 취해 페니브룩 씨의 서점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바랐던 것 이상, 아니 그 이하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_64~65쪽, 「티모시 투쳇의 발라드」에서
이번에도 우리는 작별 인사 없이 헤어졌다. 하지만 비행기로 통하는 통로로 들어가기 전에 스미티가 돌아섰다. 그리고 계면쩍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고 말했다. “아스타 루에고, 제리.”
나도 한 손을 들고 말했다. “아스타 루에고.” 하지만 속으로 생각한 말은 이거였다. “아스타 눈카.”
_143쪽, 「아스타 루에고」에서
하지만 존을 지켜보면서, 자신에게 감탄하는 친구 몇 명에 둘러싸인 그 점잖은 노신사가 가슴 앞에서 양손을 교차하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모습이 거의 흐릿해질 정도로 빠르게 원을 그리며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페기가 배신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넬의 작은 카메라 화면 속에서 남편의 비밀스러운 외출을 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순수한 기쁨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녀가 없는 곳에 존재하는 기쁨, 게다가 그녀가 없어야만 가능할 것 같은 기쁨.
_189쪽, 「나는 살아남으리라」에서
토미는 양복을 옷걸이에 걸고, 이를 닦고, 침대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1분쯤 책을 읽는 시늉을 하다가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다시 일어나 신발을 정리했다. 토미가 다시 베개를 베고 누운 뒤 나는 몸을 기울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때로는 우리에게 그런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암담한 상황이라 해도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달래듯이 누군가가 머리에 쪽 입을 맞춰주는 것. 내가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10분 뒤면 나는 곤히 잠들겠지만, 토미에게는 아주, 아주 긴 밤이 될 테니까.
_217쪽, 「밀조업자」에서
“값이 얼마나 나갈 것 같아요?”
“글쎄. 10만 정도? 12만? 최대 15만까지 될 수도 있고.”
샤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비슷한 계산을 해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세금도 내야 하고…….”
“그렇지. 내 고객이 기꺼이 현금으로 돈을 치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곳이라는 몸짓을 했다.
샤론은 손전등을 계속 껐다 켰다 하면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양한 길이 해방 또는 저주로 이어져 있었다.
_291쪽, 「디도메니코 조각」에서
“왜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표를 연장한 거요?”
그녀는 살짝 놀란 기색이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풍경을 좀 바꿔볼 때가 되었다 싶었던 것 같아요.”
_324~325쪽, 「할리우드의 이브」에서
그녀의 질문에 드러나는 호기심은 또 얼마나 세련됐는지. 젊은 시절의 갈릴레이나 아이작 뉴턴도 아마 그런 호기심을 품었을 것이다. 지난날의 변덕스러운 확신에 노예처럼 매달리지 않고(사실 오히려 그런 확신을 본능적으로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세상에 관심을 보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우리가 우주공간으로 튕겨나가지 않게 붙잡아주는 불변의 법칙에도 관심을 보였다.
_331쪽, 「할리우드의 이브」에서
그전 해에 리츠키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드하비의 뒤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런 발품 낭비가 없었다. 영화사 사람들이 그녀를 아주 엄하게 통제한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6시에는 탄산수를 마시고, 7시에는 저녁을 먹고, 그 뒤에는 집에 돌아와 우유 한 잔을 마신 뒤 이불을 꼭꼭 덮고 자는 것이 그녀의 생활이었다. 하기야 영화사의 이런 조치를 탓할 수도 없었다. 자신들이 깔고 앉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주기율표의 일흔아홉 번째 원소, 즉 황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_368쪽, 「할리우드의 이브」에서
요점을 말하자면 이러했다. 평범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은막에서 옆집에 살 것 같은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그 아가씨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비열한 기질은 없었다. 그저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것뿐이었다. 독일인들은 그런 것을 샤덴프로이데라고 불렀다. 리츠키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도 신이 주신 결점을 부르는 화려한 용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점을 신에게 되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다.
_377쪽, 「할리우드의 이브」에서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내가 말해주죠. 여긴 대합실과 비슷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대합실이에요. 우리는 모두 나무 벤치에 앉아 어제 신문을 읽고, 어제 점심을 먹고 있죠. 하지만 가끔 플랫폼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차장이 한 명을 들여보내 페이데이 고속열차를 탈 수 있게 해줍니다. 우편실에서 일하면서 쓴 작품이 어찌어찌 커다란 떡갈나무 책상까지 도달하게 된 삼류 작가가 그 열차에 탈 때도 있고, 우아한 아가씨가, 그러니까 당신 친구 같은 사람이 농장에서 뽑혀 오기도 하죠. 하지만 나처럼 평범한 인간에게 그 기회가 올 때도 있습니다.”
_380쪽, 「할리우드의 이브」에서
이 도시에서 20년을 산 리츠키는 이제 거의 무엇이든 믿을 수 있었다. 얼간이가 부자가 되는 것도 보고, 천재가 빈털터리가 되는 것도 보았다. 예술 작품이 쓰레기더미 속에 던져지는 것도 보고, 싸구려 작품이 미국인들의 마음과 심장을 사로잡는 것도 보았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성인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연애를 하는 것도 보았다. 그런 사람들의 관계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하다가는 정신병원행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어도, 자신의 행운만은 믿을 수 없었다.
_500쪽, 「할리우드의 이브」에서
하긴, 돈은 이 망할 놈의 도시 전체를 정리해주었다.
_514쪽, 「할리우드의 이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