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류라는 강줄기를 타고 흐르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물방울이다. 모든 어린이와 나는 하나의 강으로 이어져 있다. 우리의 미약함이 모여 강물을 더 맑게 하고, 강줄기를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다. 인간이 강의 일부가 아니라 각자 한 방울의 물이기를 선택한다면, 결국 인류는 증발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약한 존재들이 먼저 고통 받고 사라질 것이다. 인간 중에서는 나도 내 딸도 약한 축에 속한다. 우리에게는 공존이 생존이다.
오늘도 나는 어른이자 어린이다. 모든 어른은 어린이의 연장선이다. 그래서 노키즈존은 ‘노휴먼존’이다. 어린이를 환대한다는 것은 곧 나를 환대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연결된 감각을 회복하지 않으면 어린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어린이가 먼저 멸종할 것이다.
- 장하나, 〈어린이가 먼저 멸종하기 전에〉, 15쪽
모든 어린 사람이 예의가 없거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음에도 ‘초딩’이라는 말은 그 집단 전체를 평가, 비하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초등학생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도 예의가 없는 행동을 하는 등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초딩’이라고 부르며 무시한다. ‘초등학생’이 멸칭, 욕이 되는 셈이다.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위 ‘진상’인 사람들의 언행을 무심코 ‘어린 사람’에 비유하는 것은 결국 어린이 청소년을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강화될수록 ‘어린 사람’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표현도 더 서슴없이 쓰이게 된다.
- 난다, 〈‘애새끼’, ‘초딩’에서 ‘잼민이’, ‘금쪽이’까지〉, 22쪽
민식이법을 타깃 삼아 어린이 혐오를 퍼뜨리는 악성 유튜버들의 목소리는 계속 커졌다. 어린이를 조롱하는 단어들도 서슴지 않고 사용했고, 달려오는 아이들을 피하는 ‘스쿨존을 뚫어라’라는 게임까지 만들어 가며 어린이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민식이법 놀이’라는 기괴한 단어도 만들어졌다. ‘민식이법 놀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민식이법 놀이’라는 표현은 사고로 희생된 피해자의 이름을 마치 운전자에 대한 가해자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민식 님 그리고 그 양육자는, 최소한 스쿨존에서는 같은 사고를 막아 보고자 귀한 이름을 내주었다. 그런데 차량 주변의 어린이들을 가리켜 ‘민식이’라고 부르기까지 하며 민식이법을 어린이를 혐오하는 구실로 삼는 모습은 그 뜻에 배반되는 일이다. 둘째, 운전자 위협 행위에 ‘놀이’라는 말을 붙여 오히려 그 행위의 위험성과 심각성을 가볍게 만들었다.
- 곽지현, 〈어린이 안전을 위해 내어준 ‘이름’들, 만들어 낸 ‘법’들〉, 45쪽
차별에는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차별이 거듭될수록 고통은 더 깊어진다. 처음 차별을 경험하는 순간도 마음에 깊이 남는다. 노키즈존을 처음 대면한 것은 아이가 열 살 때였다. 대구를 방문했다가 평소 아이가 궁금해하던 경주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생각에 잠깐이라도 들르고자 욕심을 냈다.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을 둘러보고 어느새 저녁 시간, 번화하다는 이른바 ‘황리단길’(황남동 일원)에서 아이와 함께 갈 만한 식당을 찾았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발품을 판 끝에 도착한 식당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입구에 붙은 “NO KIDS ZONE(0-10세)” 안내문이었다.
- 백운희, 〈노키즈존으로 읽어 내는 어린이 배제 사회〉, 65쪽
노키즈존이 허용되고 확산되는 사회 속에서, 자녀가 있는 여성들은 어린이를 동반한 외출 시 타인의 시선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들이 공공장소에서 일부 ‘무례한 엄마들’과는 다르게 얼마나 ‘개념 있게’ 행동했는지 자체 검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입맛에 맞는 여성상, 양육자상, 어린이상을 만들어 내고 이들이 스스로 자기 규율의 노력을 기울이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린이와 양육자, 여성을 멸시하게 하는 혐오의 전형이다.
- 백운희, 〈노키즈존으로 읽어 내는 어린이 배제 사회〉, 72쪽
오랫동안 체벌은 문화적 관습, 교육적 목적에 따른 행위로 여겨졌다. 하지만 “애들은 좀 맞아야 한다”, “요즘 애들은 안 맞고 자라서 버릇이 없다” 같은 말들이 공공연히 나오고, 체벌을 조장·미화하는 창작물이 인기를 얻는 모습을 살펴보면, 체벌은 명백히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차별적·혐오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차별과 혐오가 어떤 식으로 심화되는지를 도식화한 ‘혐오의 피라미드’라는 개념을 참고해 보자. (중략)
체벌은 이 피라미드가 설명하는 현상에 잘 부합한다. 우리 사회에는 어린이·청소년에 관해 미성숙하고 말이 안 통하고 통제하기 어렵다는 등의 부정적 고정관념이 존재하며, 이들에 대한 하대 및 각종 ‘혐오 표현’도 흔하다. 이에 따라 어린이·청소년들이 ‘폭력이 아니면 말을 듣지 않는’, ‘인간이 덜 된 짐승 같은’ 존재로 인식되기에 어린이·청소년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도 쉽사리 정당화된다.
- 공현, 〈체벌, 어린이에 대한 합법화된 폭력〉, 103~104쪽
기후 위기에 대해 어린이들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불퉁한 소리를 들어 왔다. 이에 더해 민주당과 함께 간담회를 가졌다는 이유로 어린이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 양육자가 외치는 소리는 묻혔고, 어린이를 폄훼하는 뉴스와 여당에 의해 고통받는 참혹한 시간이 흘렀다. 이 일련의 사건에서 정말로 ‘정치적’인 것은 누구인가? 발화자가 이야기한 내용은 덮어 버리고자 빨간 칠을 하고 의도적인 이미지 왜곡으로 몽니를 부린 쪽은 여당과 언론 아닌가? 더 나아가, 왜 어린이들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면 안 되는가?
- 남궁수진, 〈어린이들의 목소리에 돌아온 어른들의 ‘억까’〉, 129쪽
학부모들이 입을 모아 한 이야기는 양육자인 우리가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해서 “섹스”라는 단어도 입에 올리지 못하고, 누가 볼까 겁나서 성교육 책 속의 성관계 장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이 책을 다시 보았는데, 사실은 굉장히 건조한 글과 해부학 같은 그림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집중한 책이었다. 오히려 50년 전 책이어서 어떤 부분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시각이 도드라지는 점이 아쉬웠다. 그러니 ‘책의 문제’가 아니었다.
학부모들과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제대로 정확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중략)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려 줄까?” 나는 이 이야기를 아이들과 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우리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보고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 대해 배웠을까? 성욕, 자위, 섹스를 어떻게 배우고 받아들이면서 지금의 나이가 되었을까? 혹시 ‘야동’만 접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미안함이 들었다.
- 김용실, 〈성평등·성교육 도서는 어린이의 권리다〉, 145~146쪽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 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지나치다고 반응하는 모습은 한국 사회가 어린이·청소년에 대해 가진 인식의 한계를 잘 보여 준다.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는 존댓말을 사용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이 어린 사람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일방적으로 반말을 사용하고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태도는 명백한 차별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허용되는 것은 사회적 문제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하위’ 존재로 취급된다는 의미이다
- 이은선,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169~170쪽
우리는 어린이책에서 어린이를 그리는 모습과 현실의 어린이를 둘러싼 환경을 들여다보며 어린이가 겪는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응답하고자 했다. 그 새로운 기준을 얻게 된 계기가 학생인권, 어린이 인권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린이가 어른들이 주는 보호와 사랑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임을 인식했다. 어린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에 응답해야 할 책무를 회피하고 있는 우리 사회 제도와 문화의 폭력성도 알게 됐다. 인권에 기반을 두면서 어린이책을 읽고 어린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독서 정책에 대한 시선도 단호해졌다.
- 김영미, 〈“어린이도 시민이다!”〉, 192쪽
여러 통계와 연구 결과로도 그렇고, 어린이·청소년들이 실제로 느끼는 고통도 그렇고 너무 긴 학습 시간은 심각한 인권 문제였다. 노동 시간에 관하여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이라는 기준이 있는 것처럼 학습 시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기준과 제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야말로 학습 시간 줄이기 운동의 핵심이었다.
토론 끝에 아수나로는 학습 시간 줄이기 운동의 5대 요구를 마련했다. “① 9시 등교! 3시 하교! 하루 6시간 학습!(하루 중 수업 부담 감축, 수업 시수 줄이기) ② 방학 일수 늘리고 수업 일수 줄이고! ③ 보충, 야자, 학원 모두! 강제 학습 금지!(사교육과 학교교육을 막론하고 학습 강요 근절) ④ 야간/주말/휴일엔 학생에게도 휴식을! ⑤ 과잉 학습으로 몰아넣는 경쟁 교육 개혁!(장시간 학습을 유발하는 환경 개선)”이었다.
- 따이루, 〈“어린이·청소년은 더 많은 자유 시간이 필요하다!”〉, 210~211쪽
이제 한국 사회에 어린이·청소년 혐오가 나타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워졌다. 2019년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대한민국에 대한 심의 과정에서 르네 윈터 위원은 “전반적으로 한국은 아동을 혐오하는 국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국가, 교사, 미디어 등으로 고통받는 아동들이 있는데, 왜 아무도 아동 곁에 서 주지 않는가?”라고 발언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열악한 인권 상황, 나아가 어린이·청소년 혐오를 외부의 시선에서 지적한 말로 받아들여졌다.
노키즈존은 어린이와 공존하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린이 혐오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그 밖에도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혐오 표현이 유행어가 되고,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제도가 폐지되고 후퇴의 위기에 놓이는 등 어린이·청소년 혐오는 곳곳에서 작용하고 있다.
- 공현, 〈혐오와 보호는 함께 작동한다〉, 220~2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