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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조계진

아들이 기록한 어머니의 회고록


  • ISBN-13
    978-89-460-8385-1 (03810)
  • 출판사 / 임프린트
    한울엠플러스주식회사 / 한울
  • 정가
    38,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5-06-22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이종찬
  • 번역
    -
  • 메인주제어
    문학연구: 1900-2000년
  • 추가주제어
    인물: 역사인물, 정치인, 군인
  • 키워드
    #문학연구: 1900-2000년 #역사 #인물: 역사인물, 정치인, 군인 #한국근현대사 #어머니 #아들
  • 도서유형
    종이책, 양장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53 * 224 mm, 496 Page

책소개

어머니의 기억이 아들의 글이 되다

 

기억의 작은 조각들이 전하는

대한제국의 비극과 독립운동 그 뒷이야기,

아,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

 

한국 역사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가문이 있다.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 조계진 여사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며느리로, 1897년 6월 22일(음력 5월 23일) 조정구 대감과 흥선대원군의 딸인 정경부인 완산 이씨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96년 12월 21일 별세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에서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나, 독립운동의 상징인 집안에서 한국사의 고빗길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그런 까닭에 조계진 여사의 구술은 한국 근현대사의 빈칸을 메워줄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그러나 개인사의 주역으로 일상과 역사를 넘나들며 시대를 증언하는 이 책은 한국사의 한 조각 퍼즐이라는 의미 있는 구술서로서뿐 아니라 희로애락이 담긴 한 여인의 회고록으로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올해로 미수(米壽)를 넘긴 조계진 여사의 아들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아들이 쓴 회고록(子敍傳)’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어머니의 삶을 하나하나 되짚어간다. 조계진 여사의 삶과 두 아버지(조정구 대감과 이회영 선생)의 행적이 사부곡(思父曲)의 주선율과 부선율을 이루며 조선의 비극과 독립운동의 뒷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들려준다.


개인사가 한국사가 된 가문에서 그저 평범한 행복을 꿈꾸던 한 여인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아들의 사모곡(思母曲), 어머니의 사부곡(思父曲)

 

책은 1899년 유난히도 혹독했던 그 겨울의 추위로 아픈 역사의 서막을 연다. 때는 세기말, 기울어가는 만추의 조선에서 흥선대원군과 여흥 민씨 부대부인의 딸 완산 이씨는 막내딸 조계진을 낳고 1년 반을 병상에서 보내다가 그해 2월 세상을 떠났다. 광무황제의 마지막 충신 조정구 대감의 막내딸 조계진의 이야기는 이렇게 어머니의 쓸쓸한 말년에서 시작된다.

승동소학교, 경성여자보통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며 평범한 가정을 바랐던 소녀의 꿈은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과의 혼인으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조선의 비극과 중국으로의 망명, 한국의 독립 투쟁 등 그 장엄한 역사의 뒷길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투사들을 내조하며 가정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한 여성들의 희생이 있었다. 조계진 역시 낯선 이국땅에서 대륙의 모진 바람과 함께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다. 그 격동의 시간에 두 딸을 잃고 절망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조계진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아버지 조정구였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건져준 분은 뜻밖에도 친정아버지 조정구 대감이었다. 평소에는 엄격하고 대화하기조차 어려운 과묵한 분이셨지만 나의 절망을 어루만지고 나의 슬픔을 위로하는 힘이 되셨다. 나는 그때까지도 따듯한 부정(父情)이라는 게 있는 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슬픔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나를 건져주셨고, 나는 그 품에 흠뻑 빠져듦으로써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 _491쪽

 

저자는 한국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뒤에 가려진 어머니의 고단한 삶의 궤적을 정성스레 복원한다. 

그 글의 기저에는 조정구 대감을 향한 조계진 여사의 동경과 존경과 사랑이 고요한 사부곡(思父曲)이 되어 잔잔히 흐른다.

 

 

 

또 다른 주인공, 

조정구 대감과 이회영 선생

 

⦁조정구 대감

 

조정구는 광무황제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도 언제나 곁을 지킨 충신이었다. 조정구 일가의 충정은 황제가 내린 훈장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정구의 아들들은 헤이그 특사 파견과 관련해 어새 위조와 콜브란을 통한 비용 마련, 이용익 사망 후 특사 확정은 물론이고 황제가 유폐된 뒤에도 태황제(고종)의 독립 의지를 외부에 알리는 데 생사를 초월해 활동했다. 

조정구는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뒤, 귀족 칭호와 두둑한 은사금을 거부하며 죽음마저 택했다. 

 

10월 7일 일제는 고종의 매부이자 준왕족이고 의정부 찬정, 궁내부 대신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남작 작위와 은사금을 하사한다고 통보했다. 이를 두고 아버지는 “나를 욕되게 하는 짓”이라며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동봉해 온 합방 조서와 고유문을 찢어버리고 “살아서 욕되느니 죽어서 의를 찾자(不可辱而生 寧可義而死)”라는 유서를 남기고 뒷방에서 칼로 목을 찌르고 쓰러지셨다. 아버지를 모시려던 집사 김 서방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큰오빠는 피가 낭자한 아버지를 홑이불로 감싼 채 인력거로 대한의원으로 모시고 갔다. _205쪽

 

이뿐 아니다. 망명 생활을 하다가 병환 치료를 위해 1926년 귀국했을 때도 융희황제를 알현하고 마지막 유조(遺詔)를 받아 그해 7월 8일 자 미국의 교포 신문 ≪신한민보≫에 실리도록 했다.

 

지금 내가 경(조정구)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존경하는 나의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나라 선양(讓國)의 조칙은 장차 스스로 파기될 것이리라.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나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조정구에게 조칙을 내리다. _322~323쪽

 

 

⦁이회영 선생

 

이회영은 1901년 일어난 삼포(蔘圃) 사건을 계기로 광무황제를 알현한 뒤 민심을 소재를 살피는 별입시로 임명되어 활약했다. 1905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받은 광무황제는 1906년 연기된 만국평화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조남승에게 이상설과 이회영을 만나 은밀히 대책을 강구토록 했다. 지금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은 ‘헤이그 특사 신임장’은 신민회에서 전각에 일가견이 있는 이회영에게 전담하도록 했다. 

또한 이회영은 조계진의 오빠들과 함께 태황제(고종)의 망명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황제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의 시아버지는 풍운아였다. …… 그분은 독특하게도 무소유(無所有)를 당연하게 여겼고 불가능을 희망으로 생각하고 싸운 숨겨진 혁명 지도자였다. 그분은 자식보다 동지를 더 귀하게 생각했다. _491~492쪽

 

이 구절처럼 이회영의 마지막 행보는 동지를 위한 선택이었다. 중국 국민당의 이석증과 오치휘가 만주사변으로 진공 상태가 된 동삼성에서 중국 측 항일연군과 한국의 저항 세력이 협조 체제를 강화할 것을 아나키스트 측에 제안했다. 이회영은 동삼성 파견을 자원했다.

 

이번엔 추첨하지 말게나. 나에게 이 임무를 맡겨주기 바라네. 나는 그동안 젊은 동지들을 사지로 보내 많이 희생시켰네. 이제 내 나이 예순여섯, 살 만큼 살았네.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네. 다행히 그곳 지하에서 투쟁하고 있는 양세봉(梁世奉) 장군은 내 익히 알고, 또 중국의 당취오(唐聚五) 군과 연합해 관동군과 최후의 일전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나는 그곳 동지들과도 잘 지내왔고, 장기준(莊麒俊) 동지가 내 사위가 되어 활동하고 있으니 힘을 보탤 수 있을 걸세. _349쪽

 

검거 후 보잘것없는 유골함으로 돌아온 이회영의 죽음을 둘러싸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슴 아픈 가족사가 이어진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이 대목들은 독자들이 직접 찾아 읽어주기를 희망한다.

 

 

 

기억의 작은 조각들을 보는 서늘한 시각!

이중나선의 스토리, 동료 평가(peer review), 그리고 솔직함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중나선처럼 긴밀하게 엮인 가족사와 한국사가 절묘하게 교차하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책의 두께가 무색할 만큼 몰입감을 높인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역사적 인물에 대해 교과서적 평가가 아닌 당대의 맥락과 인식 속에서 내려진 당대인들의 평가, 즉 동료 평가(peer review)를 소개한다는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이 서늘한 시각은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으로, 책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인다.

 

이 책에도 일부 드러나 있지만 어머니는 자존심이 강했다. 거기에 친정과 시가 모두 독립운동하는 가문이었으니 명분과 소신에 대한 존중도 체화되어 공적인 인물들에 대해서는 평가가 아주 분명했다. 외사촌 올케인 순종비 윤씨를 일생 동안 면대하려 하지 않은 게 바로 그런 이유였다. 그 아비와 백부가 모두 ‘골수 친일 매국노’이고 그의 결혼 자체가 ‘정략적’인 것이었다면서 그들 모두를 경멸했다. _15쪽

 

그 무렵 아버지께서 특히 한탄하신 것은 왜놈의 농간에 놀아난 대원군의 어리석음이었다. 일생을 통해 민중전을 제거하지 못해 급급한 나머지 중국 힘도 빌리고, 또 일본 힘까지 빌려 민중전 제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러한 말년 모습은 추하기 짝이 없었다. _62쪽

 

서재필이 10여 년 만에 귀국하더니 미국인 아내를 데리고 완전히 미국인 티를 내면서 임금과 악수하자고 하고 맞담배질을 하는 꼴을 보고 아버지는 괘씸하게 여겼다. “나는 미국 시민이라 조선의 공직을 맡을 수 없습니다. 나를 외신(外臣)으로 대접해 주세요.” 이 말도 통역을 통해 임금께 진언했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다고 하니 이제 별꼴을 다 보는군, 퉤퉤.” _73쪽

 

주명은 여운형의 서거 후 그를 이렇게 평했다. “몽양은 결단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야! 공산당이란 구조에 묶여 사실 분도 아니었어.” “그분은 일생 동안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일을 벌였지만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자신과 가족만 풍비박산 냈습니다. 일생을 바쁘게 살다 가신 분이죠.” 하지만 나는 주명의 말에 한 가지 더 붙였다. “그런데도 몽양 선생은 유일하게 우당장의 고달픈 삶을 이해하는 분이셨어요. 그뿐 아니라 거침없는 우당장의 삶을 닮으려는 면도 있었어요. 임시정부가 필요하다고 처음에 주장했으면서도 그 틀에 갇히지 않고 틀 밖으로 나가 행동하는 것도 두 분이 같았어요.”_447~448쪽

 

성재장은 그런 광신 그룹의 무책임한 행동을 김구도 제어하기 어렵게 될 것으로 우려하면서 임시의정원이 발전해 결성된 국민의회의 요직에서 사임했다. 사실 김구 주석에 대한 불만이 컸다. 너무 단견이고, 목표도 전략도 없다고 보았다. 단순히 탁치 반대와 임정 세력을 동원해 정권 장악하는 일에만 의욕이 앞설 뿐, 나머지는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광적인 지지자들이 주변에 진을 치고 있고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해답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김구는 그런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_453~454쪽

 

마지막으로, 또 다른 이 책의 장점은 상황 앞에서 감정이나 소회를 숨기거나 꾸미지 않는 솔직함이다. 

 

친정에 편안하게 묵고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로부터 즉시 와서 일을 도우라는 명이 떨어졌다. …… 온 지 사흘이나 되었을까? 학진이가 밤새 열이 올랐다. 찬 수건으로 몸을 식혀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 학진이를 안쪽에 누이고 살피는데 내가 누운 옆자리의 을진이가 “제에이(姉)!”라고 언니를 부르며 나를 타고 넘어가 언니와 얼굴을 비볐다. 그날부터 을진이도 열이 올랐다. …… 오빠가 당도했을 때 이미 두 아이는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오빠는 나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지만 졸지에 두 아이를 다 잃었다. 나는 앞이 캄캄했다. 나도 졸도를 했는지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 송동댁이 전해주기를, 오빠가 나의 시어머니에게 “왜 시집으로 오라 해서 두 아이를 죽게 했습니까?”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홱 나가버렸다고 했다. _311쪽

 

불현듯 “지금 착한 애들은 어디로 갔지?” 생각이 나면 미칠 것 같았다. 서울에 도착한 지 석 달쯤 지났을까. 상해에서 주명이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사전에 알리지 못하고 피신한 것을 사과하면서 아이들이 모두 죽은 것을 비탄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원망이 불현듯 일어나 편지를 구겨서 내팽개쳤다. “비탄스럽다고? 내 마음, 이 고통을 알기나 하나? 말로만 비탄?” 화가 치밀었다. 얼마 후 다시 편지를 주워 펴보면서 다시 읽었다. “상해 생활이 외롭고 고통스럽다. 다시 상해에서 재출발하자”는 제안으로 편지의 끝을 맺었다. 나는 재출발할 마음이 없었다. _314~315쪽

 

나는 시아버지 우당장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분은 항상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한 뒤 행동하는 분이셨다.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면 이 방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 없애라.” 나는 그분의 명을 거슬러서라도, 그 남은 것들을 숨기고 감춰서라도 민족의 자산으로 지니고 살아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쉽게 타지 않은 전각이나 나무상자는 그래도 두었지만, 그 밖에 그리다 남겨둔 난화(蘭畵), 서류 뭉치, 몇 장 되지도 않는 사진들…. 몽땅 아궁이에 넣어 불살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남겼어야 할 아까운 자료들이었는데, 이제 와서 어찌하랴. _492쪽

496쪽에 달하는 이 책은 한국사의 주요 장면과 지은이 가문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수많은 일화, 그리고 조선의 비극을 담아낸 여러 자료와 사진으로 빼곡히 지면을 채운다. 이 모든 내용을 보도자료에 온전히 담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저, 어머니의 기억과 미수를 넘긴 저자의 모든 경험이 집약된 사모곡(思母曲) 󰡔나, 조계진󰡕을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유할 뿐이다.

목차

차례

 

제1부 나의 친정 이야기

01어머니의 쓸쓸한 마지막 날들

02어머니 덕에 공무원 생활한 아버지

03아버지, 정부 요직을 사양하다

04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05을미왜변과 고종의 아관이어

06러시아공사관에서 구상한 자주독립

07대한제국의 야심 찬 출범, 안타까운 실패

08대한제국의 마지막 길

제2부 항일 투쟁의 시작

01우당장 형제들, 새 시대를 향해 나서다

02을사늑약과 신민회

03을사늑약의 무효화 운동과 헤이그 특사 파견

04고종 황제의 지시로 조남승이 확보한 철상(鐵箱)

05경술국치와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

06나의 학창 생활

07나의 결혼, 그리고 고종 황제의 망명 계획

08신랑 이규학의 결혼 전 이야기

제3부 중국에서 보낸 나날들

01북경, 나의 첫 망명지

02우당장, 아나키즘을 선택하다

03북경에서의 고난

04상해에서 새출발!

05내가 아는 우당장의 마지막 날들

제4부 계속되는 삶, 마침내 광복을 보다

01비바람 속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02포석로 집에서의 새 생활

03귀국을 기다리는 사람들

04드디어 귀국

05해방 정국과 우리 집

06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계속되는 고난

07내가 겪은 6·25

 

이야기를 닫으며: 작은 이야기들 속에 담긴 큰 뜻

조계진(趙季珍) 여사 연보

 

본문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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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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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이종찬
1936년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이규학·조계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독립운동가였을 뿐 아니라 친가와 외가가 모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귀국해서는 서울창신초등학교(제32회), 경기중·고교(제52회), 육군사관학교(제16기)를 졸업했다. 군문에서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고, 주영대사관 참사관,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제11~14대 국회의원(서울 종로)을 역임했다.
그 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 나라 헌정사상 첫 여야 간 정권 교체를 이루는 데에 일익을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국가정보원장 등의 직책을 수행했다.
20년에 걸친 정치 활동을 마감한 뒤에는 회고록 등 각종 저술 활동을 통해 우리 역사의 광정과 현실 정치의 개혁을 역설해 왔으며,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직을 맡아 이 기념관이 의미 있는 장소로 지어지도록 진력했다. 2023년 민족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마음가짐으로 광복회장에 취임했다.
회고록 󰡔숲은 고요하지 않다󰡕(2015년)을 비롯해 󰡔세계로 가는 길목을 잡아라󰡕(2002년), 󰡔개혁과 온건주의󰡕(1987년)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필생의 작업으로 ‘아들이 쓰는 어머니의 자서전(子敍傳)’을 기획해 수년간 집필해 왔으며, 그 결실로 이 책 󰡔나, 조계진󰡕을 세상에 내놓는다.
구한말부터 대한민국에 이르는 이 대하 실록에서 한 여인과 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근현대사와 앞으로 다시 함께 일구어가야 할 우리 공동체 미래의 모습을 찾아보자는 것이 미수(米壽)를 넘긴 지은이의 생각이다.
한울엠플러스(주)는 1980년에 도서출판 한울이란 사명으로 설립되어 2015년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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