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결국 수술이 결정되던 날, 아빠는 환자식을 먹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암 환자냐?” 나는 그때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전장에서 기습 공격을 당한 기분이 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럼 암 환자 맞지 뭐. 왜?”라고 도리 없이 수긍했다. 그때 아빠가 한 말이 나를 웃게 했다. “아니 그럼, 이제 평생 술도 못 마시나 싶어서. 그럼 무슨 재미로 사냐.”
아빠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일흔일곱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그동안 자식을 키우고 부모를 돌보고 몇 해 전 어머니상을 치렀다. 큰 숙제를 끝낸 아빠는 이제 명절 때도 휴가 때도 고향에 안 내려가도 된다면서 가까운 곳에 주말농장을 꾸리고 작은 집을 지었다. 아빠는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집을 지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성으로 농작물을 키워서 딱 한 번 거둬 봤는데 암이 생겼다. 그때 나도 작가와 같은 생각을 했다. 아빠의 마지막에 이런 게 나타나다니. 암이라는 중병이 아빠의 마지막을 엉망으로 만들까 봐 노심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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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어머니(시어머니)의 대소변을 처리해야 했을 때, 당혹스러웠다. 어머니의 치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 그걸 정신이 온전한 어머니 앞에서 해내야 한다는 것이, 기어이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슬프고 아팠다. 그것은 미처 준비되기 전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어서 위생장갑이라거나 물티슈 같은 준비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허둥지둥 옆 침대의 간병인께 이것저것 빌리고 어마어마한 휴지를 쓰면서 다행히 무사히 그 일을 해냈고,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 왜 그러시냐고, 그런 말 하시지 말라고, 이말 저말 아무 말을 하면서 세탁물 처리실로 도망쳤다. 눈물과 표정을 수습하고 어머니 곁에 돌아와 태연한 척 간이침대에 앉았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 밤에 죽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 한마디 말에서 어머니의 곤혹과 수치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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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어머니 나이 91세. 혼자서는 거동이 어려운 상태.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숨을 제대로 못 쉬어 정신이 혼미했고 잇몸은 퉁퉁 부어 귤 한 쪽을 수십 번 씹어 넘겨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은 것은 싫은 것이고 창피한 것은 창피한 것이어서, 젊은 며느리에게 본인의 항문을 닦게 하는 것은 못 할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얼마 전 입소한 요양병원이 ‘아주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정 부분 진실일 거다. 아프면 바로 진통제를 놓아 주는 의사가 한 건물에 있고, 깊은 밤 숨이 차오를 때 두려움과 고통 속에 구급차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본인의 노쇠한 몸을 가족이 아닌 간병인이 씻기고 입히고 닦아준다. 그것은 서글프지만 왠지 마음이 놓이기도 하는 일이었다. 가족이 아니고 남이어서 다행이다, 그런 기분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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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어머니는 92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정신이 매우 맑았다. 마지막 일주일 정도는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했지만, 그래도 사이사이 가끔 이야기를 하고 사람도 알아봤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까지는 온전히 정신이 맑았다는 이야기다. 정신이 맑은 만큼 어머니는 질병과 노화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아마 어머니는 사람이 쓸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진통제를 경험해 봤을 것이다. 어땠을까. 그리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결정적 계기가 된 낙상 사고도, 기저귀를 못 받아들이고 직접 화장실에 가려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맨정신으로 끝까지 버티다가 떠나신 것, 그것에 대해 나는 다행한 마음보다 안타까움이 더 컸다. 적당히, 적당히 좀 정신이 덜 맑아야 아픈 것도 덜하고 수치심도 덜하고 분노도 덜한 것 아닐까.
나는 끝까지 맑았던 어머니의 정신이 야속했다. 그리고 종종 생각했다. 적당히 노인성 치매가 좀 왔었더라면, 그랬다면 어머니가 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치매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바랐던 것, ‘적당한 치매’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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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 시어머니가 혼자 사는 집에 처음 방문했던 날, 나는 낮은 세계를 만난 기분이었다. 허리와 다리가 많이 아파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게 힘든 어머니는 모든 집기를 바닥에 놓고 쓰셨다. 밥통도 바닥에 가스레인지도 바닥에 커피믹스 박스도 바닥에. 냉장고도 제일 아래 칸 위주로 자주 쓰는 양념과 재료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동을 무릎걸음으로 했다.
집에 가 보지 않았다면 나는 어머니의 허리와 다리 통증의 강도를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무릎에 멍이 들어있는지도. 왕진 의사에게도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환자의 삶과 질병과 고통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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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얼마 전 수술을 받았다. 절대 가벼운 수술이 아니었는데,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했던 덕분에 아빠는 수술을 잘 받고 회복 중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 가족의 화양연화는 지나갔구나. 우리 가족의 호시절은 이제 과거가 되었구나. 아빠는 올해 77세가 되었고 여전히 일을 하는데, 이번 수술 때문에 회사에 병가를 냈다. 조금 더 쉬거나 이번 기회에 일을 정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하는 나에게 아빠는 말한다. “쉬면 또 뭐하냐?”
아빠 인생은 칠십 평생 너무나도 회사원이었다. 아빠의 딸답게 사십 평생 너무나도 회사원인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았다. “그치, 쉬면 또 뭐해. 그냥 다녀.”
50년 넘게 회사에 다니는 아빠와 20년 넘게 회사에 다니는 딸은 생각의 폭이 좁아 일이 나를 살게 했다고 너무도 쉽게 인정해 버렸다. 일 안 하면 또 뭐 할 거냐고. 태어나서 한 번도 일을 안 하고 산 적이 없을뿐더러 일을 안 하고 사는 삶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우리는 함께 나란히 오랫동안 회사원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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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내 외할머니가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외할머니 나이는 61세였다.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서울 어디 큰 병원에 입원한 외할머니에게 무언갈 가지고 심부름을 갔는데, 침대 발치에 나이가 쓰여 있었다. 이매실 / 여/ 61세.
나는 외할머니의 이름이 참 예쁘다는 생각만 했지, 나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할머니는 참 이른 나이에 병원 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이어진 투병 생활은 정말 지난했다. 외할머니는 장기 입원을 주기적으로 반복했고, 마지막 3~4년은 요양병원에서 지내다가 8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예순이 넘은 후의 생 중 많은 날들 동안, 외할머니는 병상에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지극 정성으로 외할머니를 보살폈다.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소한 후로는 병원으로 거의 매일 출퇴근했고, 할머니는 끝까지 본인이 돌볼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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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침묵을 나는 진짜 침묵이라고만 생각했다. 듣고 있지만 의견을 내지 않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빠는 점점 청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건 엄마의 제보로 알게 되었다.
“못 들은 거야.”
내가 지난번에 뭔가 말했을 때 아빠는 아무 말 안 했으니 동의한 거 아니었어? 라고 물었는데, 엄마가 이렇게 실토했다. 그냥 못 들은 거라고. 나는 세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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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요양병원을 집처럼 여겼고, 종합병원에 장기간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다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요양병원 의료진과 환자들을 다시 만나는 날이면 어머니의 얼굴엔 반가움의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가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시는 거 있지? 좀 서운하더라.”
그것은 병원 살이에 동행한 딸이 서운해할 정도의 반색이었다. 요양병원의 같은 병실 환자들은 보통 어머니와 같은 연배였다. 위로 아래로 서너 살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그쯤이면 비슷한 나이였다. 같은 연배, 같은 또래. 또래 집단이 주는 안정감이란, 비단 아동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또래가 모여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비로소 편안해 하고 불안함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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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성정이 불같아서 말년에 꽤 자주 발작인지 쇼크인지 모를 신체적 위기가 오곤 했다. 아마 본인의 화를 못 이겨 혈압이 치솟고 불안증이 신체화했던 것 같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어서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과 함께 있는데 과거 이야기를 하다가 쇼크가 오고야 말았다. 힘들었던 시절을 말하다가 인생 설움이 복받친 것 같다. 곧 죽을 것 같은 어머니에 놀라서 자식들은 구급차를 불렀고, 가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구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숨이 꼴딱 넘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그때, 구급대원이 말했다.
“내비 두씨오. 할 만큼 해야 끝나더라고. 이제 곧 괜찮아질 것이오.”
119 구급대원들은 할머니의 쇼크를 꽤 여러 번 본 것이다. 그들은 그때마다 어두운 시골길을 달려 할머니에게 와 주었고, 병원에 가는 동안 할머니의 넋두리인지 헛소리인지 모를 말들을 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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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우리는 너무 무지했다. 90의 나이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결코 이른 나이가 아니다. 어머니가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기에 그랬다고 말하기에도, 매우 많이 민망하다. 어머니 나이는 그런 낙관이 적합하지도 어울리지도 않은 나이였다. 나중에 시누이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그 이야기를 했다. 그냥 남편과 나는 그때 너무 놀랐다고, 그런 질문을 받은 것이 너무 느닷없었다고, 푸념이나 하려는 참이었다. 한데 시누이는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걸 물었어? 근데 그건, 아들들이 결정해야지.”
아마 시누이는 본인이 그 당시 그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와 15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시누이에게 집안의 중대 결정은 당연히 남자, 아들의 몫이다. 어머니의 연명치료를 결정하는 것은 집안의 중대사이고, 그러므로 아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했으므로 특별하지 않은 일이고 그러므로 기억에 남을 만한 에피소드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누이의 말을 들었을 때 뭔가 방향이 맞지 않는 대답을 들은 듯했고 그래서 그날의 대화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사실 나는 당시에 질문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한 상태였다. 구급대원은 만약의 경우를 위한 의례적인 질문을 한 것이었을 텐데, 혹시나 해서 물은 질문에 이렇게 무겁게 답하다니 왜 이럴까. 나는 시누이의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깜짝 놀랐겠네.’ 정도의 공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은 들었다. 어머니의 선택도 아니고 아들들의 선택이라니. 너무나도 가부장적인 생각 아닌가. 우리에게 그런 결정권이 있나? 자식에게 부모의 생사를 선택할 권한이 있나? 그것부터가 의문인데, 아들이라니. 나는 일단 그 정도만 생각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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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식사를 안 하실까요?”
의료진도 간병인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어쨌든 억지로 먹일 수는 없으니 좀 더 지켜보자고 하면서. 나는 갑자기 매우 서러워졌고, 어머니에게 가서 물었다. “어머니, 왜 식사를 안 하세요.” 어머니는 그저, “먹기 싫고 귀찮아서”라고 했다. 사실 어머니는 숟가락을 들기는커녕 눈 뜰 기력도 없어 보이는 상태였다.
나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에 시위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앉을 수도 일어날 수도 없이 침대에 갇혀 버린, 이렇게 되어 버린 자기 인생에 대한 시위. 그러나 곧 시위를 중단하고, 다시 식사를 하게 될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일주일 후부터는 아예 뉴케어도 끊고, 물만 마시기 시작했다. 물 외에 다른 액체는 절대 마시지 않았다. 그때쯤 작가의 친구는 그런 말을 한다. 부모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 같다고. 우리는 자라면서 그리고 성인으로 살면서 부모가 자기를 잘 모른다고 씁쓸해한다. 하지만 자식 또한 부모를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어느 순간 부모가 낯설어지는 시점이 우리 모두에게 온다. 그리고 낯설어지는 지점에서 우리는 조금 늦게 서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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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누이들이 집을 1차로 정리했다. 쓸 만한 가전제품은 필요한 사람이 나눠 갖고, 쓸 만하지는 않지만 꼭 남겨 놓고 싶은 물건은 원하는 사람이 가져갔다. 그리고 버릴 일만 남은 것들은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가족의 지인 중 마침 버려진 집, 이제 사람이 살지 않을 집을 정리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수월했다. 그리고 사진이 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거실과 방과 화장실 사진. 물론 평생을 비우고 버리고 안 사고 지낸 시어머니 집에는 살림이라 할 것이 거의 없었다. 정리하기 전과 정리한 후의 사진이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 나는 이용료를 입금했다.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이 그냥 끝나 버렸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정리했으니 이것은 유품정리와는 의미가 조금 다를 것이다. 유품이란 돌아가신 분이 남기고 간 물건이므로. 하지만 장차 유품이 될 물건들을 미리 정리하면서 우리는 어머니의 평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미리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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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공간은 그렇게 사라졌고 어머니는 그 이후 한 번도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통증 관리가 안 되고 종종 긴박한 상황이 되어서 병원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소리로라도 ‘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은,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어머니의 집을 너무 빨리 정리해 버린 것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가 너무 가혹했던 게 아닐까. 내 집이 없어진 것은 어떤 느낌일까. 무엇보다 내가 잠을 자던 베개, 내가 밥을 먹던 탁자, 내가 계절마다 찾아 신던 신발 그런 것들이 이제 없는 기분이란 어떨까. 집을 정리한 것은 몸이 나아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또 다른 상실감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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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들은 충돌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충돌하는 마음들을 봤다. 장남과 차남이 충돌하고 며느리와 딸이 충돌한다. 조카와 삼촌이 충돌하고 어머니와 며느리가 충돌한다. 그리고 부부가 충돌한다. 도대체 돌봄이 뭐길래, 가족이 뭐길래 이렇게 많은 마음들이 갈등할까. 가족 간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기저하므로 사랑에 기반한 갈등은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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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노년에 들어섰다면, 사후(死後)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나는 죽고 없어지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또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것이고 죽은 나는 그들에게 얼마간 영향력이 있다. 나의 장례와 나의 유골이 그렇다.
내가 살면서 만들어 준 기억이나 추억은 당연할 테고. 길어야 한 세대 정도겠지만 나는 내가 애정을 가졌던 이들에게 좋은 결말을 만들어 주고 싶다. 죽은 나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어서도 내가 사랑한 이들을 보듬어 주고 싶은 바람이다. 그게 사람의 마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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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남편이 시골집과 연애를 하는 것만 같다는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 아빠에 대해 생각했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꿈꾸는 낭만가 정도는 되는 우리 아빠는, 오늘도 주말농장에서 사각사각 일기를 쓴다.
4월 셋째 주 토요일. 달이 너무 밝아서.
5월 첫째 주 주말. 외가 집들이 여덟 명.
5월 15일. 비료 두 봉지, 윗집 할아버지가.
아빠의 일기를 주기적으로 몰래 읽는 나는 ‘달이 너무 밝아서’라는 메모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빠가 너무 사랑스럽고 낭만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랬다. 어느 날은 술 한잔하는 감흥을 적고 어느 날은 그냥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또 어느 날은 이웃에게 받은 환대를 적는다. 받은 환대는 곱절로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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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을 준비 또는 대비해야 한다고 많은 중년들이 말한다. 이제 자식은 훨훨 날려 보내야 하고, 자식이 옆에 없어도 혼자 잘 놀아야 한다고. 그러니 혼자 잘 놀 수 있게 지금부터 취미를 만들고 준비해야 한다고. 그게 자식을 위한 일이라고. 그런데 똑같은 말을 뒤집어 말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아빠가, 너 없이 너무 행복하게 잘 살아서 미안하다.’
이렇게 선수를 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유쾌하고 통쾌하다.
‘나, 이런 노인이야.’
같은 말이지만 진짜 진짜 있어 보인다. 그렇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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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내 장래 희망은 세 보이는 할머니다.
귀여운 할머니도 좋고 우아한 할머니도 좋지만 나는 세 보이는 할머니도 아주 좋다. 예쁘고 우아한 거 말고 노년에는 강한 거 하고 싶다. 고집불통 노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 있고 지성 있고 당당하므로 강하고 센 노인, 꿈꾸기에 딱 좋은 노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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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내가 겪은 감정은 그리움이 아니라 우울함이었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고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은 그런 감정까지는 차마 도달하지도 못했다. 그냥 나는 뭘 해도 신이 나지 않았다. 나는 원래 평소에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인데, 어느 것에도 기운이 솟지 않았고 동시에 어디에라도 화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알았다. 이게 바로 슬픔이구나.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해서 그리워하지 못할 뿐 머리는 어머니가 없어진 것을 알고 있으므로 우울하고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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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부모를 번갈아 돌보느라 힘든 작가에게, 어느 날 동생이 말한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이더라도 결말이 어떠한지는 알지 않느냐고. 작가도 안다. 그렇기에 “돌봄의 결말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 돌봄의 결말은 큰 슬픔이라는 것”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자식 돌봄의 결말은 ‘자유’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 있다. 이것저것 마음을 접고 접어, 몇 가지의 쓸쓸함과 슬픔들을 외면한다면, 중장년의 외로움을 자유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 돌봄의 결말은 포장이 어렵다. 그것은 그냥 슬픔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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