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하…….’
태하가 저곳에 있다. 발개진 얼굴로, 또렷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도 태하는 공에만 집중한다. 그 빛나는 눈동자를 나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너무 반짝거려서 마치 운동장에 누군가 흘리고 간 두 개의 보석 같았다. 9~10쪽
그때부터였다. 자꾸만 시계를 보게 되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게 됐다. 혹시라도 또 메시지가 오면 어쩌지? 별일 아니니까 공원으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어쩌지? 그럼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질 것만 같았다. 문제집 속 숫자가 꾸물꾸물 바뀌어 태하와의 약속 시간을 가리켰다. 글자는 흐물흐물해지더니 태하가 보낸 메시지가 되었다.
공원으로 잠깐 올 수 있을까, 공원으로 잠깐 올 수 있을까, 공원으로, 공원으로, 공원으로……. 37쪽
“그래서 사귀기로 했어?”
“고민 중.”
“우리 바름이가 고민이 정말 많구나. 근데 너무 안 그래도 돼. 요즘은 다 사귀고 보는 거야. 열세 살인데 아직까지 한 번도 안 사귀는 게 이상한 거지.”
옆에서 듣던 정아가 “말도 안 돼.” 하고 반감을 드러냈지만, 다미는 오직 나에게만 집중했다.
“연애 한번 못 해 보고 졸업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53쪽
태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추천해 주는 책마다 스르륵 페이지만 넘기고, 그림만 좀 보다가 내려놓았다. 내가 첫 페이지 정도는 읽어 보라고 하자, 그제야 조금 들고 있는 것 같다가도 금세 내려놓기 일쑤였다. 열심히 골라 주면 골라 줄수록 태하의 책에 대한 관심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바름아,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카페 가서 케이크 먹을래?”라
고 했다. “뭐? 갑자기?” 84쪽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자, 놀랍게도 시집 한 권이 들어 있었다. 태하와 시집. 어딘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린다. 책 표지도 예쁜 수채화 그림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표지를 열어 보는데 무언가 하얀 쪽지가 툭 떨어졌다.
‘뭐지?’
쪽지를 주워 열어 보니, ‘너를 좋아하면서 더 나은 내가 된 것 같아.’ 그 순간, 일시 정지가 된 것처럼 굳어 버렸다. 한 십 초쯤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그사이 내 얼굴은 엄청 빨개졌을 거다. 나는 가만히 책을 내려놓고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꺄악! 107쪽
바름이와 손끝이 살짝 스쳤을 때는, 두근거렸다. 그때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높은 놀이기구를 탄대도 그때 그 기분에 비할 수는 없을 거다. 솔직히 말하면, 손잡고 싶다. 아주 조금.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그래, 많이 잡고 싶다. 다른 애들도 다 잡으니까. 하지만! 바름이는 다른 애들과 다르다. 바름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다. 아쉬워도 태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게 바름이를 향한 태하의 진심이었다. 149~150쪽
“무슨 소리야? 태하랑 나는 진심이야!” 나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정아는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말을 했다.
“해진이가 그러던데. 태하가 너한테 고백한 거, 그거 내기였대. 너한테 고백할 수 있는지 애들이랑 내기한 거라고…….”183쪽
나는 태하가 내기로 고백한 것도 모르고 있었는걸. 그리고 그걸 알게 되어도 헤어지자 말자 똑 부러지게 말하지도 못하고……. 내 연애는 정말 엉망이었어. 이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202쪽
사랑의 모습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그 말이 좀 멋졌다. ‘누가 뭘 어떻게 했다더라.’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사랑할 거냐’다.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대할 거냐. 거기엔 어떻게 이별할 거냐는 질문까지 포함된 것 같았다. 무심코 태하를 보았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태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