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평면표지(2D 앞표지)
입체표지(3D 표지)
2D 뒤표지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 ISBN-13
    979-11-93482-12-4 (03300)
  • 출판사 / 임프린트
    도서출판갈라파고스 / 도서출판갈라파고스
  • 정가
    18,5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5-06-20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오가와 사야카
  • 번역
    지비원
  • 메인주제어
    사회학 및 인류학
  • 추가주제어
    사회, 문화: 일반 , 인류학 , 사회, 문화인류학
  • 키워드
    #사회학 및 인류학 #청킹맨션 #커먼즈 #공유경제 #홍콩 #탄자니아 #비공식경제 #인문학 #공존 #사회, 문화: 일반 #인류학 #사회, 문화인류학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30 * 195 mm, 296 Page

책소개

세상의 어떤 인간도 신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믿지 않아도 연결되는 사회’를 향한 인류학적 상상! 일본 논픽션계의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이라 불리는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과 명성 높은 가와이 하야오 학예상을 동시 수상하여 큰 화제를 부른 인류학 명저. 일본에서 17쇄 넘게 증쇄를 거듭하며 ‘새로운 인류학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78년생 문화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는 23세부터 탄자니아를 드나들며 스와힐리어를 익히고 길거리 상인들에게서 중고옷 파는 장사를 배운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홍콩의 청킹맨션에 체류하던 도중에 자칭 타칭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를 만나게 되면서 수상쩍은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청킹맨션 주민들의 일과 놀이를 참여 관찰하게 된다. 

 

홍콩의 ‘마굴’, 비공식 경제, 아프리카계 브로커들, 무정부적 시장, SNS를 활용한 상거래, 밤 문화, 지하 은행 등, 이 책은 독자의 호기심과 눈을 사로잡는 키워드들로 가득하다. 청킹맨션이라는 중간지대를 바탕으로 호혜, 증여, 분배, 공유경제, 커먼즈, 나아가 삶의 본질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파헤치며 고정관념을 뒤엎어, 일본에서 출간 직후부터 “이런 인류학도 있구나”, “압도적으로 재밌다”라는 반응과 함께 수많은 매체의 주목을 받아왔다.

 

수없이 배신을 경험한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와 탄자니아인 주민들은 “세상의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아무도 배제당하지 않고, 그 무엇이든 공유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고 있었다. 저자가 목격한, ‘아무도 신용하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커먼즈적 삶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제도에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인간들이 끝없이 확장되는 네트워크 속에서 찾아낸 공존의 회로를 엿볼 수 있다.

 

목차

-추천의 말/ 한디디(『커먼즈란 무엇인가』 저자)

 

-서장

‘보스’와의 만남 | 청킹맨션의 보스와 만나다 | 빅 브러더이지만 덜 된 인간 | 국경을 초월하는 비공식 비즈니스와 열린 호수성

 

-제1장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들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의 생활사 | 천연석 장사에서 중고차 장사로의 전환 | 사려 깊은 무관심

 

-제2장 ‘겸사겸사’가 구축하는 안전망: ‘플랫폼’으로서의 탄자니아 홍콩조합

홍콩에서 커뮤니티를 구축하기 | 탄자니아 홍콩조합의 결성 |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불행이 생겼을 때 서로 돕는다는 것 | 유동적인 멤버십이 살아 있는 조합 운영 | ‘무리하지 않음’을 기준으로 삼기 | ‘겸사겸사’의 논리

 

-제3장 홍콩 브로커의 일

거래 상대가 나를 그리워할 때 만나러 가기 | 카라마를 전속 에이전트로 삼고 싶어 하는 파키스탄계 업자 | 홍콩의 업자와 아프리카계 브로커의 관계 | 중고차 대량 매입 투어 | 아바시와 사미르의 홍콩 쇼핑 내역 | 브로커라는 직업 | 브로커는 브로커를 의지한다 | 고객=친구 네트워크를 침범하지 않기

 

-제4장 공유경제를 지탱하는 TRUST: ‘그 사람다움’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SNS를 활용하는 자생적인 경매 | 협동형 커먼즈로서의 TRUST | ‘안전망’으로서의 TRUST | 가장 큰 즐거움은 인스타그램의 라이브 방송 | ‘신용’의 결여와 ‘신뢰’의 창출을 담당하는 SNS 활동 | 전문적인 경제 플랫폼이 아니라는 점의 의의 | ‘놀이’와 ‘일’의 순서

 

-제5장 배신과 도움 사이에서: 성공하는 사람, 전락하는 사람

휴대폰 비즈니스로 성공한 사람 | ‘배신당한’ 천연석 수입상 | ‘수감된’ 의류 교역인 | 동료와 살아간다는 것과 독립독행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틈새에서

 

-제6장 사랑과 우정의 비결은 돈벌이

서류상의 아내와 서류상의 남편 | 홍콩의 밤 문화 | 슈거 마미와 키벤텐 | 언제든 돌아갈 수 있기에 돌아가지 않아 | 홍콩 생활 속에 내장된, 모국에 대한 투자 | 요청을 받고 비로소 결심하는 날이 온다면 | 돈벌이와 인생의 즐거움

 

-최종장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융통성’ 있는 청킹맨션에서의 생활 | 자신과 타자의 ‘겸사겸사’를 잘 길들이기 | ‘낭비’와 ‘대단치 않음’의 의미 | 노는 것이 일 | 실제 인생과 ‘일시적인 나’ | 사랑받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

 

-마치며

본문인용

이때 트위드 재킷을 입고 사냥 모자를 쓴 아프리카계 중년 남성이 지나갔다. 같이 마시던 한 나이지리아인이 “어이, 카라마” 하고 그를 불러세우더니 “이 여자가 스와힐리어를 할 줄 아는 것 같은데 시험 삼아 무슨 얘기라도 해봐”라고 말을 건넸다. 내가 스와힐리어로 인사하자 그는 “나는 미스터 카라마. 청킹맨션의 보스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오, 정말 스와힐리어를 할 줄 알아”라면서 놀리려던 나이지리아인에게는 “세계는 넓어. 이런 아시아인도 있는 거야”라고 받아넘기며 곧 자리를 떴다. 나중에 카라마는 “사야카가 처음에 나를 알게 된 게 정말 행운이었어”라고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그 말대로다. 이날 카라마와의 만남을 계기로 나는 홍콩과 중국에 거주하는 탄자니아인들의 장사와 동료들 사이의 일상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20쪽

 

선진국의 우리는 산다는 것과 경제가 격리되어 있는 듯한, 거대한 허구의 세계 시스템에 우리를 맞추며 살아가는 것 같다. ‘현대스러움’과 근원적인 경제의 논리가 인류사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미래 인류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이들, 공유·연결·특이점·기본 소득에 관심을 두는 모든 이에게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들은 ‘아무도 신용하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호수성을 기반으로 한 사업 모델과 생활 보장 구조를 동시에 구축하고 있다. 

-31쪽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들은 늘 “아무도 믿지 않아”라고 단언한다. 이는 ‘본성’,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사업’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 누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인다. 카라마와 동료들은 “저 사람은 지금 잘나가니까 돈을 빌려줘도 괜찮아”, “저 사람은 지금 수입한 천연석 품질이 나빠서 크게 손해를 보고 있으니까 조금 주의하는 게 좋아”, “저 사람의 연인도 함께한다면 그는 좋은 녀석이니까 놀러 가”라고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형태로만 타자를 평가한다. 언뜻 냉정하게도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관용과도 표리일체다. 즉, ‘페르소나’와 그 뒷면에는 ‘민낯’이 있는데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自己) 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91~92쪽

 

어느 날 카라마가 내게 물었다. “사야카, 사기를 당했을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정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내가 “음… 경찰이나 변호사?” 하고 대답하자 “아니지. 그야 사기꾼의 친구인 게 당연하잖아. 누가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모르는 거야. 왜냐하면 미래는 아무도 모르거든. 성공한다면 대기업 경영자인 동료가 중요해질 수 있어. 하지만 체포당하면 수감자인 동료가 중요해지는 법이야. 일본에 가는 날이 온다면 일본인인 사야카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겠지만, 어쩌면 태국에 가게 될지도 모르지. 중요한 것은 동료의 숫자가 아냐. [유형이 다른] 이런저런 동료가 있는지야”라고 말한다.

이처럼 타자의 ‘사정’에 개입하지 않고, 구성원 사이의 엄밀한 호수성이나 의무와 책임도 불문한 채, 무수히 확대 증식하는 네트워크 내 사람들이 각자 ‘겸사겸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열린 호수성’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이들은 부담 없는 ‘서로 돕기’를 촉진하고 국경을 초월하는 거대한 안전망(safety net)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96~97쪽

 

돌아오는 길에 “성실하게 일하는 게 아니었어요? 이스마일에게 가면 차 판매를 잔뜩 맡아서 그만큼 수수료를 벌 수 있잖아요? 왜 매일 가지 않는 거예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카라마는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했다.

“매일 이스마일을 만나러 가면 그는 나를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거야. 이스마일이 화를 낸다고 그의 말에 따르는 태도를 보이면 나를 자기 직원처럼 취급하겠지. 나는 파키스탄인과 수년 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이건 예측이 아니라 사실이야. 만약 이스마일에게 고용되면 이스마일만 돈을 벌고 나는 그의 돈벌이를 위해 일을 하게 돼. 우리 아프리카인이 홍콩의 업자들과 대등하게 비즈니스를 하려면 그들이 나를 그리워할 무렵에 가는 게 딱 좋아.”

-107~108쪽

 

나아가 TRUST가 공식 중고 거래/경매 사이트와 다른 발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TRUST가 ‘신용할 수 있는 브로커/고객’과 ‘신용할 수 없는 브로커/고객’을 점차 가려내는 플랫폼이 아니라는 점이다. TRUST에는 변함없이 누구나 신용할 수 있고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세계·인간관이 유지되고 있고, 거래 실적이나 자본 규모, 과거의 실패나 배신과도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기회가 돌아간다. TRUST에 참여하는 브로커 사이의 ‘불신’과 ‘신뢰’의 균형은 카라마나 동료들이 매일 보여주는 (솔직히 말해 조금도 재미가 없는) 웃긴 동영상이나 그들이 빈번히 나와 찍고 싶어 하는 ‘기념 사진’, 택시 운전기사까지 끌어들이는 라이브 방송, 나아가 ‘상업적 여행자’와 함께 ‘겸사겸사’ 행하는 매일의 상호 부조와 조합 활동과 연동하면서 창출되고 있다.

-157~158쪽

 

지금까지 이야기했듯이 애당초 이들은 타자의 과거나 현재 상황을 속속들이 알려 하지 않으며, 인간은 언제나 변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삼으면서 그때그때의 상황과 문맥에 따라 한정적인 신뢰를 구축하고 있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도리어 인간미 없어 보이지만, 그때그때의 재정적인 여유, 개인의 지위·신분은 그 인물이 ‘이 정도의 이익을 위해서 배신하지는 않겠지’라는 기대를 높이는 효과가 있는 근거다. 물론 부자가 좋은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가정이 전혀 옳지 않다는 사실은 이들도 잘 알고 있다.

-166~167쪽

 

남자가 가버리자 체스터는 “저 사람은 알코올 의존증이야.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몇 살인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아무것도 몰라. 돈을 많이 주면 (술값으로 써버려서) 그의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것만은 알고 있지”라고 설명했다. 내가 놀라며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런데도 매일 100위안씩 줘요?”라고 되묻자 “의존증인 걸 알기 전에는 매일 200위안씩 줬어”라고 담담하게 답했다. 내가 더욱 놀란 얼굴을 하자 “사야카, 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주는 거야. 지인이었으면 하루 종일 감시하면서 돌봐줄 거거든”이라고 하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241~242쪽

 

박사 과정 시절에 조사한 탄자니아의 영세 상인들도, 홍콩의 탄자니아인들도 다들 “인생은 여행이다(maisha ni safari)”라고 말한다. 여행이라고 하면 여행의 끝이 걱정된다. 나는 이들이 현재의 연장선상으로 단선적인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것도, ‘퇴직’이나 ‘노후’라는 명확한 인생의 단락을 의식하지 않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하며 이를 전제로 이야기해왔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반드시 스스로의 인생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각각의 종착역에 다다를 것이라고 상상하면 나는 좀처럼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나는 홍콩에서의 불안정한 신분, 한번 성공을 거머쥐었더라도 약간의 불운이나 방심으로 롤러코스터처럼 추락할 수 있는 삶은 목적지에 이르는 여행의 과정일 뿐이라는 믿음에 금방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매일의 생활 자체에 실현해야만 할 즐거움이 묻혀 있다면 일생을 그저 여행으로 끝낸들 무슨 문제가 있을까.

-244쪽

 

단,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타자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쾌락, 타자를 기쁘게 해주는 쾌락을 곧이곧대로 표현하거나 추구하는 것에 나는 늘 회의적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회의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자발적인 도움을 계속 촉진하며 누구에게도 과도한 부담을 부여하지 않는 교역의 구조와 ‘겸사겸사’를 조직하는 플랫폼형 조합 활동에 대해, 또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남녀 사이의 서로 돕기에 대해 기술해왔다. 이들이 대범하게 “그야 내가 청킹맨션의 보스이니까”라는 식으로 표명하며 많은 사람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도 불쾌하지 않고 오만함도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 이들이 ‘보스가 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장사꾼이고, 공식적으로 표명한 목표는 어디까지나 ‘돈벌이’이며 보스가 되려 한다든가 선한 사람이 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좋아할 수 있게 된다.

-248쪽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안심’, ‘안전’을 부르짖으며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준다는 확약 없이는 줄 수 없는’ 사회적 관습을 강화하고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즉시 청산하려는 태도를 낳는다. 문자메시지도 친절도 곧바로 답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빚을 남겨두는 것이 걱정이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내가 준 것과 상대방이 준 것이 등가인지, 매 순간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셈해서 딱 맞아떨어지는지 신경 쓰인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면 선순환의 상호성은 손쉽게 악순환의 상호성으로 전화(轉化)한다. 현대 일본에서 ‘나만 애쓰고 있다’, ‘나만 손해를 보고 있다’는 불만과 이것이 낳는 두려움(예를 들면 혐오 발언)이, 친구나 부부 사이 등과 같은 인간관계를 맺기 성가시다는 감각부터 연금, 기초생활보장 등의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앙스파크는 이러한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려면 누군가가 자기희생을 해서 선순환 안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누그러뜨릴 수 없는 사람에게는 위험한 정신론이 될 수 있으며 전체주의와 연결될 위험성도 있다.

-259~260쪽

 

타자는 자신에게 어려운 상담은 듣고 깨끗이 흘려버리고, 자신의 형편에 따라 약속을 파기한다. 조합 참여 활동이나 기부금도 사실 아무도 관리하지 않으며, 일을 하느라 참여할 수 없거나 금전적인 여유가 없다면 공헌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유동적으로 돌아다니며 각자의 인생을 찾을 수밖에 없는, 독립독행으로 살아가는 타자에게 자신의 요망을 들어 달라, 정체를 알지도 못하는 내 모든 것을 받아들여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문득 던진 아이디어나 SOS 신호가 반드시 누군가에게 포착되고 처음에 기대했던 대로는 아니더라도 어떤 돈벌이나 호구지책이 발견되는 것은, 이들이 타자에게 공감이나 공공성을 띤 행동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타자의 ‘알 수 없는 참모습’을 ‘미지/불가지의 가능성’으로 환영하고, 상장 기업의 사장이나 대통령의 비서만이 아니라 비합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과도 ‘겸사겸사’ 친절을 주고받음으로써 선뜻 연결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263쪽

 

마찬가지로, 스스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인간, 완벽한 인간이 되게끔 노력해서 자신의 가능성에 베팅하거나 또는 가치관과 자질이 서로 비슷한 동질적인 소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이에 따른 호수성 및 응답할 의무에 확실히 응답해가는 대신에, 능력, 자질, 선악의 기준, 인간성이 다른 사람들과 가능한 한 많이 느슨하게 연결되고 타자의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우발적인 응답’의 가능성에 베팅하는 것은 ‘이질성과 유동성이 높고 누가 응답해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불합리한 전략이 아니다. 어떤 일이든 나름대로 해내는 제너럴리스트인 동시에 어떤 인간과도 나름대로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되어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나가는 것이다.

-264쪽

 

물건이나 서비스, 정보가 그때그때 필요한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시스템, 누군가에게 과도한 부담이나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돌아가는 분배 시스템이 시장경제 한복판에서 형성되어가기를 나는 기대한다. 제5장에서 다룬, 내가 잠시 경험한 것처럼 서로 나누어줌으로써 동료가 되고, 그럼으로써 동료가 마침 우연히 소유한 자원 — 무임승차 멤버십과 팔다 남은 상품 — 을 계속 나누어주는 시스템이 넓은 네트워크로 실현된다면 어떨까. 이에 따라 딱히 뛰어나지 않고 때로는 불성실하다 해도 누군가의 변덕 덕에 반드시 살아갈 수 있는 분배경제의 유토피아가 구축되어가는 것을 몽상해본다. 인공지능이든 전통적인 종교든 이를 실현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285쪽

서평

 출판사 서평

 

★★ 일본 논픽션계의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이라 불리는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과 

명성 높은 가와이 하야오 학예상을 동시 수상하여 

큰 화제를 부른 인류학 명저!

 

● 세상의 어떤 인간도 신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믿지 않아도 연결되는 사회’를 향한 인류학적 상상!

 

홍콩의 ‘마굴’, 청킹맨션은 국제적인 비공식 경제의 거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짝퉁, 모조품 등과 관련해 동아프리카와 중국 간의 역동적인 비공식 경제를 연구해온 저자는 해외 연구차 홍콩에 가면서 청킹맨션을 숙소로 택한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자칭 타칭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를 만난다. 탄자니아인인 카라마는 홍콩에서 오랫동안 중고차 중개업을 해온 브로커로, 전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다양한 국적의 청킹맨션 주민들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의지하는 보스였다. 하지만 저자는 곧 그의 다른 참모습도 알게 된다. ‘빅 브러더’ 카라마는 매사 게으르고, 허당미 넘치고, 약속 따윈 밥 먹듯이 어기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보스답지 않은 보스 카라마의 안내로 저자는 이국적인 문화와 정동이 뒤섞인 청킹맨션 탄자니아인들의 삶과 비즈니스 속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각자 다양한 사정을 가진 이들은 모두 깊든 얕든 그레이존에 걸친 비즈니스나 불법 체류, 불법 노동을 하고 있으며, 매우 부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 한 끼 챙겨 먹기 힘든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신’이 디폴트값인 이 세계에서 서로 매우 다른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 모두가, ‘겸사겸사’ 정신으로 무장하며 느슨한 협동을 통해 커먼즈 비스무리한(?) 삶의 방식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딱히 뛰어나지 않고 때로는 불성실한 사람일지라도 누군가의 변덕 덕에 살아갈 수 있는 분배경제의 유토피아란 가능할까? 추천의 글을 쓴 한디디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우리에게 커먼즈와 공유경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관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관계를 완전히 다르게 상상하고 실천하는 세계로의 매혹적인 여행을 제공한다.

 

● “내가 널 도우면 ‘누군가’가 날 도울 거야”

기존의 호혜·증여·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겸사겸사’의 철학

 

“왜 나만 도와야 하지?”, “저 사람은 왜 늘 받기만 해?”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에도 퍼져 있는 이런 불만은 혐오와 복지제도에 대한 비난, 서로에 대한 강박적인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받으면 그만큼 갚아야 하고, 준다는 확약 없이는 줄 수 없는’ 악순환의 호수성(호혜) 속에서 압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들로 말하자면, 우선 이들은 타인의 사정에 깊게 파고들지 않고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가볍게 서로를 ‘겸사겸사’ 돕는다. 낯선 이를 재워주거나, 비즈니스를 돕거나, 국경을 넘어 동포의 시신을 운구하는 대형 프로젝트까지 ‘겸사겸사’의 느슨한 연대로 이루어진다. 나아가 모두가 ‘겸사겸사’에 편승하고 있음을 표명하기에 도움을 받아도 갚지 않고, 도운 사람도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친절에 즉시 답례하지 않기를 지향함으로써 누군가에게 부담이나 권위가 집중되지 않아 다시 ‘상호 부조’가 촉진되는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모든 일상적인 활동과 비즈니스에 녹아들어 있는 ‘겸사겸사’ 정신은 호수성(호혜)이나 증여의 불균형이 문제가 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한편 이들이 애당초 타인을 ‘겸사겸사’ 돕는 이유는 동포이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알 수 없는 참모습을 ‘미지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돕는 행위에는 쾌락이 있다. 그리고 내가 준 도움이 돌고 돌아 나중에 어떤 기회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뼛속까지 장사꾼인 이들은 그 쾌락과 나중에 돌아올지도 모르는 기회에 대한 느슨한 기대를 바탕으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타인을 돕기로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중요한 건 낯선 타자들의 다양성 속에서 자신의 ‘기회’를 발견하는 감각이다. 고위 관료나 부자만이 아니라 ‘비합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과도 ‘겸사겸사’ 도움을 주고받으며 선뜻 연결되려 하는 이러한 실천은, 우리가 이질적인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존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렇게 비즈니스에 관한 이기적인 관심과 타자에 대한 이타적인 행동을 분간하기 어렵게 맺어져 있는 구조가 구축되면, 누군가가 내게 베푼 친절에 직접 갚아주지 못하더라도 이게 그 사람의 기회로 이어질 수 있으며,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제공한 친절에 상대방이 직접 갚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기회를 붙잡았을지도 모르는 세계가 구축되어간다. 즉, 여기에도 ‘부담’을 애매하게 만들며 자발적인 도움을 촉진함으로써 ‘분명 누군가가 도와준다’라는, 국경을 초월한 거대한 안전망을 형성하는 장치가 있는 것이다.”_본문에서

 

● 단순한 자본주의경제의 대안을 넘어

설령 완벽한 ‘좋은 시민’이 아니어도 

환영하는 공유경제 시스템,

청킹맨션 브로커들의 ‘TRUST’

 

최근 10여 년간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자본주의경제가 초래한 문제들이 더욱 두드러짐에 따라 공유경제와 커먼즈가 자본주의경제의 대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에 관한 논의들이나 탄생한 공유경제 플랫폼들은 대체로 시민 사회의 논리에 기초한다. 에어비앤비나 우버, 음식 배달 등의 공유경제 플랫폼은 ‘주기’, ‘받기’, ‘갚기’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배제하는 평가경제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시민들’ 간의 공유경제나 커먼즈에서 누락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자는 “예금 0원, 주소 불명, 직업은 사기꾼, 취미는 방랑”이라고 회원 가입란에 써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청킹맨션의 탄자니아 브로커들의 거래 방식은 상상 이상으로 ‘현대적’이다. 이들이 SNS를 이용해 구축한 통칭 TRUST라는 시스템은 돈벌이 플랫폼일 뿐 아니라 크라우드 펀딩 등의 기능을 통해 개개인의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안전망이다. 또, ‘신용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SNS에서 엿볼 수 있는 개개인의 변해가는 인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서로 거래하고 돕는다. 탄자니아인들은 인간에게 ‘불변의 자아’란 없다고 생각한다. 설령 배신당한 적이 있어도 상대방이 처한 상황에 따라 몇 번이고 다시 믿어보고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자세야말로 현대의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나가는 데 매우 합리적인 태도다. 

 

“이들이 말하듯이 특정 브로커를 ‘신뢰할 수 있는 상대’와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분류하기보다는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라도 신뢰할 수 있다’는 관점에 입각해, 개별 브로커가 처한 상황을 헤아리며 한 번 배신당했더라도 상황이 변하면 몇 번이든 믿어보겠다는 태도가, 본인의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실패하거나 재난에 맞닥뜨릴 수 있는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기 쉽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_본문에서

 

한편 역설적으로, 이들은 “우리는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다, 돈을 버는 건 좋은 일이다, 우리는 어떤 기회도 자신의 이익으로 바꿀 수 있다”라고 공언하기에 가볍게 서로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상대방의 요청을 어떻게 해서 ‘윈윈’의 이익으로 변환할지,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즐거움으로 바꿀지는 장사꾼으로서 각자의 기지에 달린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증여경제나 분배경제를 단순히 자본주의경제의 ‘대안’으로 보지 않고, 증여경제나 분배경제에 내포된 부정적인 측면이 자본주의경제에 의해 잘 활용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음을 역설한다.

 

● “인생은 여행이다.”

삶의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껴안고 

삶을 ‘여행’하기 위한 자유의 기반으로서의 커먼즈

 

탄자니아인들은 “인생은 여행이다”라고 말한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 머나먼 홍콩의 청킹맨션에 온 이유는 그저 모국의 가족을 부양하거나 자신의 더 나은 미래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홍콩에서의 삶을 모국에서의 삶과 동등하게 여기며, 지금 이곳에서 다양한 참모습을 가진 타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며 일상생활 속에 묻혀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발굴한다. 어떤 인간과도 나름대로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되어 불확실한 세상을 요령 있게 살아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세계 자체를 커먼즈로 만들어나가는” 상호 부조의 실천 속에서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펼쳐나간다.

 

“장사가 (끝없는 경쟁이 아닌) 열린 세계로의 모험이 되고, 이 모험 속에서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있지만 쫄딱 망할 수도 있으며, 망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삶 말이다. 또한 이들은 이러한 모험=삶에서 누군가에게 고용되거나 종속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대등한 인간으로 만나길 바란다. 즉, 그들이 실천하는 커먼즈는 삶의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껴안고 삶을 ‘여행’하기 위한 자유의 기반이기도 하다.”_「추천의 말」, 한디디

 

이 책에서 저자는 반드시 ‘선한 시민’, ‘선한 이웃’이 아닌 사람,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서로 돕는 구조와 논리를 파헤치면서, 타자의 알 수 없음이 허용되는 세계, 그리고 단순히 시민 사회의 논리에만 기초하지 않은 공유경제, 커먼즈, 증여의 방식 등을 살펴본다. 그는 이 책이 우리가 반드시 ‘위험한 타자’나 ‘이질적인 타자’를 배제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음을 사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새로운 인간 사회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삶과 일, 자유의 본질 또한 꿰뚫는 인류학 명저이기에, 부조리한 현대 사회에서 늘 일에 몰두하며 미래의 불안함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저자소개

저자 : 오가와 사야카
1978년 출생. 전공은 문화인류학. 교토대학 지역연구 박사, 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 국립민속학박물관 연구전략센터 기관연구원, 같은 센터 조교, 리쓰메이칸대학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준교수를 거쳐 현재 같은 연구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학원생이었던 23살부터 탄자니아를 드나들었고, 마칭가라고 불리는 영세 상인들에게서 장사 기술과 스와힐리어를 배우며 그들의 삶과 관습을 참여 관찰했다. 그 후 동아프리카 국가들에서의 중고품·위조품 유통 및 소비, 홍콩·중국과 아프리카 국가 간의 비공식 교역의 구조 등을 연구했다. 홍콩의 청킹맨션에 체류하며 청킹맨션에 사는 탄자니아인들의 비즈니스와 삶의 방식을 참여 관찰하고 펴낸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로 2020년 제51회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제8회 가와이 하야오 학예상을 동시 수상했다. 그 밖의 저서로 2011년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한 『도시를 살아가기 위한 교활한 지혜: 탄자니아의 영세 상인 마칭가의 민족지(都市を生きぬくための狡知: タンザニアの零細商人マチンガの民族誌)』와 『하루 벌어 살아도 괜찮아(「その日暮らし」の人類学: もう一つの資本主義経済)』 등이 있다.
번역 : 지비원
연세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했다. 현재 출판 기획과 번역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왜 읽을 수 없는가』, 옮긴 책으로 『지(知)의 관객 만들기』, 『흙을 먹는 나날』,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독해력 수업』 외 여러 권이 있다.
상단으로 이동
  • (54866)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중동로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