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 몇백 년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이 있고,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장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그곳에 남아 저를 여전히 매혹합니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그러니, 그냥 한번 들르세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라도 좋습니다. 일부러라도 좋고 근처를 지나는 길에 슬쩍이라도 좋습니다. 어느 계절 어떤 시간이라도 당신만의 절경을 만날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도시에 당신의 이야기를 맞대어 주세요. 푸른 강물 위로 부서져 내리는 한낮의 햇빛, 초록이 우묵한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는 해 질 녘 노을, 어두운 밤하늘 위로 점점이 자리 잡은 별 사이사이 과거 위에 현재를, 다시 현재 위에 미래를 포개어볼 만한 곳이 많답니다.
금요일의 남부시장은 다르다. 오랜 가게들이 늦게까지 문을 열고, 그 사이에 먹거리를 파는 이동식 매대가 들어선다. 단골인지 여행객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이 복작복작하다. 개인이 아니라 군중으로, 개별적인 서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남부시장을 이루는 원래의 구성품처럼. 밤은 막 시작되었고, 밤에만 열리는 이 시장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봄에는 경기전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중앙초 바로 옆 교동아트센터를 지나며 요즘은 어떤 전시를 하고 있나, 볼만한 전시일까 힐끗거렸다. 어둠 속에 하얗게 만개한 꽃송이가 담장 밖으로 쏟아지는데, 마침 그 아래를 지나게 될 때도 있었다. 닿지 않을 걸 알고도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곧 아쉬워졌다. 오래된 필방과 한약방을 지날 때면 은은한 먹물 냄새와 쌉싸래한 한약 냄새가 맡아지는 것도 같았다.
평일 오전 7시와 11시, 하루 두 번 팔복동 철길 위로 열차가 달린다. 전주페이퍼에 제지원료를 운반하는 화물열차다. 철로 양옆으로 봄이면 이팝나무 흰 꽃이 흐드러지고, 여름이면 초록 잎사귀가 풍성하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빨간 열차는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바로 옆에 폐공장을 재활용한 팔복예술공장이 있다.
그때의 민중서관도, 그 시절 십수 개의 헌책방도 이제는 사라졌지만, 또 다른 책방들이 새로이 생겨났다. 전주에는 여전히 책방이 많다. 책방 ‘잘익은언어들’이나 ‘물결서사’에서는 한쪽에 책방지기들이 다 읽은 책을 쌓아두고 팔기도 한다. 그들 덕분에 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단 사이를 헤맨다. 굉장한 것 같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쪼그라든다. 기쁠 때 책을 사고 슬플 때 책을 읽는다.
훌쩍 떠나고 싶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때, 훌쩍 떠나는 일보다 돌아온 뒤 마주해야 할 밀린 일상이 더 두려울 때면 나는 여행자도서관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라는 구절이 나를 맞이한다. 글자들과 가만히 눈을 맞추면 “그렇지. 여행도 독서도 결국 공간적으로 같은 자리로 돌아와야만 완성되지만, 지나온 사람의 어떤 부분은 완전히 바뀌어버리지” 중얼거리게 된다.
내가 경험한 주인의 적당한 무관심과 책장의 무심한 의외성이 교차하는 순간을, 애정하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카프카에서 만나” 하고 덫을 친다. 그리고 그들이 기웃거렸던 책장과 들었다 내려놓았던 책들을 은밀히 관찰해 두었다가, 그들이 자리를 비우는 순간 몰래 계산하곤 헤어질 때 선물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이 그들이라서 읽지 않았을 책들을 건네곤 한다. 서로의 세상에 새로운 문을 하나 연다.
아주 오래 혹은 영영 머물러야 하는 곳이라면 지금까지 살아온 전주보다 더 그럴듯한 도시를 아직 찾지 못했다.
서울이 지하철을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로 태풍처럼 몰아치는 도시라면, 전주는 자전거를 타고 시속 20킬로미터로 산들바람처럼 흘러가는 도시다. 산들바람 정도가 내가 견딜 수 있는 삶의 최고 속력이다. 이 소란하지 않은 도시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숲이나 바다에 가고 싶지만 지금 당장 갈 수 없을 때, 차가운 새벽을 방문한다.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일행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들의 주문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즐거워진다. 처음 방문한 사람이 미심쩍은 얼굴로 주문을 하다 술을 받아 들고 눈이 동그래지며 무장 해제되는 모습이, 여러 번 방문한 사람이 오늘의 기분이나 풍경을 묘사하고 눈을 반짝이며 그에 걸맞은 술을 기다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처음에는 모히또 커피를 한 잔 빠르게 마시고, 그다음에는 아메리카노와 시나몬롤을 곁들여 천천히 음미한다. 그러나 봄바람에 벚꽃잎이 흩날릴 때, 한여름 장대비에 초록 잎사귀가 흩날릴 때, 늦가을 나뭇잎이 하나둘 낙하할 때, 한겨울 흰 눈이 내려 앙상한 나무 위로 눈꽃이 피어날 때면 책을 내려놓고 멍하니 창밖을 보게 된다. 커피가 아니라 시간을 음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