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노래와 노랫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 정적과 웃음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 그리고 나와 나 사이를 둥글게 잇는다. 노래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힘으로만 그들을 엮는다. 노래가 지나간 자리에는 얇은 엽서 한 장을 닮은 기운이 그렇게 남는다.
노래 일지를 쓰면서부터 누군가가 볼 수 있는 곳에 나의 글을 선보였다. 노래 일지는 쓰는 행위가 아닌 나를 읽는 일에 가까웠다. 감상의 영역인 음악 위에 ‘나’라는 사람의 레이어를 겹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나를 다시 보는 용기가, 나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나랑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노래가 담고 있는 이야기만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이야기로 입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노래를 따라서라면 나의 어떤 이야기도 노래처럼 멜로디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난 시절의 슬픔을 알아채는 건 희망찬 일이었다. 그 희망은 오늘의 그것도 멀리서 볼 날을 그려보게 했다.
—「Intro」에서
■ 본문 인용
노래와 노랫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 정적과 웃음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 그리고 나와 나 사이를 둥글게 잇는다. 노래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힘으로만 그들을 엮는다. 노래가 지나간 자리에는 얇은 엽서 한 장을 닮은 기운이 그렇게 남는다.
_8쪽
노래 일지를 쓰면서부터 누군가가 볼 수 있는 곳에 나의 글을 선보였다. 노래 일지는 쓰는 행위가 아닌 나를 읽는 일에 가까웠다. 감상의 영역인 음악 위에 ‘나’라는 사람의 레이어를 겹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나를 다시 보는 용기가, 나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나랑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노래가 담고 있는 이야기만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이야기로 입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노래를 따라서라면 나의 어떤 이야기도 노래처럼 멜로디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난 시절의 슬픔을 알아채는 건 희망찬 일이었다. 그 희망은 오늘의 그것도 멀리서 볼 날을 그려보게 했다.
_8~9쪽
누군가의 희망은 다른 누군가의 희망도 될 수 있다. 분명한 이름 하나가 있기 때문에 자리가 생겨난다. 나는 ‘진아’라는 나의 이름을 공란처럼 앞에 둔 이 제목이 아주 마음에 든다. 부디 『진아의 희망곡』을 통해 노래 하나로 나를 바라보는 조그만 순간을 하루에 수놓기를. 희망곡처럼 희망그림, 희망시, 희망글, 희망산, 희망여행, 희망카페…… 나를 살리는 것 앞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한번 붙여 써보기를 바란다.
_10쪽
이런 게 창작이 아닐까. 무심하게 그려진 착상은 곧 영감이고, 이 영감을 창작으로 비약하게끔 하는 건 파리 이야기의 파리가 되었다가 파리부터 없애보며 나의 도화지를 펼치는 일 아닐까. 얼마든지 주고 또 받으며 같은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나의 자리로 돌아와 내 곳만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을 시작하는 것. 잘 아는 단어를 나에게 낯설게 대입해보는 무구함을 갖춘 마음 말이다.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나’와 ‘나의 하루’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란 좀처럼 어렵지만,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창작은 나를 궁금해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_59~60쪽
여름은 아이가 어느덧 어른이 되는 계절이기도 하면서, 다 큰 어른은 잠시나마 아이였던 시절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이런 계절의 조바꿈은 노래만이 선사하는 마법 같은 것.
_72쪽
“이게요. 잘 안 보여요.”
없다고 싹뚝 말해버리지 않고, 안 보인다 하기. 중고 음반 세상 속 희망찬 언어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는 말 하나로 지하상가 속 그 누구도 허탈한 얼굴로 집에 가지 않는다. 없는 줄만 알았던 노래도 시간을 들여 알아보니 있었다는, 그래서 이내 웃어봤던 경험에서 나온 표현이 아닐까. 전무한 게 아니라 부재합니다. 그 음반 씨가 지금 어딜 여행 중인지 나는 모르지요. 일단 여긴 아직 안 왔습니다. 그렇게 들렸다. 결국 여기엔 없다는 말인데도 너무나 희망의 내음이 풍겨 와 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_75쪽
흔한 빗줄기도, 작은 글씨 자국마저도, 보고 싶은 것들을 야심 차게 찾아내며 오늘까지 왔다. 그런 한 인간인데, 어찌 삶을 슬프게만 볼 수 있을까. 비를 보며 흘려보낼 시간들은 보내고, 잊고 있던 기억은 잠시나마 가까이 그린다. 빗소리가 들리면 나의 슬픔, 웃음 모두가 선명해진다. 다시 내리는 비의 길을 따라온 이야기들은 맑은 날이면 바짝 말라 곧 바로 사라진다. 내가 들은 빗소리는 모든 걸 간직하면서 나라는 생을 지난다.
_88~89쪽
〈노는 게 남는 거야〉를 들으며 나를 튼튼하게 한 것들을 내가 만지작거리며 내 손으로 챙겼다는 걸 안다. 노래 속 가사처럼 나에게만 들리게 건넸던 두 사람의 말들을 내 몫으로 챙겼다는 걸 안다.
이제야 뒤늦게 너무 많은 꿈이 생긴 내게 그 말들을 가져온다. “울지 마, 예쁜 얼굴 얼룩져” 같은, “임진아, 선물” 같은 말들. 서로 상처가 된 말들만 휘몰아치는 날도 물론 있었다. 떨어져 사는 지금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튼튼해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간 다정한 말풍선까지 터지는 건 아니다.
_96~97쪽
나의 시대 안에서 누리고 가질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도 있겠지만, 신경을 안 쓴다면 그 범위는 더 줄어들기 십상이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지닌 한계 안에서 나의 향유 범위를 어떻게든 넓혀야만 했다. 그래야 길이길이 사는 재미가 생기니까. 그런데 그게 한 사람만의 힘으로 가능할까. 혼자서 엄지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있는 힘껏 펼친다고 해도 그 사이를 더 넓히기란 어렵다. 온 마을이 한 사람의 향유 범위를 서로서로 넓혀줘야만 한다. ‘가요 세상’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큼은 범위가 광대한 사람으로 자라난 건 내 주변 어른들의 다정함과 내 시대 속의 다정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_107~108쪽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무수한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 있다. 마치 사랑처럼. 그저 부끄럽다고, 모호하다고 일축해버리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 음악과 문학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토록 다정하고 솔직하게 설명해주니까.
_118쪽
내 시절을 영원토록 매만지는 이는 온 세상에 다정할 수 있다. 한 시절 분명했을 다정함은 꼭 그런 운율이 되어 끝까지 가까운 온기가 되어준다.
_171쪽
그 여러 번 접히고 구겨진 자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마저 살고 싶어졌다. 김민기처럼. 김민기의 노랫말을 가져와 전혀 다른 멜로디 위에 얹어 나만의 외침을 만든 김일두처럼. (…) 김민기의 목소리 위에는 무광의 돌덩이 하나가 묵묵히 놓여 있다. 질척이지 않고 물기 하나 없는 목소리에서 무언가 만져진다.
그가 해온 것처럼 나도 나의 것들을 어렵고 치밀하게, 내게 허락된 완결의 매듭을 지어 되도록 치열하게 선보이는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_196~197쪽
같이 걷는 이들 모두 그런 짐을 안고 걷는다.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이 눈에 다 안 들어올 만큼 그득그득한 광화문. 함께 걸으면서 우리의 봄을 되찾으려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치열한 투쟁의 풍경에 잠시 더해졌다는 것만으로도 답답한 마음 구석에 창문 같은 구멍 하나가 뚫리고 잠시나마 바람을 맞는다. 외침에 대한 응답이 없어도, 우리의 소리를 우리가 듣다 돌아오는 길이더라도. 집회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방구석에 앉아 나만의 투쟁 노래들을 들었다. 그런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되찾고 싶은 세상을 외치고 돌아와 다시금 평소의 기운으로 살기 위해서는 나지막하게 걷게 하는 노래들이 필요했다. 나의 오늘과 내일이 평소처럼 단단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방금 전에 나란히 걷던 사람들과 같이 듣고 같이 부르고 싶은 곡들을 들으며 집 안에서 행진을 이었다.
_201쪽
마침 『진아의 희망곡』 원고 마감과 겹치던 시기라 〈Amen〉의 노랫말이 달라붙었다. “나의 방황을 나의 가난을 별에 기도해 다 잊기로 해.” 굳이 쓰지 않던 내 일화들을 노래의 힘으로 써왔구나. 나의 방황과 가난을, 노래라는 별에 기도하면서 그렇게 노래만큼 만나 다 잊고 내일을 새로 펼치려고 한 게 아닐까. 노래 일지가 내어준 길이 이제야 보였다. 이소라의 음악은 남긴 것도 남은 것도 하나 없어서 바스러지던 지난 사랑을 떠올리게 하며 늦은 눈물을 흘리게 해주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고유의 아픔들에 가닿아 가까스로 희미하게 만들어주고 떠나는 음악이기도 했다. “첫 별이 뜨면 난 어느새 새로운 시작을 기도해.” 몇 년간 희망곡을 써온 마음을 꺼내 아무도 몰래 ‘아멘’ 하고 읊조리고 싶어졌다. 나의 평안과 나의 사랑이 있는, 이 별을, 나를 믿기로 해.
_208~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