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타이포그래피와 출판, 디자인 행동주의를 통해 읽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와 시각문화
한국에 그래픽 디자인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로 본 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의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를 세 가지 키워드, 즉 ‘한글 타이포그래피, 출판, 행동주의’를 중심으로 탐구한 책이다. 한국 출판 디자인의 연대기와 사례 모음, 디자인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한국 사회와 한국 시각 문화의 내면을 비평적으로 파고들고자 했다. 저자 전가경은 16년간 축적해온 디자인 문화 연구 사례와 글쓰기, 강의 경험을 집대성해 산발적으로 전개되어온 디자인 실천들의 문화적 좌표를 다시 설정하고자 한다. 특히 기존의 로마자 중심 타이포그래피 이론이나 유럽·일본 중심의 디자인사가 다루지 못한 ‘한글’과 한국의 출판문화, 행동주의적 실천을 세밀하게 읽어내고, 이와 연관해 문화적 의미를 추출한다.
첫 번째 축인 ‘한글 타이포그래피’ 장에서는 문자 조형이 단순히 시각적 조합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적 요구와 이데올로기 영향 아래 어떻게 형성되고 진화하고 있는지를 다룬다. ‘네모틀’ 안에 갇힌 한글 조판의 제약, 세벌식 자판을 둘러싼 역사적 논의, 1970~80년대 ‘조형적’ 타이포그래피 실험부터 오늘날 디지털 폰트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는 끊임없는 기술적, 정치적, 심미적 교섭의 장이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디자이너는 조형가일 뿐만 아니라 문자와 언어 사이의 긴장을 감지하고,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는 언어의 중재자이자 편집자로 등장한다.
두 번째 축인 ‘출판’에서는 디자이너가 편집자이자 기획자, 문화 생산자로 활동했던 역사를 복기하며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마당』 같은 잡지를 통해 당시 지식인들과 디자이너들이 함께 만들어낸 문화적 지형도를 추적한다. 출판 디자인은 책의 표지나 지면 디자인일 뿐만 아니라 콘텐츠 구성과 기획, 언어와 시각 사이의 정치적 배치를 아우르는 총체적 문화 디자인으로 읽힌다. 특히 1980~90년대의 진보적 출판사들이 펼쳐낸 출판 단행본과 시리즈, 전시 도록 등은 ‘편집 디자인’의 미학적 실험이자 실천적 전략이었다.
세 번째 키워드인 ‘행동주의’에서는 디자이너가 사회적 의제를 시각 언어로 조직하고 퍼뜨리는 역할을 재조명한다. 2010년대 이후 본격화된 디자인 운동의 흐름, 예컨대 ‘일상의실천’ 디자인 스튜디오, FDSC(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의 활동은 디자인을 통해 사회에 말하고 개입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실천해왔다. 노동 문제, 페미니즘과 퀴어 이슈, 기후 위기 등 다층적 사회 현안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대응과 연대는 오늘날 디자인의 역할과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흐름을 단순히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소비하는 대신 운동의 계보학으로 접근한다.
『그래픽 크리틱』은 각 장을 시대순으로 배열하는 선형적 역사 기술에서 벗어나 역사의 복합적인 시간성을 인정하며 다양한 주제를 교차적으로 다뤘다. 이를 통해 단일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 디자인사의 다중적 국면을 접하게 된다. 이는 디자인사를 보다 유연하고 확장적인 시간 개념으로 읽고 쓰려는 저자의 방법론적 제안이다. 즉, 이 책 또한 연구와 실천을 가로지르는 비평적 플랫폼으로서의 책에 대한 또 하나의 실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