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
식사를 마치고 탄 버스에 캐리어가 가득하다. 대부분 짝이 있거나 가족 단위이다. 자리에 앉아 지난밤 뒤척이며 못이뤘던 잠을 보충하니 공항에 금방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체크인을 하고 입국장으로 향하는 마음이 복합적이다. 설렜던 마음은 곧 무덤덤하고 차분해진다.
놓고 온 짐은 없을까? 서류나 면허는 잘 챙겼을까? 긴장감 속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좀처럼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 마침내 이륙한 비행기가 금세 대만에 도착하니 모든 걱정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기분이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호스텔로 향했다. 꽤나 더운 날씨에 땀이 범벅이다. 호스텔에 도착하여 샤워를 하고 거울을 보는데 문득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 아마 퇴사 및 급작스러운 생활 패턴의 변화로 인해 약간의 정신착란이 온 것이라 추정된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고는 밖으로 나간다.
(p.14)
택시비가 과연 얼마나 나올까? 두근두근…. 도로를 지나는 수많은 슈퍼카들은 우렁찬 엔진소리로 우리를 위협한다.
“투 헌드렛 픱티!”
250 디르함? 원화로 계산해 보니 7만 원이 조금 넘었다. 요금을 둘이 나누니 고통은 절반이 됐다. 표정을 숨기고 속으로 안도한다. 우려했던 바가지는 없었다. 한국에서도 이 정도 거리의 택시비면 족히 5만 원은 나올 텐데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물론 기름값이 두 배 이상 저렴하다는 이점이 있지만 그런 것은 잊기로 하자. 우리는 공항 앞 경호원을 택시기사로 인정하기로 합의하며 설레면서도 걱정됐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두바이몰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p.29)
사하라 사막으로 향하는 버스는 벌써 5시간은 족히 달렸지만 지도를 보니 반도 오지 못했다. 지루함에 기지개를 켜고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버스에 파리 한 마리가 들어온다. 아마 버스의 퀴퀴한 냄새가 마음에 들어 끌려 왔을 것이다. 아니면 파리도 정해진 미래를 버리고 새로운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것일까? 파리는 유리창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그만의 향긋한 향기를 즐긴다. 곧 문은 닫힐 것이며 버스는 사막의 도시인 메르주가까지 5시간은 더 달릴 것이다. 창문에 앉은 파리는 아직까지 나름 편안해 보인다.
단 한 번의 선택으로 파리는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떠났다. 중간에 멈출 수 없으며 되돌릴 수도 없다. 파리로서는 도착지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겠지? 한 번의 선택으로 평범한 삶에서 빗겨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버렸다. 미래는 알 수 없고 무슨 일을 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p.46)
세렝게티에서 게임 드라이브가 끝나고 킬리만자로로 돌아가는 길에 타고 있던 차가 세렝게티 한복판에서 고장이 났다. 부품이 필요하여 다른 차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덕분에 마사이족과 직접 인사도 할 수 있었다. 마사이족 아이의 표정은 정말 순수했다. 서로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정지된 장면에서 마사이족의 어린아이가 먼저 꺼낸 말은 ‘달러’, 그리고 ‘초콜릿’이었다. 아마 과거의 여행자들이 이들에게 돈과 군것질거리를 건네주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미디어에서 보던 사자가 잡은 동물을 탈취하고 맹수와 맞서는 마사이족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폴더폰이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돈의 가치를 알았다. 가이드도 이제는 마사이족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해 주었다.
(p.95)
교환학생 때 함께 지냈던 스페인 친구인 싼티의 집에 도착했다. 산티의 부모님도 크게 환영해 주시며 식사부터 차려주셨다. 스페인은 저녁식사를 늦게, 그리고 많이 먹는 문화가 있다. 첫날 저녁식사부터 어머니는 음식을 듬뿍 담아주셨다. 한국의 예의 바른 청년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릇을 싹싹 비워야 했다. 요리 솜씨가 좋고 입맛에도 잘 맞아 먹을 때는 정말 맛있었지만 잠드는 순간까지도 배가 너무 불렀다. 어릴 때부터 저녁 식사는 과식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던 터라 늦은 저녁의 과식은 큰 후유증이 따라왔다.
다음날 저녁, 다시 돌아온 저녁 식사에 엄청난 양의 메인 요리를 발견했고 애피타이저로 이미 배가 꽤나 불렀던 나는 다급하게 친구에게 물었다.
“스페인어로 ‘조금’을 뭐라고 해?”
(p.112)
캄보디아는 지식인이 몰살되는 킬링필드 사건으로 인해 나라를 발전시킬 동력을 잃어버린 나라로 평가된다. 정부의 부패가 심각했고 이는 사회의 부패로 이어졌다. 공항에서부터 규정 외 팁을 요구하는 일을 겪으면서 부패의 분위기는 이미 직접 체감한 뒤였다. 수많은 주변 유적지를 돌고 정부 비판을 한참 듣고 나자 앙코르와트 유적지 앞에 도착했다. 앙코르와트는 부실한 관리로 많이 낡고 닳아 있었다. 불상들은 전쟁과 도난 등으로 인해 사라져 있었다. 근래에는 완전히 방치되었던 이 유적을 조금씩 관리한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여전히 많은 곳들이 폐허와 같이 방치되어 있었으며 어느 곳이든 누구나 유적을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
(p.152)
어떤 하루에는 잔잔한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따뜻한 햇빛 아래 잠시 눈을 붙인다. 일어나면 모히또를 마신다. 약간의 취기에 호기로운 친구는 야자수를 딴다. 다시 바다에 뛰어든다. 정숙한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것인지 이곳에 와서 정숙해진 것인지 다른 여행자도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다. 히론에서는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사진 찍을 생각을 못하고 풍경과 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대로 빠져버린 것이다.
삶에서 가장 바쁘고 힘든 어느 날에는 히론이 떠오를 것 같다. 오랜 잠수 끝에 물속에서 나와 산소를 들이마실 때보다, 더운 날 옷과 속옷을 집어던지고 샤워를 할 때보다 큰 자유와 해방감을 안겨준 히론이 그리울 것이다. 미래의 거칠고 힘든 날을 위로해 줄 과거의 평온한 추억 하나를 쌓아 올린다.
(p.177)
“이 버스는 어디까지 가나요?”
“베네치아.”
마침 베로나 다음에 방문할 도시였다. 베로나에 내리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자리에 돌아가 앉아 다시 커플들을 감상한다. 그들은 모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꽃과 나무로 차린 진수성찬 앞에 젓가락 같이 어울리는 짝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짜장면 앞에 놓인 숟가락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미련이 생길 틈도 주지 않고 버스가 곧장 출발한다. 그렇게 로미오가 아닌 나는 베로나를 쉽게 포기해 버렸다. 좋은 숙소를 예약했었기에 비싼 숙박비가 날아갔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것에, 그리고 내가 이곳을 곧장 떠나는 것에 만족한다. 다음에는 줄리엣과 함께 돌아오겠다.
(p.198)
바삭한 바게트에 부드러운 카이막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버터향, 거기에 달콤한 꿀이 어우러져 먹자마자 행복으로 가득 찬 웃음이 나온다. 충분히 맛을 음미한 뒤 감았던 눈을 뜨자 반대편에 터키 부부가 나의 만족감에 호응해 준다.
카이막은 물소젖을 오랜 시간 저온으로 가열한 후 상층부의 굳은 크림으로만 얻을 수 있는 아주 번거롭고 고급진 식재료다. 값이 비싸고 금방 상하기 때문에 저장성이 좋지 않고 물소라는 동물이 생소한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가 무척 힘들다. 희귀함이 첨가된 맛은 더욱 달콤했다. 이곳을 떠나면 먹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여행을 하는 동안 매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간 여행지는 다시 방문하지 않는 편이지만 카이막 때문에 다시 올 것 같다. 생크림도 아니고 버터도 아닌 것이 생크림과 버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매혹시키다니 정말 마법의 음식이다.
(p.216)
시간이 지날수록 차가운 얼음물이 그리워졌다. 우리나라 편의점에서 천 원에 파는 생수가 인도에서는 병자의 생명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깨끗한 물의 위대함이 체감되었다. 숨 한번 참아보고 느끼는 공기의 소중함, 목마를 때 물을 마시며 느끼는 추상적인 감사함이 아닌 깨끗한 물이 삶에 제공하는 어마어마한 축복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마셔도 탈이 나지 않을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생채소를 아삭아삭 씹어먹을 수 있다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도 같다. 깨끗한 얼음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조상님의 은덕인 것이다.
(p.278)
여행을 할 때에는 눈보다는 귀와 코를 여는 것이 좋다. 마음의 깊은 감동은 눈으로부터 오지만 시각의 기억은 생각보다 빠르게 잊힌다. 잊고 싶지 않은 풍경이나 거리를 마주하게 되면 카메라보다는 음악을 먼저 찾는다. 눈으로 들어오는 감동과 함께 알맞은 음악을 함께 들을 때면 떡국 위 후추 같이 좋은 향신료가 된다. 노래로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누군가는 여행지마다 공항에 도착하면 새로운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 향기를 맡았을 때 각 여행지의 모든 기억과 향수가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청각보다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기에 첫 여행 때 후각을 이용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 조금 아쉬우나 청각만으로도 추억을 되새기기에는 충분하다.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