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2
야나가와가 서성였다. 뭔가 고심하는 빛이 역력했다. 눈살을 찌푸린 채,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 멀리 북사천로 쪽에서 시위대의 함성이 밀려들었다.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함성이었다. 고향 나고야가 떠올랐다. 떠날 때가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제국의 사령관으로서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애당초 천황이니 제국이니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은 군인들의 몫이다. 자신은 그저 그들이 가꿔놓은 달콤한 열매만 따 먹으면 그만이다. 수많은 조국의 젊은이들이 그 열매를 위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제 상해도 곧 전쟁터가 될 터였다. 이기는 전쟁이 아닌, 지는 전쟁의 전쟁터가 될 것이다. 떠나야 할 이유였다
p69
일제는 배신을 강요했다. 달콤한 권력과 달달한 자본으로 유혹하며 자신을 배신의 길로 이끌었다. 조국에 대한 반역이자 민중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 배신의 길은 이제 너무도 멀리 와 있었다. 돌아가기에는 버거운 길이다. 그 길을 상해자유동맹이 막아섰다. 그들은 시민과 혁명이란 말을 동원했다. 무서운 말이다. 두려운 말이다.
들불처럼 민중들은 시민이 되었고, 복종은 혁명이 되었다. 시민들의 손가락질이 자신에게로 향했고, 총구가 자신의 가슴을 겨눴다. 민중은 시민이라는 이름의 적이 되었다. 복종은 혁명이라는 이름의 원수가 되었다.
p102
최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양수포에서 외탄을 향해 걸었다. 터덜터덜 걸음이 무거웠다. 손에 잡힐 듯이 건너편 외탄은 가까워보였다.
백이로를 지나 가든브릿지를 건너자 외탄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마천루를 올려다보며 그는 자본주의의 화려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을 찌를 듯 서양의 자본은 탐욕스럽게 솟구쳐 있었다.
최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생각했다. 제국에 맞서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가난한 동포들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그 길은 길림에서 시작되어 상해로 이어지고 있었다.
p.183
진규흔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쓸데없는 박자를 맞췄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듯도 했다.
“음모. 음모가 있는 듯하다.”
음모라는 말에 동지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어둠 너머로 망지로의 불빛이 화려했다. 황포차 뒤꽁무니로 택시의 경적이 요란하게 겁박해댔고, 전차가 덜컹거리며 거리를 가로질렀다. 청춘남녀들의 발걸음은 명랑하기만 했다.
“섣불리 나서지 말고, 일단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상해
자유동맹과 긴밀히 연락하고.”
말을 끊음으로써 신중을 기하자는 태도를 보였다. 동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