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누족은 문자가 없다. 그들의 신화 전설을 구술로 채록하고 이를 로마자로 음차하고 이를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고 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이 책이다.
아이누 신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지리 유키에(知里幸恵)다.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유키에는 아이누 신화를 로마자로 옮기고 일본어로 번역했다. 그녀 사후에 출간된 《아이누 신요집》은 아이누 신화를 문학적 영역으로 끌어내는 시발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구보데라의 스승인 언어학자 긴다이치 교스케(金田一京助)는 아이누 신요와 성전 발굴과 채록, 아이누어 연구뿐 아니라 아이누의 민속과 풍습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평을 연 독보적 인물이었다. 아이누 언어학자로서 아이누의 설화와 전설, 신화 발굴에 힘쓴 지리 마시호(知里眞志保) 또한 아이누 신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많은 저서와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아이누 신화만을 놓고 본다면 구보데라가 채록 정리한 신화의 양은 스승 긴다이치 교수의 성과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그가 채록한 신화는 홋카이도 일부 지역, 사루(沙流) 이부리에 국한되어 있다. 아이누인들의 생활 분포가 북으로 가라후토(樺太, 오늘날 러시아 영토로 되어 있는 사할린)로부터 남으로는 홋카이도(北海道)였음을 생각해 볼 때, 알려진 신화는 아이누인들의 영혼 속에 녹아 있던 수많은 신화들의 극히 일부였다. 그러나 신화의 채록, 연구가 이루어지던 당시에 이미 북방 가라후토는 갈 수 없는 소련 땅이 되어 버렸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극소수 노인으로 살아남은 전승 시인들을 일일이 찾아 채록 작업을 한 구보데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저자 구보데라가 이 책에 수록된 서사시를 채록한 시기는 1923~1941년이다. 구술에 참여한 전승자들은 모두 7명이었고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아이누의 사정은 급변했다. 가라후토 아이누는 고향을 떠나 홋카이도로 이주했고, 홋카이도 아이누 또한 내지인과의 혼혈로 형질적 특질을 상실했다. 고유문화는 멸실되거나 변됐고, 생활양식은 놀라운 속도로 바뀌었다. 현재 아이누어는 일상어로서 기능을 거의 상실했고 아이누어를 사용하는 노인들조차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따라서 고사를 이해하고 서정시를 전승하는 시인들도 사라졌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서사시도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므로 현재는 아이누 민족의 전승 서사시나 서정시나 산문 설화를 채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만큼 아이누족의 신화 전설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자료는 이제 없을 것이다.
"신요"는 아이누의 주체 신들이 자신의 언어로 행동, 경험 등을 표현하는 자서(自敍)를 말한다. 동물 신이 가장 많다.
곰, 늑대, 여우, 토끼, 수달, 담비, 범고래, 고래, 쥐(이상 동물), 올빼미, 수리, 반문조, 매, 뻐꾸기, 입큰까마귀, 사십작, 유라시아여치, 바다갈매기, 적작, 갈대새, 탁목조, 공작, 까마귀, 학 등(이상 조류), 용뱀, 비룡, 매미, 개구리, 푸른 뱀, 거미, 반딧불이, 지렁이(이상 곤충류), 청새치(어류), 불의 할매 신, 수렵의 신, 수풀 나무 신, 집 수호신, 물의 여신, 바람 신, 늪 신, 천둥 신, 허공 신, 포창 신(동물 신보다 고차원의 신) 등이 있고, 물의 신으로는 배의 신, 사람 신으로는 메나시의 여인, 시피차라코탄 추장, 사람 여인, 인간 소년, 화인 귀족, 시누탓푸카 숙녀, 오타슈쓰 숙녀 등이 있다.
“성전”은 영웅의 이야기이다.
아이누 세계에 이변이 일어나면 출현해 악령, 악신들을 물리치고 아이누를 구한다. 아이누의 시조인 아이누락쿠루의 성스러운 탄생, 지상에 강림, 그가 인간계에서 이룬 수많은 업적, 공덕을 미화하고, 오늘날 모든 생활의 연원, 종교 생활의 시초가 되고, 인간 문화의 기초를 닦은 업적을 노래한다. 반신반인인 오키쿠루미의 자서(自敍)를 특히 신성시한다.
이 책에는 신요 106편, 성전 18편을 수록했다.
서시시 뒤에 수록한 연구 부분은 비단 아이누족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구비전승문학 연구자들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일본문학 연구자, 일본학 연구자, 서사문학 연구자, 구비전승문학 연구자 등 폭넓게 소비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 구보데라는 아이누족 서사문학 연구에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서 아이누족의 언어, 신화, 문학 등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 책은 구보데라의 연구 논문을 문화인류학자 사사키 도시카즈가 정리해 이와나미 쇼텐에서 출간했고 이를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번역 출간한 것이다.
원전의 구성은 연구 부분이 앞에 있고 서사시가 뒤에 자료로 수록된 연구서이다.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고전선집 콘셉트에 맞춰 서사시에 중점을 두어 앞에 배치했고, 연구 부분을 곁텍스트화하여 뒤에 두었다. 그러므로 저자의 논문을 이와나미 쇼텐에서 한번,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다시 한번 편집한 셈이다.
근래 홋카이도에 대한 관심이 여행, 유튜브 등을 통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자연환경, 생활, 문화 등이 널리 알려지고 있으므로 아이누족의 근원에 대한 관심도 따라서 증가할 것이다. 요즘 오키나와와 그 원주민 류큐 민족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향후 아이누족에 대한 관심 역시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아이누인의 자취가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져 온 아이누의 신화를 정리해서 남긴 몇몇 사람들의 노고가 없었더라면, 아이누 신화는 아마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반세기도 전에 출간된 노학자의 저서를 번역, 출판하게 된 이유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구보데라의 《아이누 서사시, 신요·성전 연구》가 아이누 신화를 만나는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