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도망가고 싶었다. 엄마의 똥 기저귀 가는 일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내 나이 마흔도 안 됐는데 엄마의 기저귀를 갈게 될 줄이야. 한 달 전만 해도 누구보다 활기차던 사람이, 기본적인 생리현상마저 남의 도움을 받는 신세가 됐다. 이렇게 한순간에 곤두박질치리라고 누가 알았을까? 원래 죽음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스위치 탁 끄듯 갑작스러운 걸까?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매우 서글퍼 보였다. 내가 외출할 때 날 바라보는 우리 아기와 같은 표정이었다. 하루아침에 아기가 된 엄마에게는 내가 필요했지만, 막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 「아기가 된 우리 엄마」 중에서
서울 지역 1일 평균 간병비는 12~14만 원 선으로, 열흘이면 150만 원에 육박하고 한 달이면 400만 원이 넘는다. 이 금액도 아찔한데 문제는 딱 이만큼만 드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환자 케어가 어렵다면서 더 달라는 경우는 예사고 유류비, 유급휴가, 각종 간식과 식대 등을 청구하거나 퇴원 시간이 늦어지면 하루치를 더 요구하기도 한다. 이것저것 달라는 대로 주다 보면, 그야말로 간병 파산이 코앞에 닥치는 것이다. 큰 병에 걸리면 신체적 고통은 물론이요, 부차적으로 감내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신체적, 감정적, 재정적 어려움이 동시에 닥친다.
--- 「간병 파산을 걱정하며 인생을 한탄함」 중에서
엄마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어려서부터 난 오빠에 비해 차별받는다고 느꼈다. 그는 피아노와 플루트, 바이올린 개인 지도와 원어민 영어 과외, 미술, 창, 단소, 작곡, 수영, 스케이트, 태권도, 논술, 컴퓨터 등 사교육을 섭렵했다. 나도 몇 가지는 배웠지만 양과 질 모두 오빠와는 비교가 안 됐다. (...) 나보다 훨씬 많은 교육과 사랑과 관심을 받은 그가 아픈 엄마를 며칠 돌보지도 않고 대책 없이 포기하려 하고 있었다. 엄마에겐 자식이 딱 둘 있으니, 오빠가 안 하면 내가 할 수밖에 없다. 열이 펄펄 나는 돌도 안 된 아기 엄마인 내가. 왜 혜택은 아들이 받고 돌봄은 딸의 몫인가? 인터넷에서 본 글들이 생각났다. 부모의 유산은 아들이 물려받고 모시는 건 딸이 한다, 노년이 편하려면 딸이 있어야 한다, 딸 시집 안 보내고 벌어 오는 돈을 부모가 족족 빼앗아 쓴다…. 대한민국의 모든 억울한 딸에 빙의할 지경이었다.
--- 「아무리 인생은 소풍이라지만」 중에서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전화가 왔다. 원장이었다. “잘 갔지? 아까 가고 나서 엄마한테 이 얘기 저 얘기 전했거든. 유미 씨가 ‘우리 집에 믿을 수 없는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하니 엄마가 울더라고.” 암 수술을 네 번이나 받고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던 오미실 여사가 울었다니. 정신이 안 돌아와서 마냥 밝은가 했는데 엄마는 다 알고 있었나 보다. 자신의 병과 이렇게 시설에 올 수밖에 없는 사정에 대해서…. 나는 집 앞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울었다.
--- 「요양원에서 싹트는 사랑(?)」 중에서
겪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모른다. 치매 카페에 이런 글이 있었다. 정말 죄송스럽지만 자기는 친구 아버지가 암에 걸리셔서 부러웠다고. 자기 아버지도 치매가 아니고 암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고. 그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실제로 겪어 본 사람밖에 없을 거다. 치매는 멀쩡한 사람도 몹쓸 불효자식으로 만드는 슬픈 병임이 틀림없었다.
--- 「지옥이 따로 없구나」 중에서
“야. 이 개 같은 년아.” 처음 들어 보는 쌍욕이었다. “뭐… 뭐? 엄마 왜 나한테 욕해?”“이 썅노무 기집애야. 당장 안 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눈을 감고 ‘엄마는 환자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다, 동요하지 말자’를 되뇌며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이러지 마 엄마… 응? 상황에 맞춰서 행동해야지 이렇게 생떼를 부리면 어떡해? 제발 나 좀 살려 줘. 이게 현재 상황에선 최선이야.” “너는 배부르고 등 따습게 집에서 놀고먹는데 뭘 살려 줘? 나 이런 데다가 처박아 놓고 룰루랄라 하고 있잖아! 나 죽기 일보 직전인데!!” 나는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아 나도 몰라 이제!! 나 지금 팍 죽어 버릴 거니까 엄마도 거기서 죽어! 그냥!! 죽어!!!”핸드폰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엄마가 잠시 멈칫하더니 소리를 질렀다. “그래 죽을 거야!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그냥 다 죽어!!”전화가 끊겼다. 벽에 머리를 박았다. 이 등신아, 아픈 엄마에게 죽으라고 소리 지르는 쓰레기 같은 인간아. 누가 보면 무슨 엄마 간병을 10년은 한 줄 알겠다. 불과 몇 분 전에 크게 깨달은 것처럼 맘을 다잡았건만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나려나」 중에서
탈출할 줄이야. 맨날 뛰어내린다고 협박하더니 진짜로 저질렀네. 무엇을 상상하건 엄마는 그 이상이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어떻게 머리를 짜내든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동시에 가슴 한편이 조금은 후련하기도 했다. 묘하게 시원한 기분. 어이없는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래, 졌다 졌어. 엄마,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살아. 훨훨 날아가. 엄마의 인생은 엄마가 결정해. 나는 이제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할게. 내가 엄마의 딸이고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긴 해도 엄마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건 월권이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주인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살고자 했을 것이다. 아주 짧을지언정.
--- 「창문 넘어 도망친 엄마」 중에서
엄마가 겪은 일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놀라운 것이든, 그녀의 인생은 현재의 일상이 규정할 것이다. 암에 네 번 걸리고 요양원에서 탈출한 일은 이제 엄마 인생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저 오늘 어떤 산책을 하고, 어떤 점심을 먹고, 누구와 통화하느냐가 엄마의 인생을 채울 것이다. 그게 엄마 삶의 본질이 될 것이다. 사실 대단한 무언가가 삶을 이루는 건 아니다. 매일을 채우는 일상의 합이 인생일 뿐이다. 결국 엄마는 자신이 믿는 대로 됐다. ‘나는 살 것이다’ 했는데 정말 살아났다. 그러나 언젠가 엄마의 삶도 끝이 나겠지. 그때까지는 살 일이다. 사는 것처럼 살면서.---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