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어느 날 카페에서 오래된 친구들과 만났습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치로 흘러갔고, 제가 "보수의 관점이 필요한 시대"라는 말을 꺼냈을 때, 테이블에 갑자기 내려앉은 침묵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마치 금기어를 말한 사람처럼 친구들은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 순간 저는 질문했습니다. '왜 보수는 이토록 불편한 단어가 되었을까?‘
우리 시대의 담론 지형은 기묘한 비대칭성을 띠고 있습니다. '진보'는 도덕적 선(善)과 동의어가 되었고, '보수'는 시대착오적 낙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 토론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토론이 아니라 선과 악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본질은 다양한 관점의 경쟁과 균형 아니었습니까?
서재에 꽂힌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시 펼쳐봤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험은 다수의 횡포"라고 경고했습니다. 어떤 의견이든 그것이 비판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견이 아닌 교조가 됩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진보는 종종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비판적 사고와 열린 토론보다 도덕적 우월감과 집단적 동조를 강요하는 현상이 뚜렷합니다.
이 책은 그런 흐름에 대한 저의 지적 반격입니다.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다는 '특이점'에 열광하는 시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정말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진보를 의미할까요? 광장의 함성과 촛불은 더 나은 사회를 가져왔을까요? 고독사가 증가하고 공동체가 해체되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진정 붙들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10년 전, 저는 꽤나 진보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 현장에서 지낸 세월은 저에게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인간은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어떤 제도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에드먼드 버크가 말했듯이, "국가 개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보존의 정신과 개선의 능력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깨달았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킬 가치 없는 혁신은 공허하고, 변화 없는 안정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균형점을 찾는 일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동시에, 저는 지금의 보수가 실패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1인당 2,200만 원의 빚을 짊어진 미래 세대에게 "노력하면 된다"는 조언은 공허합니다. 한 청년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습니다. "선생님, 보수 정당은 항상 전통과 안정을 말하는데, 그게 저희 청년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집도 못 사고,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낳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찰적 보수(Protectism)'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합니다. 모든 주요 정책에 '미래영향평가제'를 도입하고, 한 번의 실패가 평생을 결정짓지 않도록 '재도전 인프라'를 구축하며, 기후 위기·저출산·국가 부채에 맞서 '세대 간 사회계약'을 새로 써야 합니다. 보수가 지켜야 할 것은 낡은 특권이 아니라 모든 이의 가능성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격변을 지나 다시 대선을 앞둔 시점, 분열과 혐오의 정치가 판치는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쪽의 승리가 아닙니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자신만 옳다고 외치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저는 처칠, 버크, 오크숏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지혜와 가족을 잃고 홀로 남은 이웃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성찰적 보수'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냉철함과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따뜻함이 공존하는 정치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으신가요? 과연 오늘의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고개를 들 수 있을까요? 50년 후 역사가들이 우리 시대를 평가할 때,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혼란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시간을 두고 숙성된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책이 현명한 독자 여러분과 함께 그 지혜를 찾아가는 여정이 되길 바랍니다. 보수에게는 성찰의 초대장으로, 진보에게는 대화의 손길로, 그리고 청년들에게는 진정한 희망의 약속으로 다가가길 소망합니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 각자의 답이 모여,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집단적 지혜가 될 것입니다. 그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