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면수는 1873년 6월 10일(음) 수원시 성안 보시동(북수동), 북수리 299번지에서 임진엽과 송씨 사이에 2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 후 한국이 근대화되자 근대적인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을 갖고 수원 양잠학교에 입학, 1903년 졸업하였고, 일어공부를 위하여 화성학원에 진학, 1905년 4월 26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04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수원에서 멕시코이민 모집 대리점을 운영하였다.
구한말 임면수는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근대학교인 삼일학교의 설립에 기여하는 한편, 교감 및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경기도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기호흥학회 수원지부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구한말 상동청년학원에서 활동한 그는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하여 1912년 2월 만주 서간도 환인현 횡도천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만주합니하에 개교한 신흥무관학교의 다른 이름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였다. 1910년대 중반에는 부민단의 결사대에 속하여 활동하였으며, 3·1운동 이후 일제의 간도출병으로 통화현에서 해룡현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 투옥되었다.
임면수는 구한말에는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1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던 인물이었다. 수원출신으로서 수원에서 활동하다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 임면수의 민족운동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그런 유형의 인물은 별로 발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일어학교 출신으로서 일본어에 능하여 편안하고 부유한 삶을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높이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면수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였다. 이에 광복80주년과 멕시코 한인이주 120주년을 맞이하여 조그마한 책자라도 발간하여 임면수의 삶의 여정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책자 간행에는 성주현, 정길화, 김재기교수를 비롯하여 국가보훈부의 정명희, 박준현, 독립기념관의 임공재, 김용진 그리고 양훈도, 한동민, 박철하, 이동근, 김찬수, 김경표 등 수원지역의 연구자들과 한준택, 김영균 등 필동임면수선생기념사업회 및 삼일공고의 김동수, 장성은 교장을 비롯한 삼일상고의 박상풍,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의 김정현 등 여러 선생님들과 조형기, 박영양, 이수원, 박희정, 조성진, 윤의영, 김영길, 최형국 등 평소 가까이 지내는 수원시민들, 그리고 수원문화원 김봉식원장님과 임면수 지사의 손자 임병무님의 무언의 격려도 큰 힘이 되었다. 아울러 독립기념관과 한국이민사박물관의 자료 제공과 자문에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임면수를 비롯한 지금까지 잊혀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보다 많이 조망되기를 바라며, 독립운동가들의 지향점이 조국의 독립과 더불어 인류애의 상징인 정의와 인도와 평화에 바탕한 진정한 휴머니스트 국가였임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5년 6월 문화당에서
청헌 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