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어른들한테 들킬까 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읽어 보았다.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편지 내용은 나랑 꼭 결혼하고 싶으니 27살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 달라고 했다. 상상하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기독교 재단 학교에 다니던 남편은 결혼만 하게 해주시면 절대 마음고생시키지 않고 평생 지켜주겠다고 우리 집 대문 앞에서 하나님께 약속까지 했단다. 그 편지를 읽고 나니 세상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비밀 하나를 품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싶었다. 나는 마음을 굳혔다. 그를 믿고 기다리기로! 그때 남편 15세, 나는 14세였다.(15~16쪽)
- 〈첫 만남〉 중에서
사월 봄날도 화창했고 하객도 많았다. 축하 속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은 부산 해운대로 떠나기로 했다. 기차 떠날 시간이 두세 시간 남아서 신랑·신부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다 가기로 하고 근처 호텔에 갔을 때다.
“당장 머리 감고 화장 지와뿌라. 낯설어 신혼여행 못 가겠다.”
황당했다. 연애할 때도 화장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손톱에 매니큐어 한 번 바른 적 없었다. 결혼식하느라 미용실에서 한 신부화장을 지우라니! 좀 별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신부화장까지 지우라 해서 참 희한하다 싶었다. 어쩌겠는가. 얼굴이 낯설어 도저히 신혼여행을 갈 수 없다는데… 그렇다고 남편 혼자 신혼여행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18쪽)
-〈칠성동 인연〉 중에서
베풂과 희생, 사랑과 봉사는 세상을 비추는 따뜻한 단어들이다. 늘 우리 가까이에 둬야 하는 것들이다. 행여 자랑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남편이 싫어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다. 백 년 천 년 살 것도 아닌데 싫어할 행동이나 말을 해서 얼굴 붉히게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부부는 얼마나 귀한 인연인가. 존중하는 마음만 있으면 TV를 볼 때 손을 놓는 게 이상한 일이다. 평생 손잡고 왔으니 남은 날도 서로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으며 아껴주며 지내려 한다.(36쪽)
-〈칠십 넘어도 손잡고〉 중에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
한참 망설이다 할머니께 이실직고했다.
“이름을 새로 짓고 싶은데 철학관에서 200원이나 있어야 한대요.”
“쯧쯧쯧,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구나.”
할머니는 속곳 쌈지에서 200원을 꺼내 주셨다. 혼내시지도 않고 인자한 미소만 지으셨다. 이튿날 철학관으로 달려가 200원을 드리고 새로 지은 이름을 받았다.
“노은정.”
새 이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개명이 어려워 오랫동안 그냥 부르다가 늦은 나이에 호적에 올렸다. 할머니의 200원이 아니었으면 지금 내 이름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할머니 덕분에 귀한 이름을 얻었다.(49쪽)
-〈새로 지은 이름〉 중에서
할머니에게서는 배울 게 넘쳤다.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종일 앉아 누에고치를 칼로 자르다 보니 피곤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어떤 때는 손가락을 베어 핏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그럴 때도 ‘왜 일하며 조느냐?’고 언성 한 번 높인 적이 없었다. 오징어 사촌인 한치 속에 있는 뼈를 갈아 만든 하얀 가루를 발라주며 크게 안 다쳐 다행이라고 다독여 주셨다. 할머니는 인자함뿐만 아니라 손끝도 야물고 지혜로우셨다.
(중략)
할아버지 또한 마음이 아주 넉넉하신 분이었다. 일 년에 두 번씩 아래채 사시는 분들에게 고기를 구워주셨다. 성당동 도살장에서 쇠고기와 양곱창을 엄청 사 오셔서 숯불 피워놓고 마당에서 고기를 구우셨다. 며칠 동안 고기 냄새 맡는 게 싫어질 만큼 실컷 먹게 하셨다.(69~70쪽)
-〈조부모님의 마음 곳간〉 중에서
여기저기에서 맛있다고 하면 비상금 주머니가 더 홀쭉해진다. 그래도 받은 분들이 모두 맛있다고 메아리를 보내오면 기쁨이 차오르고 내가 행복해져 돈이 아깝지 않다. 맛있는 건 나눠 먹을 때 더 맛있고 어우렁더우렁 사는 맛이 난다.
이촌 시장 건어물 가게 구운 김 한번 맛보면 헤어나지 못한다. 밥도둑이 따로 없다. 단백질 덩어리인 총각네 구운 계란도 맛이 일품이다. 내 눈에는 희한하게도 먹거리가 잘 보이고 고루고루 보인다. 마치 성능 좋은 센서가 장착된 듯 신선하고 영양 좋고 맛 좋은 것을 척척 찾아낸다. 보일수록 돈 쓸 일이 많아진다. 이 사람도 생각나고 저 사람도 생각나고…. 과일을 사러 가도 손으로 만져보지 않는다. 눈으로만 봐도 맛있는 것은 어지간히 다 안다. 이참에 맛 감별사로 나서볼까나?(208쪽)
-〈맛있는 것은 나눠야〉 중에서
경매가 끝나고 화병을 차에 실으려는데 가게를 하신다는 분이 다가왔다. 너무 갖고 싶으니 사신 화병좀 양보해 달라고 했다. 웃돈까지 주겠다고 하시면서…. 통 크게 질렀지만 그분의 표정을 읽으니 그건 우리 집으로 데려올 물건이 아니었다. 물건도 주인을 잘 만나야 제 가치를 발휘한다. 어디 물건뿐이랴. 사람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뒤바뀐다. 더 시간 끌지 않고 그분께 드렸다.(224~225쪽)
-〈물건도 주인을 잘 만나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