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식민지 타자의 얼굴을 마주 본 일본
식민지 민족운동의 영향은 문학의 표상 공간에 저항하는 피식민자를 등장시키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이 일본의 근대문학사에서 갖는 중요성은 종주국의 문학자들에게 피식민자도 ‘내면’을 갖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줬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3·1운동 이전에 일본의 문학자들에게 식민지 조선인들의 내면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인이라는 타자는 문명화에 뒤쳐진 나라에서 살아가는 지적으로 열등하고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존재이며, 어떤 진보의 욕망도 없는 비개성적인 존재처럼 간주되었다. 민둥산을 배경으로 흰 옷을 입고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주름진 얼굴의 노인의 모습은 바로 망국의 민중을 상징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었다. 즉, 그들은 식민지의 풍경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했다. 그런데 3·1운동을 거치면서 소설 속의 조선인들 가운데 점차 내면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3·1운동을 통해 조선인들은 지배에 순응했던 태도의 이면에 저항의 마음을 키우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 마음이 자리잡는 비가시적 장소로써 조선인의 내면이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3·1운동을 일본인이 조선인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들을 통치의 대상으로만 바라봤기 때문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으로 파악했다. 그는 일본에 대한 반항의 마음이 자리잡는 장소로서 조선인의 내면을 정의했던 최초의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나카노 시게하루는 강제추방을 당하는 조선인들의 내면에 천황에 대한 복수심을 부여하는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식민지적 타자 인식에서 일어난 내면의 발견은 비단 문학 내부의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타자의 내면에 일본에 대한 반항의 마음이 자리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3·1운동과 같은 ‘반란’에 관한 기억과 결합했을 때, 그것은 타자에 대한 항시적인 불안을 식민자의 내면에 발생시켰다. 그런 점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향해 나타났던 일본의 집단적 폭력은 조선인에 대한 멸시의 감정이 낳은 우연한 사건으로 처리될 수 없다. 이때의 광기에 가까운 일본인의 폭력은 조선인은 잠재적 위협이라는 타자에 대한 공포심과 3·1운동에 대한 다분히 ‘피해망상적’ 기억이 쌍방을 증폭시키는 심리적 과정을 가정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식민지 출신자들의 반항에 대해 일본인들이 품었던 공포는 지진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시기 동안 식민지적 타자를 바라보는 ‘정치적 무의식’과 같은 형태로 진화했다.
식민지의 재현, 우월의식, 이중성에 대하여
이 책의 3부 각각은 예외적 오리엔탈리즘의 정황을 보여주는 세 개의 다른 사례를 다루고 있다. 제1부가 식민지의 재현을 둘러싼 식민자와 피식민자 간의 긴장을 보여준다면, 제2부는 열등한 타자상의 이면에 존재했던 일본인의 타자에 대한 불안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제3부는 타자를 일종의 방법으로 삼아 내셔널리즘과 대결했던 나카노 시게하루의 문학적 저항을 조명하고 있다. 각 부의 내용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제1부 「예외적 오리엔탈리즘의 표상 공간」에서는 동양에 대한 표상 행위를 독점했던 유럽과 달리 제국 일본은 타자의 표상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술한다. 제국 일본은 동화정책이 낳은 식민지 출신의 ‘탁월한 모방자’에게 부분적으로 표상의 권한을 허용했고, 식민지 표상의 해석을 둘러싸고도 식민지 지식인들의 반응과 항의에 응답을 요구받았다. 이처럼 근대 일본의 식민지를 둘러싼 표상 공간은 오리엔탈리즘의 논리가 통용되는 세계이기는커녕, 일본이 오리엔탈리즘의 주체가 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재조일본인의 체험을 가진 나카지마 아쓰시의 소설, 타이완 유학생들이 쓴 일본어 소설, 그리고 장혁주가 극본을 쓰고 무라야마 도모요시가 연출한 일본어연극 〈춘향전〉을 다룬다.
제2부 「불온한 타자와 제국의 생명정치」에서는 근대 일본의 타자 인식이 식민지주의적 우월 의식만이 아니라 식민지적 타자에 대한 깊은 공포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을 다룬다. 우선 야나기 무네요시가 3·1운동을 경험하면서 조선인의 ‘마음’으로 눈을 돌리게 된 과정을 그의 1910년대 생명사상과의 연속성 위에서 검증할 것이다. 식민지 주민에 대한 근대 일본의 불안감을 가장 극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사례로 일본의 우생학 담론을 들 수 있다. 우생학은 대표적인 타자 배제의 담론으로 알려져 있다. 우생학이 타자 배제를 주장했던 이유는 피식민자와의 혼혈이 일본인의 ‘우수한 자질’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식민지 출신자의 생물학적 열등성은 일본인의 우수성을 침식할 수 있는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우생학에게 피식민자의 열등한 자질은 이중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할 ‘질병’이자 동시에 일본의 민족적 파국을 상기시키는 공포의 원천이었다.
제3부 「나카노 시게하루와 대항의 문학」은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자인 나카노 시게하루가 일본 내셔널리즘과 벌였던 사상적 대결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그는 개인을 ‘무산계급’의 일원으로 표상하는 사회주의적 상상력에 비판적이었다. 그에게 이것은 개개인을 일본 ‘민족’ 혹은 천황의 ‘신민’으로 표상하는 내셔널리즘의 논리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소설 속에 천황제 국가에 저항하는 인물들을 그리면서도, 그들의 비극과 곤란을 억압받는 집단의 비극으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에 대한 그의 비판적 거리두기가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민족해방을 지지했지만, 근대 일본의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통해 일본과 조선의 민중을 천황제 국가에 맞서는 정치적 주체로 호명했지만, 두 저항하는 집단의 관계에 대한 그의 묘사는 대등한 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카노가 평생에 걸쳐 수행했던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즘과의 격투는 내셔널리즘을 넘어선다는 것과 대등한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여전히 그 유효성을 잃지 않고 있다. 제3부는 이런 나카노문학의 가능성을 ‘대항의 문학’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