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일제 식민지통치로부터의 민족해방 80주년이다. 감회가 크고 깊음을 많이들 얘기할 것이다. 8.15 하루만을 기려서가 아니라, 그 80년 사이의 한국현대사를 점철했던 수많은 기복과 부침, 갖가지 파행과 굴절이 자연히 떠올려지고, 그 와중에도 우리 국민이 이루어낸 놀라운 도약과 드높은 성취에 뿌듯함을 느끼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는 그런 말과 느낌을 더없이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형국이다. 어이 알았으랴? 역사의 시침을 40년, 아니 80년 전으로 확 돌려놓고 시대의 공기를 전제의 공포와 한없는 묵종으로 가득 채우려는 반동의 시간이 엄습해올 줄을.
그래서일까? 학창시절 배웠던 사회변동 이론들 중에서 소로킨(Pitirim A. Sorokin)의 순환론이 긴 호흡의 시간 리듬에서는 가장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사실 그것은 고대 이래 동양인들의 자연관과 역사관의 요체이기도 했다.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이유는 거대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세워진 그것을 비판하고 허물기 위해서라는 니체(F. Nietzsche)의 선견적 충고에 더욱더 공감이 가는 것도 그런 연관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사 80년에 대한 회고와 평가는 더 긴 안목으로 다시 해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또한 오늘 우리가 겪는 중인 낙담과 우울도 그런 견지에서 해소하고 걷어내 가야 하리라는 생각이다. 이 대목에서 요청되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사 공부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적 근대 속의 선조들이 일제 타도 후에 어떤 나라를 어떻게 세우고 만들어가려 했는지에 대한 본격적 탐구가 되고, 벼락같은 깨우침의 발원처도 될 것인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 역의 논리도 성립한다. 현대사 80년에 대한 단순 감회를 넘어서는 고뇌 어린 성찰과 같이 갈 때 독립운동사 공부가 잡다한 사실의 집적이나 위인 현양의 수준을 넘어서 방향감각을 얻고 제 의미를 찾으면서 빛을 발하게도 되리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붙인 것이다. 공연한 멋 부림이 아니다. 사회학적 사고의 특장이라 할 장기거시적·전방위적 및 구조론적 시각의 확보와 ‘장막 걷어내기’(debunking) 방법의 활용으로 멀리 조망하고 넓게 둘러보면서 이면의 숨은 진실도 속속들이 밝혀 드러내는 식으로 독립운동사도 연구하고 해명해보자는 제언이다. 또한 자기다짐이기도 하다. 그 뜻을 정확히 표현하면 《독립운동의 역사사회학을 향하여》가 맞겠으나, 절약의 묘를 얻고자 조금 줄여 적은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논급할 대상은 부제로 명기된 바와 같다. 그렇게 설정된 세 주제가 실제로 상호 연결점을 가졌었고, 부마다 세 개씩 배치된 장들도 서로들 내용 면의 접점을 가져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부별 경계선도 뚫고 간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세 주제에 관한 통사인 것은 전혀 아니다. 훨씬 작은 범위의 부분적 논의로 한정시켜짐을 미리 말해둔다.
제1부에서는 3.1운동 직후에 본격화해 간 의열투쟁의 초기 국면에 있었던 모종의 비화와 그 진상을 먼저 다룬다. 두 운동단체의 사례 연구가 되는 것이기도 한데, 우선은 의열단 ‘창립단원’의 인원과 명단에 관한 통설에 석연치 못한 문제점이 일부 있음을 지적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 본 결과를 제시한다. 결론을 아예 제목으로 부각시켜 놓았다(제1장). 이어서 창립 직후에 의열단이 총력을 기울여 추진해간 바 국내의 3대 일제기관을 타격하려던 폭탄거사 기획이 허망하게도 완전 실패로 끝나버린 원인과 곡절을 새로 밝혀내고 전체 경과를 재현시켜 보았다. 간간이 입에 오르내리는 ‘밀정’ 문제, 혹은 ‘독립운동가’로 후일 호명되는 이들 중에도 옥석이 섞여 있음을 환기해 일깨우는 글이 될 듯하다(제2장). 의열단보다 조금 늦게 서울서 결성되어 시가전 방식의 웅대한 거사를 도모해간 암살단의 계획도 추진 막바지에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리된 경위와 곡절도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본다(제3장). 두 단체의 첫 의거가 다 실패했음을 부각시켜 강조하는 냉소적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본의가 거기에 있지 않음은 다들 아실 것이다. 그런 실패로부터 도출해볼 수 있을 반면교사적 교훈과 함께, 주밀·엄혹한 일제의 감시·통제체계 속에서도 감행되던 거사 시도의 의의를 하나씩 뽑아내 널리 알리려는 것임이 이해되었으면 한다.
제2부에는 왕왕 쟁점처럼 되어 온 것이기도 하지만 의열투쟁과 테러·테러리즘이 과연 같은 것인지, 만일 그러하다면, 또는 아니라면,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지를 역사적 의미론과 사회학적 이론들에 비추어 살펴보고 해명도 해보는 글을 필두로(제4장), 3.1운동 때 한국민중이 벌인 폭력시위 사례가 통설과는 달리 적지 않았음을 구명하고, 그런 항쟁의 맥락이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과 「용과 용의 대격전」(1926)에서 웅변으로 개진되는 ‘민중혁명적 폭력’의 사상과 어떻게 맞물려 조응하며 독립운동의 방법론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를 띠었는지를 상고해보는 글을 실었다(제5장). 이어지는 글에서는 의열단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조선혁명선언」의 사상과 정신이 그 후의 의열단 자신과 그 후계조직처럼 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운동 이념 및 실천 행로에서 어떻게 계승되고 구현되어 가는지를 추적해 본다(제6장).
제3부는 오롯이 조선의용대의 역사에 할애하여, 그동안 간과되었거나 잘못 알려졌다고 판단되는 몇 가지 측면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살펴본다. 우선은 창설 후 2년간의 전기 활동 국면에서 조선의용대가 중국 국민당군의 전략방침대로 선전공작에만 매몰되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군과 직접 대적의 전투에도 참가한 경우가 많았음을 새로이 밝혀내 조명한다. 김원봉 직계의 2개 지대는 화북과 강남전선으로 각각 파견되어 적후공작과 실전의 경험을 미리 쌓아두도록 했음도 상설된다(제7장). 1941년 봄에 조선의용대 전 병력의 80%에 달하는 인원이 낙양 집결 후 황하를 건너 태항산의 중공당 팔로군 지구로 들어가 기착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어간 데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만큼 견해들이 달랐고, 경위와 이유에 대한 추론 또는 설명도 많이들 엇갈리면서 상당 부분 애매함이 남아있었다. 이에 저자는 그 문제를 다시금 여러 각도에서 따져보고 최대한의 객관적 견지에서 사실과 진상에 접근해보려 했다. 문제가 하도 복잡한지라 재고에 재고가 거듭되었고, 원출처의 논문을 여기에 싣는 중에도 수차의 수정·개고가 행해졌음도 아울러 밝힌다(제8장). 화북진출 5개월 만에 조선의용대는 일본군과 두 차례의 전투를 치렀는데, 관련 기술들이 불충분하거나 모호하고 일부 과장된 점도 있어 보였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폭넓게 수집하고 종합적인 비교검토를 통하여 전투 실황을 복원해내는 한편, 전사한 대원들의 신원과 이력도 재확인해 상세히 밝혀보았다. 이 교전 사실에 대한 중경 총대부의 인지와 내용 파악이 왜 그리 지체되었으며, 그것이 의미해주는 바는 무엇이었을지도 아울러 숙고해보았다. 그것이 조선의용대의 이후 행로 및 존립의 운명과 직결될 문제였음도 같이 논해진다(제9장).
제4부에는 근간에 저자가 수집했거나 제1착으로 접한 자료인 조선의용대 기관지의 국내 영인본 결락분, 조선의용대(1941) 및 조선민족혁명당(1943) 간부진의 사진, 정당통일 교섭 결렬(1942)의 경위 보고문을 차례로 소개하는 세 편의 해제문을 싣는다. 이 또한 조선의용대의 묻힌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구명해내 알리면서 어느 모로 추념도 해보고픈 뜻을 담아서이다.
이상의 글들은 지난 10여 년 사이 여러 학술지의 지면이나 학술회의를 통해 발표했던 것들을 저본으로 하면서 이번에 새로 다듬고 부분적으로 수정·보완도 한 것이다. ‘고희’를 갓 넘긴 마당에 살아온 자취를 한 번 돌이켜보고, 여력이 있는 한은 학구를 계속하리라는 각오를 다지고 받쳐줄 연료를 자가공급하는 의미도 약간은 있을 듯하다. 각 편의 주제와 키워드들만으로는 저자의 오래전 저서들의 논의 범위에 포함되거나 일부 겹쳐 보이는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논제와 논의 내용 자체는 반복되는 것이 거의 없음을 언명해두려 한다. 새 자료를 활용하고, 새로운 시각을 도입했으며, 새로운 연구결과를 담아놓은 것이다. 한 가지 첨언하면, 근래 들어 한국독립운동사가 지나치게 임시정부 중심으로, 그리고 인물 위주로 치우쳐 연구되는 경향이 조금 우려되는 바 있다. 그러므로 얼마간은 이의 제기를 하고, 균형 잡힌 시각과 폭넓은 접근을 강조하고픈 의미도 이 책의 출간에 담겼음을 말해두고 싶다.
『한지성의 독립운동 자료집』에 이어 도서출판 선인과의 인연이 다시금 맺어진다. 윤관백 대표님의 각별한 배려와 후의에 감사하며, 편집실과 디자인실의 여러분이 수고해주셨음에도 사의를 표한다. 눈 밝은 동학과 독자의 눈에 띄는 오류나 오기가 혹시 있다면 전적으로 저자의 책임이다. 제현의 아낌없는 질정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25년의 3월을 보내며
금호강변 우거에서 저자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