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60주년을 맞은 송승환의 드라마틱한 삶
담담한 글과 따뜻한 그림으로 엮은 그림에세이
송승환은 독특한 인물이다. 널리 알려진 ‘연예인’이지만 막상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안방극장에 익숙한 시니어 층에게는 많은 드라마에 출연했고 간간이 쇼 프로그램 MC도 맡았던 동년배의 ‘탈랜트’로 기억된다. 공연 좀 봤다는 중장년층은 〈유리동물원〉이나 〈에쿠우스〉, 〈아마데우스〉 같은 화제작에 잇따라 출연했던 베테랑 연극배우로, 나아가 〈난타〉라는 세계적 퍼포먼스의 기획자로 그를 기억한다. 그의 옛 모습을 알지 못하는 청년들에게는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을 멋들어지게 연출한 세계적 감독의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렇듯 세대에 따라, 문화적 체험의 폭에 따라 다양하게 기억되는 그가 데뷔 60주년을 맞아 『나는 배우다, 송승환』이라는 그림에세이를 펴냈다. 미술기자 출신의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나소연이 장 자끄 상페를 연상시키는 따뜻하고 개성 있는 드로잉으로 송승환의 지난 시간들을 시각화한다. 그림에세이라는 콘셉트에 맞게 책의 판형도 여느 단행본들과 달리 상페 스타일의 그림책에 가깝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던 이유
청춘스타의 비애와 〈난타〉의 환희, 그리고 평창올림픽 직후의 시각장애 판정!
빛나고 화려한 순간들 사이, 어둡고 아득했던 좌절의 시간들
제목에서 드러나듯 그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은 배우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순히 ‘배우 인생 60년’을 회고하거나 대표적인 작품들을 소개하는 통상적인 자서전인 건 아니다. 그가 써내려간 건 빛나고 화려했던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들 사이에 존재했던 혼돈의 시간들이다. 달리 말하면, 관객들 앞에 드러난 밝은 무대가 아니라 조명과 조명 사이 암전의 시간들이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고 다채롭다. 10대 초반에 아역 최초 ‘동아연극상’ 수상, 10대 중반에는 〈아씨〉와 〈여로〉 같은 당대 최고의 인기 드라마 출연, 20대 초반에 첫 뮤지컬 제작, 30대 초반에 한국 최초로 비(非)전속제 기획극단 설립, 40대 초반에 〈난타〉로 한국 최초 브로드웨이 진출, 그리고 60대 초반에는 전 세계의 주목과 찬탄을 이끌어낸 평창 동계올림픽.
여기까지가 다들 알고 있는 그의 삶이다. 정확히 말하면, 삶이라는 무대의 빛나는 하이라이트다.
하지만 조명이 환할수록 암전은 어둡기 마련이다. 가세가 기울면서 연기를 포기했던 수험생 시절,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던 날, 귀국 후 모든 것을 쏟아부어 대작을 만들었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던 허망한 시간, 그리고 평창의 영광이 끝나자마자 찾아온 시력 약화와 시각장애 판정…. 이 막막하고 암담했던 순간들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어떤 역할도 내 실제 인생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삶이란 무대 위의 연기와 달라서 연출자의 속내를 알 수 없고, 당장 다음 씬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예측할 수 없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삶의 대본 앞에서, 나는 늘 어설픈 즉흥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비현실적 설정과 극단적인 롤러코스터 인생!
미리 읽었다면 단박에 거절했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프롤로그」 중에서)
사연이 많은 만큼 글도 빽빽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책에 실린 30여 개의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두 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화려했던 청춘스타 시절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떠나던 날도, 〈난타〉가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고 평창 밤하늘이 드론으로 빛나던 꿈같은 순간들도 모두 절제된 문장으로 짧고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 그동안 내 삶을 지나치게 소비해온 건 아닐까? 이런 시간들이 과연 내 인생에 득이 될까? 긴 고민 끝에 내린 짧은 결론!
“뉴욕으로 가자!” (「몰락, 그리고 출국」 중에서)
2003년 9월. 〈난타〉는 마침내 꿈의 무대에 섰다. 대한민국 최초의 브로드웨이 개막작이었다. 브로드웨이 공식 팸플릿 〈플레이 빌〉에도 우리의 공연 소식이 실렸다. 홀로 뉴욕을 떠돌던 시절, 한없는 동경심을 품은 채 들여다보던 바로 그 책자였다.
그날 나는 두 번 울었다. 〈플레이 빌〉을 펼쳐보면서 한 번, 그리고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보면서 또 한 번.
그렇게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완성되었다. (「꿈의 무대 브로드웨이」 중에서)
개막식 때 오륜기를 형상화했던 드론은 폐막식 때 평창의 마스코트인 수호랑으로 변신했다. 거북이와 민들레 홀씨의 상여 행렬에 이어 신인류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간의 축’이 평창의 밤을 밝혔다. 〈난타〉에 이어진 또 하나의 인생작! 잊지 못할 평창올림픽이 서서히 저물어갔다. (「잊지 못할 평창의 밤」 중에서)
시력 약화 과정도 마찬가지다.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찾아갔던 미국의 유명 안과에서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아득한 절망감을 그는 단 두 줄로 표현한다.
그날 밤에 나는 혼자서 펑펑 울었다.
인생에서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이었다. (「어두워지는 세상」 중에서)
그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을 맞았을 때의 느낌은 어땠을까? 예전보다 흐릿한 하늘, 그러나 여전히 보이는 하늘! 아마도 삶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을 그 순간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래, 나는 아직 세상을 볼 수 있다! 단지 예전보다 좀 희미해졌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고 되돌릴 수 없다면, 이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 절망은 그렇게 새로운 삶의 의지로 바뀌었다. 그날 아침에 보았던 짙푸른 하늘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여전히 푸른 하늘」 중에서)
짧은 글에 담긴 긴 시간. 그 여백을 채워주는 건 그림이다. 어린 승환이 청춘스타를 거쳐 당대의 공연기획자로 변신하는 과정, 평창을 통해 세계적인 감독으로 우뚝 서는 과정, 시력 약화라는 시련을 딛고 다시 무대 위의 배우로 복귀하는 과정이 그림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다. 삶의 여러 모퉁이에서 느꼈을 갈등, 설렘, 절망 그리고 환희를 담아낸 50여 개의 그림들은 이 책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이며, 책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불편함과 불가능의 차이, 그리고 계속되는 도전
다시 무대에 선 60년차 배우의 한마디, “나는 배우다!”
“나는 배우다”라는 굵고 짧은 선언(프롤로그)으로 시작된 책은 “나의 마지막 꿈은 노역 배우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에필로그)이라는 고백으로 끝난다. 얼핏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말이 유독 강한 울림을 주는 것은, 지금 그에게 가장 힘든 게 바로 연기인 까닭이다.
그는 남들처럼 대본을 펼쳐놓고 읽지 못한다. 힘들게 대본을 암기하더라도 상대 배우의 표정이나 동작을 볼 수 없다. 무대장치나 소품도 보이지 않고, 본인과 상대역의 동선도 미리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자칫 대사가 엉키거나 소품에 부딪칠 위험이 있고, 심지어 무대에서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천생 배우라고 믿는 그에게 이 모든 것들은 단지 하나의 ‘불편함’일 뿐이다.
‘불편함’은 ‘불가능’과 다르다. ‘시각장애 4급’이라는 나의 장애등급은 불가능이 아닌 불편함의 척도일 뿐이다. 30센티미터 안쪽만 간신히 볼 수 있고 그 너머는 흐릿한 형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못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서)
그렇게 배우 송승환은 다시 무대에 섰다. 2024년에 〈웃음의 대학〉과 〈더 드레서〉에 출연했고, 2025년에도 국립극장에서 〈더 드레서〉에 출연할 예정이다. 이 작품에서 그가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건 어쩌면 극중 인물이 아닌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배우이자 극단주이며, 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무대에 오르는 늙은 ‘선생님’이 그의 배역이기 때문이다. 노배우로 분장한 노배우! 내가 연기하는 또 하나의 나! 관객들의 표정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는 더없이 행복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다. 이 책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더 드레서〉에서 리어왕으로 분장한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리허설 때 상대 배우의 표정을 장면별로 촬영해서 기억에 담아놓고, 공연 때는 그 표정을 상상하면서 연기를 했다. 시력의 공백을 기억력과 상상력으로 메운 셈이다. 관객들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중요한 대목마다 빵빵 터지는 웃음소리를 90분 내내 들을 수 있었다. 행복했고, 자랑스러웠다. (「다시 무대에 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