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기록된 전투들
고고학과 문헌에서 매우 오래된 전쟁의 흔적이 나타나지만, 군사적 사건들은 기원전 제2천년기 후반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13세기, 시리아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를 상대로 어렵게 승리한 카데시 전투(기원전 1274년경*), 그리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국에서 11세기에 상 왕조의 멸망과 주 왕조(제3왕조)의 등장을 본 목야 전투(기원전 1046년경*)가 있다. 이 같은 대규모 전투는 역사상 처음으로 충분히 문서화된 덕택에 우리는 당시 상황과 진행 과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전술을 분석할 수 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일어난 이 전투들의 공통점은 고대 전차가 결정적인 무기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당시 전차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 학자들 사이에 아직 이견이 있다. (12쪽)
마케도니아 모형
반야만적인 상태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필리포스 2세의 치세(기원전 359~336년) 당시 장갑보병에 진정한 혁명을 가져왔다. 필리포스는 창으로 무장한 강력한 충격기병과 긴 창(사리사)을 쓰는 조직적이고 잘 훈련된 보병의 팔랑크스를 결합해서 전문화된 군대를 편성했다.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그의 정예부대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코린트 동맹을 굴복시켰다. 필리포스의 사후,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대왕)는 기원전 334년에 페르시아 제국 침략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이어받았다. 10년 만에 그는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무찌르고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아시아 제국을 건설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수십 개의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페르시아 혼합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신격화된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기원전 323년에 32세로 병사했고, 그의 장군들인 디아도코이(후계자들)는 제국을 차지하려고 싸웠다. 그 결과, 기원전 3세기에 지중해 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 개의 큰 헬레니즘 왕국이 남게 되었는데, 이집트의 라기데스(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가 그것이다. 한편 서쪽에서는 로마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16쪽)
로마, 정복하는 도시국가
로마는 초기부터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의 영향을 받아 시민 중무장 보병을 군사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기원전 6세기의 세르비우스 개혁은 사회와 군대를 엄격하게 분류하고 계층화했다. 이렇게 해서 세 줄로 배열된 (트리플렉스 아키에스) 마니풀루스 군단이 탄생했다. 이는 전술적으로 아주 유연한 조직이었고 그 시대 최고의 군대가 되었다. 그러나 기병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보조병을 점차 늘려야 했다.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로마는 이탈리아를 넘어 세력을 확장해서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강국들을 정복하며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모델을 완전히 대체했다. 기원전 2세기 말의 ‘마리우스 개혁’은 점점 더 먼 지역에서 싸워야 하는 군단을 합리화하고 통일했으며, 곧 이탈리아인과 그 외 지역 사람들을 통합해 20년간 복무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군사 식민지가 급증했다. 군대가 전문화할수록 병사들은 로마보다 장군들에게 더욱 충성했다. 공화국의 마지막 세기에는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51년)했을 뿐만 아니라 옵티마테스(귀족파)와 포풀라레스(민중파)의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대규모 내전을 치른 후에야 결국 제국이 탄생했다. (22쪽)
전방위의 십자군 원정
11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기독교 세계는 근동, 이베리아 반도 등지에서 기독교 신앙의 적으로 지목된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단결해서 대항해나갔다. 유럽 북동부에서는 경제적 가능성이 풍부한 영토를 차지하면서 기독교를 위해 싸운다는 개념도 생겨났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 군사와 종교가 밀접하게 얽힌 원정을 거듭할수록 막대한 비용과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했지만, 원정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국경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 전쟁의 맥락에서 1129년에 템플[신전] 기사단과 같은 유명한 종교 기사단이 창설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십 개의 기사단이 생겨났다. 초기의 기사단들은 성지와 순례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지만, 점차 경제력을 갖춘 종교적·정치적·군사적 실체로 변모하게 되었다. (34쪽)
등자: 진화인가, 혁명인가?
등자는 확실히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유래했을 것이며, 가장 오래된 유물은 기원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등자는 4세기에 중국에서 확인되었고, 아바르족을 통해 또는 그들과 함께 6세기에 비잔티움에 도달했다. 중무장 기병인 카타프락타이cataphractaire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지만, 기병은 등자 덕분에 모든 전투 상황에서 몸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창을 비롯해 칼, 철퇴, 심지어 활을 쓸 때도 전투력과 충격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41쪽)
군사적 진화인가, 군사적 혁명인가?
중세 말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은 전쟁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제프리 파커Geoffrey Parker)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군사 혁명’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화기를 개선하고 총검(프랑스, 1703년)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면서 더욱 균일하고 규율 잡힌 보병이 등장하는 대신, 창병·도끼병·궁수·석궁병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 보병들은 점점 더 복잡하고 정교하며 정확한 전술과 기동력을 바탕으로 넓은 대형을 이루어 싸우게 되었다. “그들은 정조준보다는 빠르게 쏘는 것을 중시했다. 프랑스·프로이센·영국 모두에서 정확하게 쏘기보다는 전장에 거의 끊임없이 탄환을 퍼붓기를 원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빠른 속도로 연속 발포하는 것이었다.”(콜랭Colin 장군) 전쟁은 병력, 비용, 물류 요구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대규모 현상이 되었다. (60쪽)
1917~1918년 전선을 돌파하다
1917년 군사적으로 교착 상태가 지속되고 양측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결정적인 결과는 없었다. 이때 새로운 전술과 신형 무기, 특히 1915년부터 영국과 프랑스에서 개발된 전차가 등장해 판도를 바꾸었다. 1917년 2월과 11월의 두 차례 러시아 혁명은 동부 전선의 균형을 뒤흔들었고, 1918년 봄에 중앙 동맹국들은 국지적인 평화를 틈타 서부 전선으로 병력을 돌릴 수 있었다. 한편, 1917년 4월에 미국이 참전했을 때부터 협상국들은 주도권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온 미군 병사 수백만 명이 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독일은 이 시간을 활용해 서부 전선에서 전쟁을 재개하는 마지막 시도로 대규모 봄 공세를 펼쳤다. 1918년은 이동전의 양상을 다시 보여주었고, 1914년 이후 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고 많은 희생을 낳은 해가 되었다. 하지만 여름이 되자 프랑스, 이탈리아, 마케도니아 등지에서 지친 중앙 동맹국들이 하나씩 항복하게 되었다. (84쪽)
1944~1945년 거대한 공세와 ‘대연합’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승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80년 동안 각 나라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다. 사실, 이 질문은 진정한 세계대전의 맥락에서 큰 의미가 없다고 쉽게 답할 수 있으며, 1945년의 승리는 무엇보다도 역사상 유례없는 연합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소련과 어느 정도는 중국이 대연합의 대륙적 축을 형성해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추축국의 병력을 대부분 소진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영연방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경제적 동원력과 전례 없는 자원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질러 작전을 펼칠 수 있었고, 이렇게 해서 ‘세계 유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중략) 1945년 5월, 연합군은 폐허가 된 독일의 중심에서 서로 만났다. 몇 달 후, 일본은 궁지에 몰리다가 마침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은 후 항복했으며, 동시에 소련군은 만주를 침공했다. 1945년 9월 2일, 마침내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 막을 내렸다. (92쪽)
한국전쟁, 축소판 세계대전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잘 조직된 기갑부대를 앞세워 남한을 침공했다. 남한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북한은 중국과 소련 등 공산주의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다. 남한과 유엔의 깃발 아래 모인 다수의 동맹국은 잇따른 패배 끝에 부산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주도권을 되찾았다. 남한 측이 반격에 성공하고 중국 국경 가까이 다가서자 베이징이 개입했다. 유엔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게 되었다. 그 후 전선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종결되었지만, 평화조약은 끝내 체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남한과 북한은 실질적으로 여전히 전쟁 상태에 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한 국가 외에도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이 몇백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의료부대를 파견했다. (106쪽)
사이버 전장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른바 고강도 분쟁의 출발점이었다. 교전국들은 광범위한 수단과 작전방식을 대대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모든 분쟁과 마찬가지로 이용 가능한 기술을 총동원해서 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하고자 한다. 그 결과, 이제 (전투의 중심에 갇힌 민간인도 포함해서)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 덕분에 전장은 사이버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전략적으로 정보 우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보이지 않는’ 무기가 되었다. 가짜 뉴스나 적의 선전을 무너뜨리는 역정보를 퍼뜨리는 것은 현대 전쟁에서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한편, 현장의 부대들은 종종 적의 동향을 더 잘 파악하고, 그에 대응할 방안을 더 잘 알게 되지만, 디지털 시대가 전쟁을 덜 치명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110쪽)
전략적 지속성: 어떤 전쟁이며,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 왜 그리고 어떻게 전쟁을 하는가?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하는가? 고대 사상가들은 이러한 질문으로 깊이 고뇌했지만, 단순한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기원전 제1천년기 중반, 중국에서 손자는 이미 『손자병법』이라는 고전적인 저작을 집필했다. 이 저작은 심리적 요소가 강한 ‘간접전’의 원칙을 담고 있으며,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중요한 참고서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략) 인류는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일을 두 번이나 겪었다. ‘전쟁’이라는 현상은 여전히 현대 사회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며,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114쪽)
전쟁 속의 여성
전쟁은 남성만의 일이 아니다. 여성은 후방에서 ‘이차적’ 역할만을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심지어 보조 역할을 할 때조차도 여성은 필수적 존재이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싸우도록 남편(과 아들)을 격려하는 스파르타 여성의 모습처럼 그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여성은 군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지원한다. 그들의 지원 역할(혹은 공장과 농장에서 남성을 대신하는 역할)이 그들을 그늘 속에 있게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 또한 전투원이다. 남성처럼 그들도 적을 죽인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일부 여성은 남자로 가장하고 참호 속에 있었다. 그들은 군대의 지도자가 되어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지휘하며 승리나 패배로 이끌 수 있고, 때로는 영광이나 치욕 속에서 희생으로 내몰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만큼이나 전쟁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그들은 전쟁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전쟁을 결정하기도 한다. (128쪽)
뉘른베르크, 도쿄, 전후의 주요 재판들
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연합국이 주도한 재판은 전쟁과 관련된 국제 정의의 실제적인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쌍방이 서로 비난할 소지가 있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민간인에 대한 공습을 다루지 않았으며, 일본 천황에게 면책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논란거리가 되었다. (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