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사이코들을 한 권의 책에 모아야겠어.’ 불시에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성진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본 직후였다. 〈성난 사람들〉은 착실하지만 좀처럼 일이 안 풀리는 남자와 출세했지만 삶에 영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가 어느 날의 난폭 운전을 계기로 서로에게 맹목적인 화풀이를 해대는 코미디극이다. 쌍방으로 뿜어내는 막장 분노는 그들 각자의 조미調味된 사회성과 달리 역대급 병맛에다 급발진의 연속이라 회차가 거듭될수록 내 안의 광기를 자극했다. 급기야 이런 대사가 나올 땐 급소가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그거 알아? 80년대생들은 죄다 맛이 간 거?”
_「프롤로그」, 7쪽
“잘 봐! 내가 정열이 무엇인지 보여주겠어!”
드디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벌컥 화를 내며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딱 벌렸다.
극장 안, 상영관 밖, 그 좁은 공간에서, 그녀가 타오르고 있었다. 노란색, 푸른색, 붉은색, 적자색의 열이 처음에는 사람 모양으로, 그다음엔 점차 허물어져서 너울거리는 불길이 되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그것, 정열이 화한 불길을 보면서,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 존재가 뒤흔들리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의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질러대는 비명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와 대면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는 타버린 입술을 떨리는 혀로 핥으며 생각했다.
_「정열」, 34쪽
문을 열자 곧장 언니의 우물거리는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관에서 죽은 아이의 심장을 파먹고 있다……. 우리가 왜 그때 셋 다 크게 당황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런 인상을 받았다. 언뜻 문을 도로 닫으려고 했다. 방안에는 연기가 가득했고 고기 타는 냄새가 코를 비릿하게 했다.
언니가 한참 우물거리다 불현듯 나를 쳐다보던 그 시선을 선배의 눈으로부터 감추고 싶었다. 나만 어떤 환상에 순간적으로 사로잡힌 것인지도 모른다. 등 뒤에서 죄송합니다, 한창 식사 중이신데, 하는 덤덤한 소리가 나를 깨웠다.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언니 역시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가스불을 끄고 프라이팬 위에 있는 고깃점을 접시에 주워 담았다. 혼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_「식성」, 50~51쪽
사체가 이송되어온 지 5일 만에 부검을 하기로 했다. 부검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메스로 귀밑에서 배꼽까지 지퍼를 내리듯 가른 뒤 피부 조직을 조금씩 절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절개를 해도 그리 눈에 띄는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위를 적출할 때였다. 위를 열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위에 나비가 가득 차 있었다. 소화가 어느 정도 된 것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이제 막 소화가 될 순간을 기다리던 것 같았다. 개중에는 애벌레처럼 생긴 것들이 꿈틀거리며 기어다니기도 했다.
_「나비」, 90~91쪽
미끈거리는 다갈색 장어 모양의 이 동물은 다른 물고기를 공격할 때 우선 제 몸뚱이로 매듭을 만든 뒤, 이빨로 상대방의 아가미 속을 파고들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몸의 매듭을 마치 나사못처럼 이용해 회전시키기 시작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몸을 상대의 몸 안으로 송두리째 박아 넣은 뒤, 죽어버렸거나 죽어가는 먹이를 안에서부터 먹기 시작한다는 거였다. 결국 먹이는 껍질과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된다는 섬뜩한 이야기였다.
_「마녀물고기」, 122쪽
며칠이 지나도록 나는 백성인과 다시 조용히 이야기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사실 난 좀 바쁜 편이었다. 내게 심리상담을 원하는 환자들이 어지간히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줄을 선 사람들처럼 차례차례 내게 다가와 고민들을 늘어놓았다. 벌써 3주일째 아무도 나를 면회 오지 않아요. 소변을 서서 보는 여자들도 있다면서요. 그게 사실일까요. 그런 여자를 만난다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더러는 이번 선거 때문에 속을 태우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 나는 여기 있을 몸이 아니야. 제기랄, 그런 뻔뻔스러운 자식이 감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꼴을 보고 있어야 한다니. 제발 날 좀 내보내줘. 며칠만이라도 좋아.
_「상자 속으로 사라진 사나이」, 153쪽
옥상 서편 모서리부터 건물 전체의 6분의 1가량이 퀭하게 사라져버린 아파트 한 동 앞에서, 나는 온종일 넋이 나간 채로 흙먼지 안에 붙박여 서 있었다. 마리아를 포함한 32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이 희대의 참사는, 본드에 절어 밤새 광란의 술판을 벌이던 불량 청소년들이 손도끼로 도시가스 호스를 자르고 거기에 담뱃불을 지져댄 것으로 경찰에 의해 잠정 결론 내려졌다. 잔해 더미 속에서 마리아의 시체가, 함몰된 머리 따로 발목의 나비 문신이 선명한 하반신 따로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닷새가 지나서였다.
_「그녀는 죽지 않았어」, 208쪽
그렇군요. 그렇군요……. 사내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고개만 까닥일 뿐이었다.
그 후로 내 눈에는 오직 댈러웨이의 사진만이 드레드레 흔들리며 떠올려질 뿐이었다. 침대에 누워 창도 없는 휑한 벽을 쳐다볼 때도 그랬고 꿈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 사진은 흑백이었을까, 컬러였을까. 렌즈는 광각이었을까, 망원이었을까. 필름의 감도는 무엇이고 또 피사체의 구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요란한 컴퓨터의 도움이 없어도, 몽타주 같은 후반 작업이 없어도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다니. 댈러웨이, 그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_「댈러웨이의 창」, 264쪽
특이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흔히 ‘사이코’라 부른다. 그들은 통상적인 이해의 범주 바깥에서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과 불화하거나 세상과 어긋난다. 사이코로 통칭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저마다의 은유인바, 내가 이 책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 사람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이상함 속에서 내가 먼저 읽은 것은 낯설지 않은 내 모습이었다.
_「에필로그」, 288~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