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생산성이 극도로 발달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며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일의 목적은 무엇이며, 만약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 데 보내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다면 일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_p24
시민들이 상업적 부를 생산하지도 소비하지도 않는 자유시간은 자본주의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자본주의는 자유시간에도 사익이 창출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예전부터 늘 생산성 향상으로 확보된 시간을 낚아채어 추가 노동을 창출하도록 되먹이는 식으로 대응해왔다. 이런 노동은 비생산적이고 환경 파괴적이며 상업적 활동의 영역을 사적인 삶 속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는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_p55
좋은 직원이란 전문성이라는 사회 규범을 능숙히 실현하고 헌신과 열정을 보이며 조직의 목표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누가 가장 생산성이 높은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에 진취적이고 사근사근하며 역동적이고 협력적인 직원을 최고로 친다. _p74
문제는 자본주의 기업이 보람 있는 일자리를 제공할지의 여부는 흥미로운 일을 하려는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일이 기업에 수익을 가져다주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다. _p82
소외를 유발하는 일은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에너지를 고갈시켜 일하지 않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축 늘어져 도피성 오락을 즐기거나 그날의 고된 노동을 보상해줄 무언가를 사들이는 데 쓰게 만든다. _p90
20세기 이후로 자본주의는 인간이 일할 필요에서 해방되는 방향이 아니라 일회성 소비재 제조, 유통, 홍보를 중심으로 이전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던 미심쩍은 일거리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더불어 여가도 가능한 한 소비성 서비스에 투여하도록 몰아간다. _p107
주어진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일만 하느라 소진된 기력을 회복하고 일에 대한 보상을 누리는 데에, 아니면 일자리를 찾고 일할 역량을 갖추고 유지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수많은 일을 하는 데에 쓰는 우리는 그중에 진정 자신을 위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하는 활동은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기에 참여하기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생존 보장을 위한 것이 대부분인 것 같다. _p117
정부는 대량실업과 불평등 심화라는 구조적 현실을 외면한 채 빈곤과 실직 같은 문제를 계속해서 문화적 문제 또는 행동방식의 문제로 틀 지으려 한다. 사회 계급에 관한 논의가 시들해지면서 실업의 구조적 요인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빈곤은 자기관리 부족의 당연한 결과라는 인식만 남았다. 일자리 수보다 실업인구가 훨씬 더 많은 지역에서조차 자기를 더 잘 꾸미고 조금만 더 노력하거나 자신을 믿기만 하면 일자리를 찾아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유지되고 있다. _p124~125
누군가 일에 대한 애착을 고백할 때는 그 일이 본질적으로 만족스러운 경험을 선사해서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검증된 지위를 가진 다른 성취의 기회가 없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_p137
내가 만난 비노동자 중에는 사회적 고립감 때문에 힘들다는 사람은 있어도 이전 직장에서 누리던 사회적 환경이 그립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_p168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생산성과 생존을 위해 예상하고 대응해야 할 잡다한 일에 압도된 채 계속 밀고 나간다. 스트레스와 불안, 피로 등 온갖 증상에 시달리던 나의 연구 참여자들의 회복력을 잃은 몸을 되살려야 한다고, 다시 말해 삶의 속도를 늦추고 잠을 충분히 자고 야외 활동을 늘리고 좋은 음식을 먹고 긴장감 없이 여가를 즐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_p180
임금을 더 많이 받자고 제 몸과 마음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길 원치 않았다. 일을 통해 도덕적 자율성과 도전 의식, 만족감을 얻기를 바랐지만 공식적인 유급 고용 영역에서는 그런 바람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해 야망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로 했다. 금전적 필요를 채우면서 자유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정규직을 떠나 소속 없이 일하거나 몰입도가 낮은 시간제 일자리를 구했다. 그 시간을 나이 든 부모를 돌보거나 아이들과 노는 데 쓴 사람들도 있다. 건강이 좋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더 잘 돌보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_p188~189
일에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을지 제대로 숙고하려면 일을 줄이기 어렵게 만드는 물질적인 장애물도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이 소득을 얻는 주요 수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에 저항하는 데는 여러 가지 물질적 위험과 손실이 뒤따르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_193
소득이 줄어들면 반드시 물질적 박탈감과 현실적 곤란을 겪을 텐데, 그럼에도 일에 저항하는 데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궁금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 소득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그것을 배우자 소득이나 저축, 임시직 수입 또는 실업 수당 같은 다른 자원으로 충당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또한 자녀가 있는지,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누리는 지인들이 있는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 연구 참여자 중에서 극도로 가난한 이들조차 자기 삶을 희생한다고 보는 시선을 거부했다. _p195
다운시프트 생활자도 시간과 돈 두 가지를 다 갖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경험에 따르다 보면 소득을 줄여 자유시간을 늘리는 쪽으로 생활방식을 바꾸게 된다. 단지 물건을 더 많이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일하는 데에 시간을 바치지는 않겠다고 결심한다. _p200~201
우리는 이제 소비를 줄이는 것이 그저 일을 줄인 탓에 치러야 하는 달갑지 않은 형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을 줄이고 쇼핑을 줄이면서 면담 참여자들은 상품 중심성에서 거리를 둠으로써 더 만족스러운 좋은 삶의 이상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자기 나름의 만족감에 관심을 두면서, 풍요로운 사회에서 기본으로 삼는 부와 즐거움, 충만함의 본질에 의미를 제기했다._p208
소비하지 않아도 시간, 기술, 기력을 들여 필요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만족감의 원천이었다. 풍요로움이란 시장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또는 소비주의적인 좋은 삶의 이상과 크게 대조되는 견해이다. _p219
오늘날 일 중심 사회와 그 상상력 부족을 아무리 비판적으로 본다고 해도, 일이 여전히 소득, 권리, 소속을 얻는 주 원천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오늘날 일 중심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일에 강하게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용감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 또는 건강이나 개인적 상황 때문에 일을 하기 어려운 데다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는 사람밖에 없을 거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일을 줄이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적 제약을 고려할 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자본주의의 생산성 향상으로 얻은 시간 절감의 혜택을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사회를 조율할 수 있을지,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지이다. _p263~264
이름이 뭐가 되든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회 전반에 걸친 노동시간 단축 정책이 될 것이다. 이 정책을 통해 사회적으로 필수노동을 분배하는 방식을 개선해 실업률을 줄일 것이다. 가용 노동시간을 전체 인구에 더 균등하게 나눔으로써 소수의 직업 엘리트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는 실업자, 불완전 고용자, 임시 고용자로 심하게 분열되는 상황을 뒤집는 것이 이 정책의 목표이다. 각자가 일을 줄여 더 많은 사람이 일할 수 있게 할 것이다. _p267~268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 필요를 충족할 자원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믿음에 근거해 소득 최저선을 설정하기 위해서 설계한 것이다. 소득을 늘리거나 전문직에 계속 종사하기를 원하는 시민은 기존의 유급 고용 체제를 활용하면 되지만, 기본소득의 취지는 사회 구성원 중 누구도 극빈 상태에 처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굶주림의 위협에서 벗어나 두려움 없이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운동을 펼치고, 일 바깥에서 더 풍부하고 다양한 삶을 누릴 관심과 역량을 계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_p273
일 중심성이 덜한 사회로 전환함으로써 혜택을 볼 사람은 다양하며, 특정 인구집단만이 자기주도적 삶을 열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 중심적 존재 방식을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은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경험하는 그 어디에서나, 사회적으로 규정된 역할과 자아감 사이의 균열을 느끼는 그 어디에서나 돋아난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족이 있든 없든, 일하든 일하지 않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마찬가지이다._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