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관한 우리 시대의 핵심 질문,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호메로스가 노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배우들이 연기하던 장르’, ‘중세 시대 로맨스와 초현실주의, 현대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진정한 계승자’. 판타지 소설이 엘리트 문학계에서 배척당하던 때만 해도 이런 수식어들을 외치는 일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판타지가 책이라는 매체를 넘어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문화 전반으로 널리 퍼졌다는 사실과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장르가 됐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관념을 탈피한 세계관, 상식을 뛰어넘는 사건 등 판타지 특유의 설정들은 많은 작품에서 활발히 차용된다.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는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판타지 문학을 심도 있게 파헤치는 책이다. 저자 브라이언 애터버리는 판타지와 SF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연구자다. 세계환상문학상, 신화상, 필그림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한 그는 어슐러 K. 르 귄과 SF 단편선을 편집하는 등 학문적인 연구를 넘어 판타지, SF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애터버리는 판타지를 둘러싼 수많은 질문을 단 두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판타지가 어떻게 의미 있을 수 있는가? 물리 법칙을 뒤틀고 과거 사실을 부정하는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인간 본성과 세계의 작동 방식을 파고드는 통찰의 원천이 되는가? 둘째, 판타지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설 속 인물의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독자의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는 판타지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밝혀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애터버리는 아홉 가지 관점, 즉 ① 판타지의 진실성, ② 사실주의와의 관계, ③ 화합을 추구하는 결말, ④ 갈등보다 건설적인 각본, ⑤ 여성 작가의 계보, ⑥ 유토피아 문학의 필요성, ⑦ 헤게모니 남성성에 대한 대안, ⑧ 판타지의 정치성, ⑨ 두려움을 통제하는 방식이라는 주제로 판타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비현실을 전제로 하기에 판타지는 대개 현실의 문제들과 거리를 두는 듯 보인다. 용, 지니, 골렘같이 환상적인 존재들이 투표, 정치, 식민주의, 프로파간다와 어떻게 관련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판타지가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만큼, 현실이라는 1차 세계는 판타지라는 2차 세계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어스시〉 시리즈의 어슐러 K. 르 귄, 《반지의 제왕》의 J. R. R. 톨킨, 《왕좌의 게임》의 조지 R. R. 마틴같이 대표적인 판타지 작가들의 작품부터 은네디 오코라포르, 헐린 웨커, 알리에트 드 보다르드 같은 현시대 작가들의 작품까지, 방대한 사례들을 재미있게 풀어내는 이 책은 가장 현대적인 관점으로 판타지가 현실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탐구한다. 기존의 판타지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관점을, 입문자들에게는 판타지 문학의 전체적인 지형을 조망할 수 있는 가이드를, 창작자에게는 작품의 가치를 더할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책이다.
“판타지는 진실이다”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는 장르
브라이언 애터버리는 판타지를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라고 표현한다. 비현실을 전제로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진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슐러 K. 르 귄은 여기서 더 나아가 판타지가 진실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적인 스토리 공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불가능한 사건들을 어떻게 우리 삶의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애터버리는 판타지가 진실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판타지는 신화 차원에서 진실이 될 수 있다. 신화는 우주를 설명할 뿐 아니라 집단, 계층, 젠더의 역할, 의례와 종교적 의무까지 보여주는 전통적인 신념이자 내러티브다. 사람들은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신화에 의지했고, 이러한 신화는 대개 판타지의 바탕이 된다.
둘째, 판타지는 메타포 차원에서 진실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작품에 등장하는 용은 진짜 용이 아니라 독재자를, 동물과 의사소통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를, 해일이나 화산 폭발같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을 의미할 수도 있다.
셋째, 판타지는 구조 차원에서 진실이 될 수 있다. 사실주의가 사회와 자아의 ‘형태’를 묘사하는 데 뛰어나다면, 판타지는 표면적인 정확도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숨은 ‘구조’를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필립 풀먼의 《황금나침반》에는 ‘데몬’이 등장한다. 데몬이란 정령이라는 신화적 전통에 셰이프 시프터(변신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더해진 것으로, 이들은 반려동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의 자아와 연결된 인공 기관 같은 역할을 한다. 작품은 다른 존재로 분산돼 있는 자아의 구조를 통해, 자아가 한 사람의 피부 너머로 뻗어 나가 다른 생명체를 침범할 수 있다는 진실을 드러낸다.
비현실적인 무언가만이 우리를 더욱 깊은 진실로 데려간다고 주장하는 애터버리는, 판타지가 사실주의와 비교되며 열등하게 여겨지는 경향에 반기를 들며 J. R. R. 톨킨의 말을 인용한다.
“이미지들이 1차 세계의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결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판타지는 낮은 형태가 아니라 높은 형태의 예술이다.”
합의와 개선, 연민과 공존
우리에게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장르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은 방식으로 진실을 보여주는 판타지는, 이를 통해 때때로 우리 삶에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그 자체로 하나의 대안이 되기도 한다. 지난 몇십 년간, 그리고 지금까지, 대안적인 현실을 함께 꾸려나가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가치관을 가진 집단이 결집되는 과정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 문제와 파괴적인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런 시기에 판타지는 우리에게 다른 존재,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을 이해하고 그들과 공존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세계가 꼭 지금 같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다양한 방식으로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한다. 판타지가 재미있고, 그 진실성이 의미 있는 이유다.
판타지가 우리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의 하나가 ‘결말을 맺는 장르적 특성’이다. 판타지는 결말에 이르러 화합을 추구한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극대화되는 순간에 결말을 짓는 호러 장르와 달리, 판타지는 환상 동화의 전통적인 구조상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갈등을 필수적으로 해결한다. 또한 상상력이라는 동등한 땅 위에서, 캐릭터들은 각자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사고방식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헐린 웨커의 제목부터 파격적인 《골렘과 지니》에는 1988년 뉴욕의 이민자 집단에서 살아가는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과 중동의 아랍인이 등장한다. 지니와 골렘이라는 서로 다른 전통을 믿는 이들은 서로의 세계를 나란히 겹쳐 나가며, 자신의 신념과 지식이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합의 결말로 나아간다.
만약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이야기가 갑자기 종료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이야기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는 실제 세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무기를 비축하고, 외부인을 악마화하며, 독재자에게 투표한다. 우리는 판타지의 결말을 통해 공포에 압도되지 않고 다른 존재와 공존하는 방법을 배운다.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를 읽는 것으로 현실의 행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이면을 생각할 수 있고, 두려움 너머를 엿볼 수 있으며, 행동의 계기를 마련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판타지가 일상을 충실히 재현하는 이야기보다 더 가치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판타지는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며, 때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도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