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해는 형제들 중에서 글공부와 글씨 쓰기를 가장 좋아했다. 그만큼 붓 욕심, 종이 욕심, 먹 욕심, 벼루 욕심이 많았다. 특히 큰형이 ‘붓돌이’라고 별명을 지어 부를 만큼 붓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나 형들이 가진 좋은 붓을 보면 눈을 반짝이고 군침을 흘리니, 아까운 줄 모르고 나눠 주곤 했다.
“아버지, 두 개를 만들면 되지요. 하나는 제가 갖고요.”
운해가 막냇동생의 무성한 배냇머리를 떠올리며 주저 없이 말했다. 아버지의 말처럼 막냇동생은 머리숱이 많아 배냇머리 붓을 두 개쯤 만들어도 충분할 터였다.
“허허허허! 저런저런, 저렇다니까. 우리 운해의 붓 욕심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버지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_본문 20~21쪽 중에서
“안 되겠다. 준비를 해야겠다.”
아버지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큰형이 방을 나갔다. 이어 막쇠 아저씨가 나가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버지도 방을 나갔다. 방 안에 운해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온갖 생각들이 운해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그중에 혼자만 사라졌다는 외사촌 형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필요한 거는 미리 옮겨다 놨고요. 여차하면 우리 식구들은 몸만 피하면 됩니다.”
아버지의 말처럼 큰형이 아버지 대신이라는 말이 맞았다. 어느 틈에 큰형이 피난을 갈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집 안에 있는 귀중품이며 옷가지, 당장 먹을 식량까지 짐이 어마어마할 터인데 소리 소문도 없이 해 놓았다고 했다. _본문 43쪽 중에서
뒷담 쪽문으로 해서 담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바로 대숲이었다. 그 대숲을 질러 가면 곧장 뒷산 계곡을 탈 수 있는 사잇길이었다. 운해가 작은형을 따라 몇 번 가 본 길이었다. 쪽문으로 집을 빠져나와 재빠르게 움직인 운해는 작은형을 따라 무사히 대숲에 들어섰다.
“가만!”
작은형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러고는 땅바닥에 귀를 댔다. 운해도 작은형을 따라서 했다. 대숲은 이미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이 거쳐 간 탓인지 꺾이고 쓰러진 대나무들이 즐비했다. 지나간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쿵! 투둑, 투둑, 다다다다, 텅텅텅! 운해도 똑똑히 들었다. 그물처럼 뻗은 대나무 뿌리를 통해 전해지는 낯선 소리들을 말이다. _본문 56쪽 중에서
운해는 보퉁이에서 가장 큰 붓을 꺼내 들었다. 장리가 만들어 준 노루 겨드랑이 털로 만든 장액필이었다. 그러고는 가죽 주머니에 담긴 먹물을 벼루에 따랐다.
“흐읍!”
운해는 붓에 먹물을 찍기 전 두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골랐다. 감은 눈 속에 별 무리가 둥둥 떠다녔다. 그 많은 별들 중에서 빛나는 별을 골라 내야 했다. 마음을 모조리 담을 수 있는 별! 운해의 글쓰기는 항상 그런 것이었다. 운해는 가장 빛나는 별을 골라 얼른 글자 하나를 담았다. 작은형의 이름 첫 자인 ‘하늘 천(天)’이라는 글자였다. 그리고 그다음 별을 골라 자신의 이름 첫 자인 ‘운(雲)’이라는 글자를 달았다. 운해는 작은형을 생각하며 이어서 쓸 글자들을 골라 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고 큰 붓에 먹물을 듬뿍 찍었다. _본문 58~60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