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가계부와 일기로 37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기록했다. 그 기록에는 아내의 특출한 기억력과 꼼꼼함으로 극히 세밀한 부분의 일상 사도 빠뜨리지 않고 써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내밀한 감정과 깊은 마 음속 생각도 진솔하게 표현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쓰기에 몰입하여 그날의 기억과 대화하면서 병마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나 무력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는 자기 정화의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88권의 꽤 방대한 기록물이 축적되었다. - 머리말
아내는 일기에 자신의 내면의 생각이나 마음속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적어 놓았다. 당시에 아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도 했지만 이제야 좀 더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다. 특히 몸이 평소보다 유난히 아파 내게 밥을 차려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날들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고 출장이나 외출에서 돌아와 밥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투정 부린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아내의 속사정을 이제야 알고 마음이 몹시 아프고 좀 더 아내를 배려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생각에 눈물이 났다.
아내의 일기장은 내게 타임머신과도 같다. 지난 37년 중 내가 가보고 싶은 날의 일기장을 펴보면 당시의 일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르니 언제라도 그때로 돌아가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아내 일기를 읽는 동안 아내와 같이 산 지난 37년을 처음부터 다시 산 행복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함께 산 것이 37년 아니라 그 두 배인 74년인 것 같다. 세월과 함께 메말라버린 30여 년 전의 일상 사도 바랜 색깔이 다시 찬란하게 빛나고 살아 움직이는 풍요로움을 맛보았다. 우리는 처음 만나 짧고 짧은 19일 만에 결혼했지만, 그 짧은 만남의 시간은 37년을 지나 74년에 이르는 길고도 긴 여정이 되었다.
- 프롤로그 _ 마지막 생일카드
전공인 생화학 강의에서 생명현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효소가 체 내 수많은 물질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기질을 어떻게 찾아 결합하는지를 설명할 때, 내가 늘 강조하는 것이 있다. 효소가 가장 적합한 기질과 결합하는 생화학 반응은 몇 개의 강력한 힘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약한 힘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효소와 기질 사이의 울퉁불퉁한 표면에서 미약한 결합이 무수히 많이 일어나면서 서로가 단단히 밀착되어 총합적으로 강력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결합인 결혼도 다르지 않다. 몇 개의 강력한 힘보다 두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작고 사소하지만 다수의 힘들이 모이는 게 핵심이다. 인간 사이의 강력한 힘이라면 권력이나 재력 또는 미모가 될 것이다. 이런 강력한 힘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같이 나누고 공유하는 관계, 그런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 한 배우자이다.
- 01 신혼생활 _ 보스턴에서 설계한 미래
이러한 미생물이 이루는 군집의 조성은 각 개인별로 다 다른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어 우리 각자의 건강 상태와 성격뿐만 아니라 심지어 독특한 체취 등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우리 몸의 세포들과도 긴밀한 연결관계를 맺고 있어, 긴 시간에 걸쳐 인간과 인체 미생물이 공진화한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개인별 미생물 군집의 독특한 조성은 출생 무렵 어머니로부터 신생아에게 가장 많이 전달되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부모나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전달되어 형성되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 간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미생물 군집 간의 상호교류와 공명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보이고, 그 공명현상이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냄새나 감촉 등 오감으로 드러날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그 깊숙한 곳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연결의 끈을 이루고 있는 근저가 아닐까. 남과는 다른 나와 딸애의 특별한 미생물 군집 간의 상호연결 네트워크가 서로 호응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 02. 부산 시절, 딸과 병아리
걷는 것은 대표적인 단순반복 동작이다. 이 단순반복 리듬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몇 가지 꼽으면 하루 세 끼 식사와 잠자기, 그리고 심장박동, 숨쉬기 등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이 단순반복 리듬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circadian rhythm(24시간 주기 리듬)’이라고 하는데, 이런 단순반복 리듬이 깨지면 즉각적으로 몸과 마음에 이상이 나타나고 오래되면 병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 가장 좋은 치료법은 걷기나 달리기와 같은 신체의 단순반복 동작을 오래 지속하는 것이다. - 03 서울 시절, 고통과 함께한 시간
그리고 비강암 후유증으로 내 몸의 여러 군데가 아프고 기능이 갑자기 망가지니 처음에는 두렵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럴 때도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니면 잇몸으로 산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마세요. 나는 아픈 것은 잠으로 이겨내요. 같이 잠이나 푹 잡시다!” 아내의 이런 생각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이겨내게 해주었고,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는 나를 위로하고 내 고통까지 덜어주었다.
“아픈 것은 잠으로 이겨내요.”라는 아내의 말은 그 후에도 나에게 큰 위안이 되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몸이 아프고 안 좋을 때는 ‘그래, 자서 잊어버리자. 깨어 있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하면서 마음을 내려놓고 잠을 청해 견뎌내곤 한다.
03 서울시절, 고통과 함께한 시간
2022년 12월 29일 오전 11시 55분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누워 있는 아내의 양손을 딸아이와 내가 한 손씩 잡고 있을 때였다. 맥박 뛰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판이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고 일직선으로 쭉 선을 그어갔다.
‘아, 아내가 이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구나.’ 그렇게 느끼는 사이 잡은 아내의 손이 급속히 차가워져 갔다.
온기가 몸에서 빠져나가면서 손을 잡고 있는 우리에게 작별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잡은 손을 놓으세요~.” - 04 화해. 아내의 지팡이와 희망
이렇게 내 몸은 계속 흘러가듯 변화하고 있다. 거기에 따라 내 마음도 수레의 두 바퀴처럼 같이 흘러간다. 딸아이를 시집보내는 꿈이 아내가 고통을 감내하게 했듯, 아내가 남긴 따뜻한 기억과 그리움이 나를 숨쉬게 한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더듬으며 그림을 그리고 그리움을 새긴다. - 에필로그. 그리움을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