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때 그 원형을 갖춘 한양도성은 1398년 정종의 즉위 후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태조 이후 도성수축을 지휘한 인물은 세종이었다. 1421년 12월 10일 세종은 우의정 정탁을 도성 수축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무너진 곳 2만 8,487척을 수축했다. 태조 때는 참여하지 않았던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포함하여 전국에서 장정을 징발했다. 총 32만여 명의 장정과 함께 기술자에 해당하는 공장(工匠)의 경우도 2,000여 명이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숙종 때와 순조 때에 대대적인 수축 작업이 이루어졌고, 규격이 서로 다른 돌의 형태를 통해 시대별 도성 수축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2022년 5월 청와대 전면 개방으로 청와대 뒤편의 백악산을 통해서도 이제 한양도성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한양도성이 있는 낙산공원 등에 올라서면,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공간인 한양도성을 거닐며,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감상해보기 바란다.
- ‘한양도성을 걷는 즐거움’ 중에서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이후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그 자리에 세워졌다. 1956년에는 문교부의 주도로 땅속에 묻는 등 비석의 수난은 이어졌다. 1963년의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삼전도비를 반성의 역사로 삼자는 의미에서 원래 위치했던 곳 근처인 석촌동으로 옮겼다. 현재의 위치인 석촌호수 쪽으로 옮긴 것은 2010년이다. 삼전도비는 우리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분만을 내걸고 치루는 잘못된 전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생생하게 기억시켜 주고 있다.
- ‘삼전도의 굴욕과 삼전도비’ 중에서
조선시대 북촌은 양반들이나 고관들이 주로 거주했던 공간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하면서 관청이 밀집해 있던 육조 거리와 인근에 시전이 형성되어 거주에 적합한 곳이었다. 북촌의 좋은 입지는 현대에도 이어졌고, 서울의 주요 학교들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중동고, 창덕여고, 풍문여고 등 북촌에 있었던 학교들은 1970년대에 들어와 정부의 강남 이전 정책이 추진되면서, 중앙고와 덕성여고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강남으로 옮겨졌다. 경기여고는 1945년 미국대사관 옆 정동으로, 1988년 강남구 개포동으로 이전했다. 경기여고가 이전한 후 이곳에는 창덕여고가 자리를 잡았는데, 창덕여고는 1989년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했다. 헌법재판소 자리에는 천연기념물 백송과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개화파 정치인 홍영식의 집터 표지석이 있다. 1885년에 설립된 최초의 병원 제중원도 이곳에 있었다. 최근까지 감고당길에 위치했던 풍문여고는 2017년 강남구 자곡동으로 이전하여 풍문고등학교로 바뀌었다.
- ‘서울 북촌의 품에 있었던 고등학교들’ 중에서
현재의 서촌은 조선 후기 중인 문화의 중심 공간이었다. 양반과 평민 사이에 위치한 중인은 기술직 종사자, 중앙 관청의 서리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중인들은 모임을 개최하여, 시와 문장을 서로 겨루는 시사 활동을 했다. 중인 활동의 중심이 된 곳은 시인 천수경이 주인이었던 송석원(松石園)으로, 이곳의 주인은 이후 여러 번 바뀌었다. 장동 김씨와 여흥 민씨를 거쳐 1910년경에는 친일파 윤덕영이 송석원을 소유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윤덕영은 1914년에서 1915년에 걸쳐 서촌의 옥인동 땅의 절반 이상을 사들였다. 그리고 옛 송석원 자리에 프랑스풍 양관이 중심이 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벽수산장은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지만, 사람들은 이를 조롱하여,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렀다. 벽수산장 남쪽에는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은 2층 벽돌집이 있었다. 1930년대 근대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것으로, 한식과 양식의 기법에다가 일본식과 중국식이 섞여 있는 독특한 형태였다. 이 집은 1972년부터 박노수(1927~2013) 화백이 소유했는데, 화백의 작고 후에 집과 함께 미술작품들이 종로구에 기증되었다. 박노수미술관 주변에서는 시인 이상이 20년간 살았던 집터에 자리한 ‘이상의 집’, 연희전문학교 학생 윤동주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했음을 알려주는 ‘윤동주 하숙집’ 표지판도 찾아볼 수 있다.
- ‘중인 문화의 중심, 송석원의 역사’ 중에서
서울 서대문 지하철역 인근의 행촌동에는 한눈에도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 옆에 붉은 벽돌의 외관을 한 2층의 서양식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한동안 폐가로 방치되었던 이 집은 2000년대 중반 ‘DILKUSHA 1923’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돌이 발견되면서,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의 집이었음이 밝혀졌다. ‘딜쿠샤’란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란 뜻이다. 1923년 건축해 1942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부부는 약20년간 이곳에 살았고, 메리는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라는 자서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앨버트에게 1919년의 3·1 운동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메리가 3·1 운동 전날인 2월 28일 아기를 세브란스병원에서 출산했다. 세브란스병원은 남대문 밖 복숭아골, 현재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이 위치한 곳이다.
- ‘테일러 부부와 딜쿠샤’ 중에서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활인서와 같은 의료기관이 국가 주도의 의료기관이었다면 존애원은 지방에 설치한 사설 의료기관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존애원은 김각, 성람, 이전, 이준, 강응철, 김광두, 정경세 등 상주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들이 뜻을 모아 창설했는데 13개의 문중이 참여했다. 유성룡의 제자 정경세는 지역 양반들에게 의료원 설립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으며, 의술에도 능했던 유학자 성람은 존애원의 초대 주치의 역할을 했다. 존애원의 명칭은 송나라 유학자 정명도가 말한 ‘존심애물’, 즉 ‘마음을 지키고 길러서 만물을 사랑한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정경세와 이준의 문집에는 1602년에 의국인 존애원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며, 조선 후기의 학자 송시열이 쓴 정경세 행장에는 “동지들과 의약을 갖춰 놓고 고을의 병자들을 구제하면서 정명도 선생의 말을 취하여 존애원이라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 존애원’ 중에서
이상룡, 김용환 등과 함께 안동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는 이육사(1904~1944)다. 1904년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은 또는 원삼이며, 활로 개명했다. 안동에서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이황의 후손이라는 명문가의 자존심은 그를 독립운동으로 투신하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죄수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여섯 형제의 우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의 육우당은 원래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원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조성으로 수몰되자,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으로 이건되었다. 수몰 이후 생가의 기능이 훼손되자, 고증을 거쳐서 복원한 모습이 현재 모습이다.
- ‘이육사문학관과 육우당’ 중에서
담양에서는 조선시대 호남 선비들의 풍류와 멋이 담긴 정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은 양산보(1503~1557)가 지은 정원 소쇄원이다. 양산보는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스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자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소쇄원은 조선 최고의 민간 정원으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면서 곳곳에 건물을 지어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매우 매력적이다. 소쇄원이라는 이름은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뜻으로 양산보가 그 이름을 지었다. 혼탁한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던 양산보의 뜻을 담았다. 소쇄원은 1520년에 건립되기 시작하여 1530년대에 본격적으로 착공되었다. 1540년대에는 원림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에게는 은둔처였지만, 당대 학자들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송순, 김인후, 임억령, 정철, 고경명 등 호남을 대표하는 사림들이 모여들어 시문을 주고받으며, 학문과 풍류를 즐겼다. 송순은 면앙정을 세운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소쇄원 조성에 도움을 주었으며, 소쇄원을 증축할 때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양산보와 소쇄원’ 중에서
1801년 정순왕후 수렴청정 기간에 이루어진 대표적인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박해로 인해 정약용(1762~1836)과 정약전(1758~1816) 형제는 유배길에 올랐다.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에서 실학을 완성한 스토리는 많이 알고 있지만, 당시 함께 유배를 가서 흑산도에 머물렀던 정약전에 대해서는 《자산어보》의 저자라는 정보만이 알려져 있다. 정약전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책을 집필한 공간은 흑산도 사리마을의 사촌서실이다. 정약용은 강진에 있으면서 정약전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촌서실에 대해서는 “내 형님 손암 선생께서 머나먼 남녘 조그마한 섬인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지 7년이다. 그곳의 어린아이 대여섯 명이 형님을 따라서 서사를 배웠다. 형님은 이미 초가집 두어 칸을 짓고 사촌서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했다. 사촌서실은 사촌서당, 복성재라고도 불리며, 《자산어보》의 산실로 기억되고 있다.
- ‘정약전과 흑산도 사촌서실’ 중에서
〈세한도〉의 명성으로 김정희(1786~1856) 하면 그의 유배지였던 제주도를 많이 떠올리는데, 김정희가 태어난 곳은 충청도 예산이다. 김정희는 1786년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밑에서 충청남도 예산현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추사고택 우측에는 조선 왕실 여성 유일의 홍문인 화순옹주의 홍문이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로, 김한신의 부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가 된다.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죽자, 화순옹주는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식 투쟁 끝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 딸의 죽음을 괘씸하게 여긴 영조는 열녀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정조 때에 열녀임을 인정하는 홍문을 세웠다.
- ‘추사 김정희의 예산 고택’ 중에서